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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30. 17:29 Bluewave사랑방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 호세 리잘 (Jose Rizal :1861~1896)
호세 리잘(Jose Rizal)은 누구인가
주초에 거래선 업무지원차 마닐라를 방문하여 시내를 돌아 다닐 때 길가에 걸어놓은 아래의 깃발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평소 알고있는 리잘 이란 이름과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오는 6월19일이 필리핀의 독립영웅 호세 리잘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중에 알게되었다.


파일 : 리잘 @ 150 logo.png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 35세)은 스페인 치하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주창한 필리핀의 독립 지사다. 의사가 되기 위해 스페인으로 유학을 갔던 그는 마드리드에서 '메리 메 탄헤레'라는 소설을 발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식민지 출신의 젊은 유학생이 발표한 한 권의 소설은 당시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마드리드의 지식층 사이에서 급속도로 읽혀지게되었다.

스페인 정부의 추방령에 따라 필리핀으로 돌아온 리잘은 조국 필리핀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실천에 옮기고자, 필리핀 민족동맹을 결성하여 반체제 운동의 기수가 된다. 하지만 그의 활동을 주목한 스페인 당국에 체포되어 민다나오 섬으로 유배당한다. 그리고 1896년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현재의 리잘 공원에서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인들의 가슴 깊숙이 감동을 주었으며, 현재까지도 리잘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다.

짧지만 굵게 살다갔지만 국민들로부터길이길이 추앙받는호세 리잘의 삶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세 프로타쇼 리잘 메르카도(jose pritacio rizal mercado)는 1861년 6월 19일, 라구나주의 칼람바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프란시스 코 메르카도(부)와 테오도라 알론소(모)의 2남 9녀중 7번째로 태어났다.그 당시 호세 리잘의 아버지는 칼람바 최초의 석조가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제분소, 약국, 그리고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교육을 잘 받은 여성으로서 그것을 뒷받침해 주듯이 그의 집 서재에는 수천권의 책이 있었다.

그는 2살때 영어의 알파벳을 모두 익혔고 세 살때는 누이들의 그림책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어느날 밤 어린 리잘은 등불 주위를 맴돌며 날아다니고 있던 나방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이것을 지켜보던 리잘의 어머니는 그에게, 등불이 좋아 엄마 나방의 말을 듣지 않고 등불에 가까이 갔다가 날개가 타서 죽은 어린 나방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린 리잘은 왜 어린 나방이 등불속으로 날아 들어가 타 죽었는지를 이해했다. 어린 나방처럼 그도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등불 옆에 있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서 등불이란 곧 진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당시 필리핀 민족이 처한 음울한 시대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필리핀은 독립국가가 아닌 스페인의 식민지(1571-1898)였던 것이다.

11살때인 마닐라에서의 학생시절

호세 리잘은 나이에 비해 늦게 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의 모든 상을 휩쓸었으며 성적은 언제나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아테네오를 졸업한후 리잘은 산토 토마스 대학에 입학했다. 산토 노마스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의학 못지않게 시와 미술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이때 대학 성적은 아테네오에서의 성적에는 미치지는 못했으나 의사로서 병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의술을 베풀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된다.
산토 토마스 대학의 학생시절 리잘


그 무렵 리잘은 레오노르 리베라라는 여학생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레오노르는 당시 라 콘코르디아 대학에 재학중이었다. 레오노르 역시 그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꼈으며 그와 결혼을 약속하기까지했다. 리잘은 21세가 되었을 때 그의 형인 파시아노에게 스페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시아노는 리잘에게 356페소를 주었으며 그 돈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머나먼 유학을 떠났다.

리잘은 1882년 5월 3일 배편으로 마닐라를 떠났으며 그로부터 한 달뒤에 유럽에 도착했다. 그는 항해를 하는 동안 한번도 빼놓지 않고 여행중 방문한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에 관하여 일기를 썼다. 스페인에 도착한 그는 센트랄 데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 의학외에도 독일어,영어,미술,그리고 펜싱등에도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이 당시 형은 그에게 매달 50페소의 학비를 보냈다.사실 50페소란 돈은 스페인에서 유학생활을 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이 모자라는 액수였다. 따라서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교통비도 없어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통학해야만했던 리잘은 한번은 영양실조에걸려 병상에 누운 적도 있었다.

리잘은 스페인 신부들과 통치자들이 필리핀인들을 무지하고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위해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그리고 그 소설의 제목을'놀리메 땅헤레(나를 건드리지 마라)'로 정했다. 1884년 리잘은 그의 의학수업을 모두 마쳤다.리잘은 안과수술 실습을 더하기위해 파리에서 다시 독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칼 울머라는 목사를 만나 그의 집에서 여름을 보내며 독일어를 공부했다. 1887년에 그의 소설을 모두 마무리 지었다. 필리핀의 젊은이들 사이에 그 소설은 널리 읽혀졌다.

이에 스페인 당국은 매우 분노했으며 그 소설을 금서로 지정하게 되었다. 필리핀에 있던 리잘의 친구들은 그에게 필리핀으로 귀국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가족을 돕기위해 그가 '자유의 땅'이라고 불렀던 유럽을 떠나 마닐라로 향하게 된다.

필리핀으로 돌아와 집에 머무는 동안 분주히 의학실습을 했다. 시력을 잃어가는 환자들의 눈을 수술해 주었고 칼람바 사람들은 그를 '독일에서 온 의사'라고 불렀다. 농지 임대료는 계속 인상되어 소작농인 필리핀 사람들은 허리띠를 계속 졸라매는 반면 스페인 신부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해 나갔다. 이때 그는 농부들을 선동해 인상된 농지 임대료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기도했고 이로인해 스페인 신부들의 눈에는 목에 걸린 가시같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부들은 스페인 총독이 리잘을 감옥에 가둬두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게 된다.

리잘의 가족은 그에게 유럽으로 되돌아갈 것을 권유했고 5개월간 자신의 고향인 칼람바에 머문 그는 다시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유럽으로 가는 도중 일본, 홍콩, 그리고 미국에 들렀다. 그리고는 미국에서 3주간 머물다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스페인 신부들이 고국에 있는 그의 형 파시아노와 그의 4명의 매형들의 땅을 빼앗아 갔으며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스페인 당국에 반대하는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사진

고국에서 진행되는 개혁운동을 돕기위해 바르셀로나에 있던 필리핀 지식인들은 '라 솔리다리다드'라는 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사람들로는 그레시아노 로페즈 제나, 마르셀로 델 피랄, 마리아노 폰스, 안토니오 루나, 리잘 그리고 블루멘트리등이 있다. 그는 필리핀 국민을 변호하는 수많은 기사와 사설을 그 신문에 실었다. 또한 스페인 정부가 필리핀 국민을 스페인 국민들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필리핀 국민은 스페인 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

이때 리잘은 고국으로부터 더 가슴아픈 소식을 들었다.그의 매형중 한 명이 사망했는데 교회가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과 그의 큰 형 파시아노를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이 필리핀 남쪽섬으로 유배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스페인 당국은 칼람바 사람들의 집과 농토를 모두 빼앗고 그들을 외부로 몰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슬픈 소식은 바로 그의 여자 친구였던 레오노르 리베라가 한 영국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는 않았으나 "영국인은 자유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탄식을 했다.1891년 9월 그의 두 번째 소설인 '엘 필리부스테리스모(곧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는 애국자란 뜻을 내포)'를 완성했다. 그는 이 소설을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처형된 세 명의 필리핀 신부인 부르고스, 고메스 그리고 자모라 신부에게 바쳤다.이 소설은 리잘이 처음에 집필한 '놀리 메 탕헤레'보다 더욱 과감한 개혁의 의지가 곁든 것이었다.

홍콩에서 외과의사 개업 시 명함


그는 일기에 '전쟁터는 바로 필리핀이다'고 썼다.1891년 10월 18일 리잘은 유럽을 떠났다. 여행을 하는 도중 5개국어로 일기를 썼다. 그 당시에 11개 국어를 알고 있었던 상태였다.그리고 여행이 길어지면서 바닥이 난 여행자금 마련을 위해 잠시 홍콩에 들르게 된다. 안과 의사로서 개업을 한 그에게 환자는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를 '스페인 의사'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홍콩은 좋아했지만 조국에서 고통받는 필리핀 국민들을 모른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어떠한 위험이 따르더라도 필리핀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필리핀에 다시 왔으나 스페인 당국은 필리핀에 입국한 이래로 그를 계속 미행했으며 체포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와중에 그의 몇몇 친한 친구들과 '라 리가 필리피나'라는 사회단체를 결성, 연설을 통해 '라 리가 필리피나'가 필리핀국민들을 단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연설을 한지 3일후에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산티아고 요새 감옥에 투옥된다. 그리고 얼마후 잠보앙가의 다피탄이라는 외롭고 한적한 읍으로 유배되어갔다.

리잘이 다피탄으로 유배되어 갔다는 소식은 필리핀 국민에게 커다란 분노를 안겨 주었고 특히 가난한 국민들 사이에서 이러한분노가 더 컸으며 그중에는 안드레오 보니파쇼라는 젊은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리잘의 소설과 리잘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그의 친구들과 함께 '까띠푸난'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했다. 까디푸난의 목적은 무장혁명을 통해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이었다.
사진


1892년 7월 17일 리잘은 다피탄에 도착했다. 망명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했다. 마을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했으며 그 돈으로 인해 마을에는 마침내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다피탄에는 학교가 한 개밖에 없었다. 그래서 리잘은 자기 자신이 직접 학교를 하나 세워 직접 아이들에게 영어, 스페인어,스포츠등을 비롯해 여러 과목을 손수 가르쳤다.

아이들은 리잘의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그를 도와 커다란 폭포가 딸린 수영장도 만든다.아이들은 또한 가구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어른들 또한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그는 또한 그곳에 진료소를 차려놓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환자들중 어떤 부유한 사람이 리잘에게 많은 돈을 치료비로 주기도 했다.

그는 죠세핀 브락켄이라는 딸을 동행해 다피탄으로 왔는데 죠세핀과 리잘은 서로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홍콩으로 돌아간 뒤에도 다피탄에 머물렀다. 리잘 역시도 자유를 몹시 갈망했다. 그는 스페인 총독 라몬 블랑코에게 자원의사 자격으로 쿠바로 갈 수 있게끔 허락해 달라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7월 30일, 그는 블랑코 총독으로부터 그렇게해도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리잘공원내 세워진 호세리잘의 마지막 걸어가는 동상

스페인 군인들로부터 총살을 당하는 호세리잘의 동상
리잘공원내 동상


배를 타고 쿠바로 항해하던중 까띠푸난 혁명이 일어나 반역죄로 스페인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필리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나 스페인 당국은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내리고만다. 1896년 12월 30일 리잘 박사는 루네따공원 (현재의 리잘공원)에서 스페인 소총분대에 의해 총살당함으로써 그의 짧았던 35세의 인생을 마감했다.


2000년에 발행된 1페소 코인속의 리잘

리잘공원내 12m 높이의 리잘 기념탑

비록 35세의 짧은생을 살았지만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민중편에게 다가섰던 그는 국민들 가슴속에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서 추앙받으며 영원히 살아있다. 10만평이 넘는 넓은 리잘공원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posted by bluewa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