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사 주역과 여성편력 중국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인 손문,장개석,모택동은 그들이 이룬 정치적업적만큼이나 여성편력도 다양한 실력을 갖추고있어 흥미롭다. 손문과 송경령의 결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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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과송경령 중국 신해혁명의 주역 손문(孫文:쑨웬)은 여러 번 결혼했다. 첫 아내였던 구식 여성 노모정(盧慕貞, Lu Muzhen)과 사이에서는 1남 2녀를 두었고, 그가 48세때 스물여섯 살이나 적은 송경령과 '세기의 결혼식'을 1915년 10월25일 일본에서 치렀다. 당시 많은 이들은 그가 영어비서였던 송경령(宋慶齡) 의 언니 송애령(宋靄齡)과 결혼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의 선택은 언니의 후임으로 일했던 송경령이었다. 손문에게는 이들 외 가문에서 '남양부인'이라 불리던 '진수분(陳粹芬)'과 족보에 올리지 않았지만 일본국적의 비밀부인를 포한하여 두 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손문의 후배들은 노모정을 '대부인'으로, 진수분을 '둘째부인으로, 송경령을 세째부인이라 하지않고 가족들이 부르는 호칭인 영어로 'Grandma(할머니)'라 불렀다.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사진 장개석과 송미령 그의 정치적 후계자 장개석(蔣介石:장제스) 역시 여자가 많았다. 1901년, 당시 14살이였던 장개석은 부모의 의사대로 절강성 봉화현에서 자신보다 5살 년상인 모복해와 결혼하고 큰 아들 장경국을 낳았지만 결혼 26년만에 이혼한다. 이혼한 모복해는 장씨집안에 눌러살다57세로죽었으며 장씨조상묘에 안치되었다.두번째 여인은 강소성 오현출신으로요이성을 상해에서 만나 첩으로 맞았으며 11921년 34살때 15살인 진결여와는 또 결혼을 했다. 국민당의 정무와 군사대권을 장악하면서 지위의 변화와 권력욕에 불탔던 장개석은 네번째로송경령의 막내 여동생 송미령(宋美齡)을 아내로 두기 위해 세 여자를 모두 청산하려 진땀을 흘렸다. 장개석은자신의 일기를 통하여 자신이 바람둥이며, 일본에서 유학할 때는 사창가에도 드나들었고, 길에서 오가는 여자들의 궁둥이를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고 일일이 고백하였다. 또한 여럿 여자들과 결혼하였으나 새로운 여자와 만날 때는 반드시 그 이전의 여자와의 관계를 명백하게 하였다. 장개석이 송미령과 결혼하기 위하여 전처에게 위자료를 주었고 합법적으로 이혼하였던 사실은 모택동과 비교가 되지 않는 점이다. 장개석과 모택동- 1945년 8월 찍은 사진. 일본의 항복 후, 두 사람은 중경에서 만나 회의를 갖는다.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만난 독재자들,,, 4년 후 공산당군(인민해방군)은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첫째부인 양개해와아들인 모안영(우) 조안청(좌) 위에 예를 든 두사람과 비교하면 모택동의 여성편력은 화려하다. 첫 번째는 毛가 아직 몸과 마음이 떠돌이 신세였을 때 그를 도와주었던 梁 교수의 딸이다.북경대학 신문방송학과에 다녔던 양개혜(梁開慧)는 학식과 미모를 겸비한데다 세상을 보는 식견에서 毛와 가까워 서로 사귀었으나 결혼까지는 어려워보였다. 이유인즉 두 사람은 출신이 워낙 차이가 나서 양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했었다. 그러다가 梁의 부친이 돌아간 다음 두 사람은 시험결혼 1년 만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들을 두 명 두었다.결혼 당시에는 毛가 梁만 못하였으나 둘은 서로를 성장시키며 행복하게 살았었다. 1927년 8월 모택동이 호남에서 일으킨 추수봉기가 실패했고, 호남 군벌 하건은 1930년 양개혜를 체포했다. '신문에 모택동과의 부부관계를 끊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면 바로 풀어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으나 양 씨는 이를 거부, 스물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총살당하고 만다. 모택동은 양개혜와의 결혼생활 당시 '문화서사'(무정부주의와 세계주의를 추구한 집단) 일원이었던 도사영과 불륜 관계를 가졌으나 여러 이유로 헤어졌다. 1937년 연안에서의 모택동과 하자진. 1937년 봄, 섬북에 도착한 후 모택동과 하자진 양계혜가 처형당하고 1930년에 재혼한 부인인 하자진(賀子珍)은 유격대 시절 어려움을 같이 했던 혁명투사다. 호남성 추수폭동이 실패로 끝나자 정강산에 들어가 전열을 가다듬을 무렵 젊은 강인한18세의 여고생을 만나서 사랑이 싹텄고 이어서 두번째부인이 되어 온갖 고초를 함께 하고 지략을 도모하게 된다.그후毛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그에게 이혼당하고 말았다. 1934년, 홍군이국민당군에게 쫓겨 대장정에 오르기 직전,하자진은 아직 어린 두 남매를 강서성의 농부에게 맡긴다. 험난한 피난길에 아이들을 동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 후 모택동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아이들을 찾아나설 수 있었지만 어디서도농부와 아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37년, 연안에서 하자정은 毛의 딸을 낳았지만毛가다른여인과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공산당 특별법정에남편을 고발하지만, 법정은 오히려 毛의 편을 들어 하자진모녀와毛와바람을 피운 통역을 연안에서 추방시키고 만다. 모택동과 강청의 다정한 시절의 모습 강청과 모택동
모택동과 장옥봉 모택동의 마지막 여인은 장옥봉(張玉鳳)이었다. 전용열차에서 일하다 그의 눈에 든 장옥봉은 말년 모택동의 눈과 귀 역할을 하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강청조차도 아부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이들 이외에도 소설가 정령, 미국 여성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 스메들리의 통역사 오광혜 등 수많은 염문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1950년대부터 임표에 의한 모택동의 우상화는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은 당연시되어 갔다. 옛부터 중국의 대부분의 영웅들은 여럿 부인을 거너린 것으로 나오는데 현대판 중국 세 영웅들도다분히 '영웅호색의 기질'이 이었는 곳으로 보인다. 다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위해 필요불가결한 선택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임에는 틀림없지 않을까. 아무리 그들이 남긴 업적이 크다고해도 말이다.중국의 근 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세 인물을 통해 당시 중국내 상류층의 문란한 사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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