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사랑한 여인,송경령(宋慶齡: 쑹칭링)
올 5월은 중국사람들에게 '중국을 사랑한 여인'으로 불리우며 존경받는송경령의 서거 30년이 된다. 최근 베이징시에 있는봄풍경이 가득한 송경령(宋慶齡, 1892년 1월 27일~1981년 5월 29일)옛집에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송경령을 회고하여 보았다.송경령은 누구인가? 송경령은 근대 중국의 유명한 '찰리 송(宋嘉樹 송가수)가문'의 둘째 딸이다. 대만 총통 장제스(蔣介石)의 부인이었던 동생 미령, 그리고 국민당 정권의 재정부장이며 갑부인 공상희(孔祥熙)의 부인이 된 언니 애령과 함께 급변하는 중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송경령은 혁명가 손문(孫文)의 아내로서 또한 혁명가로서의 치열한 삶을 살았다.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송씨 가문의 세 딸 중에서 송경령이 유독 중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았던 것은 유수한 집안에 태어나 유학까지한 인텔리였지만 자신의 생애를 낮은 곳의 인민들을 위한 헌신할 수 있었던 그의 애국심 때문이었다. 사후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국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아오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스차하이(什刹海)구역에 있는 송경령(宋慶齡)의 옛 저택.
베이징시 사이조(西城)구의 후해(後海)의 근처에, 전형적인 중국식 정원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송경령이 예전에 살던 곳이다. 복숭아의 꽃이 만개한 4월, 이 조용한 정원에는 화초가 무성하고, 맑게 갠 호수가 정원을 둘러싼다.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X22269;父)라 불리우는 손문 선생의 부인 송경령여사가 1963년부터 1981년까지 18년간 생활했던 곳으로 그녀의 친필X8226;사진 등의 문헌자료 및개인 소장품 등의 유물 2만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송경령은 1963년에 여기로 옮겨 온 뒤, 18년간 생활하고, 1981년7월29일에 돌아갔다.
송경령(宋慶X40802;:쑹칭링)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심산유곡에 들어온 것 같은 곳이바로 송경령(宋慶齡ㆍ1893~1981)고거(故居ㆍ꾸쥐)다. 고궁박물원 서쪽에는 남ㆍ중ㆍ북·ㆍ후해로 불리는 바다 같은 호수가 있는데, 송경령 고거는 후해(後海) 근처에 있다.1982년 국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명예주석(名譽主席) 송경령동지의 거주지(宋慶齡同志故居)’로 명명했다.국가에 헌신했던 송경령의 체취가 가득한 곳이다.주소는 北京市 西城X21306; 后海北沿46X21495;이다.
왼쪽 언니 송애령, 중앙 송경령, 오른쪽 동생 송미령
송가황조의 3자매
왼쪽부터 동생 송미령,언니 송애령,송경령
근대 중국에서 송(宋)씨 집안 세 자매는 너무도 유명하다. 특히 송경령(宋慶齡), 송미령(宋美齡) 자매는 각각 손문(孫文)과 장제스(蔣介石)의 아내로서 뿐 아니라 독자적 삶에 있어서도 20세기 '두 개의 중국'을 빛낸 가장 위대한 여성이었다. 송경령은 혁명가 손문(孫文)의 비서로 들어가 후에 그의 아내가 된 여인이었다.
세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송가황조'의 영화포스터
세자매의 이야기는 1997년 홍콩 여성 감독 장완정에 의해 영화로도 나왔다. 제목은 송가황조(宋家皇朝 : The Soong Sisters). ‘皇朝’로 불릴 만큼 권력을 지녔던 송씨 집안 이야기로 세 자매(송애령X8228;경령X8228;미령)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으로 점철된 혁명기 중국의 운명 등 중국 근현대사 전반을 이야기 한다. 1911년 손문(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총통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건너가기까지 중국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양자경, 장만옥, 오군매가 세 자매로 출연하였다.
송경령과 손문
송경령(宋慶齡)은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난징(南京)임시정부 대총통(大總統) 손문의 비서가 되었다. 1913년 제2혁명 실패 후 손문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914년 일본에서 손문과 결혼하였다. 대만과 중국 모두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孫文)도 두 번의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부인 노모정(盧慕貞)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면서도, 48세가 되는 1915년에 자신보다 26살이나 적은 송경령(宋慶齡)과 다시 결혼을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찰리 송은 손문과 친구 사이로 결혼을 반대했음에도 송경령은 뜻을 굽히지 않고 쑨원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손문이 죽은 후 국민당 좌파의 중심 인물이 되어 장제스와 대립하고, 그 후 중공에 가담하여 1951년부터 부녀 연합회 명예 회장, 1954년 중·소 협회장, 인민 대표 대회 상임 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이 되었다. 부인 평화 운동을 추진했으며, 1950년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52년 이후 소련·인도·미얀마·파키스탄·인도네시아 등에 친선 방문여행을 하였다. 저서로는《송경령선집[宋慶齡選集]》 등이 있다.
송경령의 긴 인생 속에서 손문과의 만남은 불과 10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10년이 그녀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나머지 삶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다. 평생을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아 조국 중국을 생각하며 살아간 송경령. 그녀는 손문과의 결혼 이후로는 언니 애령과 동생 미령과도 절연을 하여야 했다.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너무도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송경령 옛집의 아름다운 풍경
송경령이 키우던 시산쑹(西山松, 서산송), 분재석류(盆栽石榴), 룽옌푸타오(X40857;眼葡萄, 룡안포도) 등 중국 내에서 유명한 나무 및 꽃들과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비둘기들은 정원 내에 평안함을 더해준다. 내부는 ‘송경령 생애 전시전’과 ‘송경령 생활원형전시전’을 통해 그녀의 생활 및 작업환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송경령의 친필X8226;사진 등의 문헌자료 및 개인 소장품 등의 유물 2만여점을 전시하고 있다.매년 1월 27일은 송경령의 생일로, 5월 29일은 사망기념일로 이 날에는 그에 상응하는 기념활동을 하고 있다.4월에는 해당화가 피는 시기로 꽃들을 감상하기 위해 오는관광객들이 끊이지를 않는다.
송경령 옛집의 아름다운 풍경
이 곳에는 왕부 화원의 구조와 풍격이 그대로 살아 있으며, 유럽식 별장의 특색을 융합시켜 중국과 서양의 장점이 결합된 정원으로 유명하다. 정원 내부에는 백년 넘은 개아그배나무, 2백년된 석류말뚝, 5백년 된 펑황궈과이(鳳凰國槐, 봉황국괴) 등 유명한 고대 수목들이 있다.
송경령 옛집의 아름다운 풍경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그는 손문에게서 배우고 발전시킨 혁명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국가 명예주석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1993년 송경령의 전기를 쓴 이스라엘 엡스타인은전기의 주인공을 이렇게 평가한다. “송경령 자신은 교양과 교류 면에서는 국제적이었지만 그는 무엇보다는 중국의 혁명적 애국자였다. 강인한 심지, 원칙의 견지, 주의깊은 온화함, 높은 용기, 표면에 나서지 않는 겸손함, 두드러진 여성적 아름다움이 혼연일체가 돼 매우 보기드문 품격을 이루었다.
” 그것은 갑부 공상희의 부인이 된 언니 송애령의 삶과도 다른 것이었으며, 권력욕에 사로잡혀 독재자 장제스와 결혼한 동생 송미령의 삶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애드거 스노는 그를 “중국의 양심”이라고 했다.
이곳의 입장료는1인당 20위안, 학생 5위안이며 예약조건은 1주일 전에 예약신청을 해야 한다. 인원제한 :200명, 예약전화 : 010-64015256 이다. 개방시간은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오전 9시-오후 5시 30분, 11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1일까지는 오전 9시-오후 4시 30분 사이트: http://www.sql.org.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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