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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30. 23:59 역사와 유물

1918. 5. 2 ~ | 보유자 인정: 1980년 11월 17일

각읍 수령이 겁을 내여
탕건(宕巾)바람 보선발로 대숲으로 달아나며
"통인아 공사궤(公事櫃) 급창아 탕건 주워라."
대도집어 내던지고 병부 입으로 물고
힐근 실근 달아날 제
본관이 겁을 내어 골방으로 달아나며
통인의 목을 부여안고
"날 살려라 통인아 날 살려라"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대목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관모공예

탕건은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모자[冠]로, 성인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의관이다. 탕건과 같은 종류의 남성용 관모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모두 상투형 머리 모양[髮式]을 취한 다음 착용하였다. 탕건은 머리를 보호하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또한, 갓 대신 평상시에 쓰는 모자로 독립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원래 탕건은 갓 속에 겹쳐 쓰던 것인데 후에 평상용으로 바뀐 것이다.

탕건은 언제부터 비롯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탕건의 유래와 관련해서 최남선이 견해를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고유의 관모 세 종류 중 탕건은 감투[坎頭]나 복두의 발전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중 ‘감투’는 한자 ‘감두’라는 글자가 와전되었다고 보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사용 계층을 제한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보인다. 태종 16년(1416)에 관복 제도를 고치면서, 향리들이 평상시에 감투를 쓰고 평민이 쓰는 것은 금지하였다. 세종28년(1446)에는 감투를 비롯한 복색의 조건을 집현전이 의논하여, 3년 뒤인 세종 31년(1449)에 비로소 유품조사(流品朝士), 의관자제 등으로 제한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관직에 나간 벼슬아치로 계층을 제한하여 사용하던 감투는 머리를 감싸는 ‘머리동이’나 ‘두건’이라는 형식에서 복두나 사모의 영향을 받아서 형식적인 변모를 거쳤다. 감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상시에 거처할 때 착용하던 관모였는데, 중종 20년(1525)에는 조계상이라는 사람이 집에서 바둑을 둘 때 비단감투를 썼던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 밖에도 선비들이 썼던 다양한 관모에 대해서는 명종조 이제신이 [청강쇄어]에서 정자관, 주자관, 염계관, 동파관, 충정관, 방건 등의 관모를 열거하였다. 특히 이들 관모는 정자나 주자 및 소동파 등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이 즐겨 쓰던 모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자들은 실제로 조선에서 제작되고 유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관모 중에도 탕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탕건이라는 용어에 대한 용례는 1614년에 편찬된 [지봉유설]에서 정주의 탕건을 안주의 총감투나 통영의 총갓양태, 석성의 망건 등 여러 말총 공예품과 함께 팔도의 특산품으로 열거한 것이 최초이다. 이로 미루어 17세기경에는 이미 말총을 재료로 삼아서 총감투와 총갓, 망건과 탕건 등 여러 종류의 관모를 제작,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만들어지는 손끝공예

탕건장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 올 한 올 떠올려 만들어지는 탕건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애용하던 모자공예품이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공인들의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회통 ]에 의하면 서울 중앙의 공전(工典)의 조직에는 경공(京工)과 상의원(尙衣院)에 사모장(紗帽匠) 등이 있으나 탕건을 어느 곳에서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주도에서 탕건이 성행한 것은 어느 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 시작되어 한말에 이르러 가장 성행하였다. 제주도는 본래 육지보다 시국이 안정되고 조용한 곳이어서 차분한 관모공예가 성행하였다. 고려 때는 몽고인들이 침입하여 몽고의 방갓, 즉 돌하루방의 모자와 같은 것이 성행하였는데 그 후 차츰 갓, 망건, 탕건 등이 성행하게 되었다.

제주의 탕건은 홑탕건[疎宕]과 겹탕건[密宕]이 있으며 그밖에도 바둑탕건이 있다. 바둑탕건이란 이중사망(二重絲網), 삼중사망(三重絲網), 오중사망(五重絲網)의 기법으로 사각 무늬를 놓은 것이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한 변형이다. 말총이 풍부한 제주도는 말총공예의 본고장이었고, 탕건은 제주 여인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계 수단이었다. 가느다란 말총을 엮어 만든 탕건을 제작하는 탕건장은 타고난 집중력과 유연한 손놀림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 기술은 엄마에서 딸로 모녀간에 세습되었다.

모녀간에 세습되는 제주 탕건 기술

김공춘 선생은 1918년 5월 2일, 제주도 화북에서 아버지 김홍윤 선생과 어머니 박영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평범한 편이었다. 7살(1925년)에 아버지가 일본의 공장에 취직하여 부모님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선생은 할머니, 고모와 살면서 탕건 제작기술을 배웠다. 9살(1927년)이 되던 해에 일본에 가서 부모님과 상봉했으나,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주도로 다시 건너와 살았다.

제주도에서 탕건 짜는 기술은 주로 모녀간에 세습되는 작업이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여자 어린이가 10여세에 이르면 어머니의 무릎 앞에 앉아서 탕건 짜는 기술을 보고 익히면서, 15세쯤 되면 한 사람 몫을 스스로 해내게 된다. 선생도 다른 제주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에게 탕건을 배웠고 대대로 탕건을 짜던 가정으로,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탕건을 잘 짰다. 선생이 예닐곱 살 되던 해에 열 살 위인 고모 김수윤 선생으로부터 탕건 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본에서 돌아온 13~14세 무렵부터는 내다 팔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이 어렸을 당시 화북에서는 해녀를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일반가정에서도 특별히 다른 부업이 없으면, 해녀로서 물질을 하러 나가는 대신 온 동네의 아낙네들이 모여 탕건과 양태 및 총모자 등 말총 공예품을 부업으로 삼았다.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탕건 작업은 제집 방안에 작업하던 탕건도구를 두고 밭일이나 바깥일을 보다가 여유 있을 때마다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북동에서는 대개 2~3명 혹은 6~7명의 또래들이 혼자 사는 동리의 여인 집에 모여 제작했다. 모여서 일하던 곳을 ‘일청’ 혹은 ‘탕근청(탕건청)’이라 불렀다. 선생도 탕건청에 가서 작업했는데, 탕건청은 대개 동네에서 혼자 사는 과부의 집이었다고 한다. 탕건청에 모이는 동네 처녀들은 비슷한 나이로 10~20명이 모여서 초저녁부터 11시경까지 작업하고 새벽에 일어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밭일을 하러 나왔다. 동리의 탕건청에서는 또래들끼리 따로 모여 탕건을 만드는 풍습도 있었다. 탕건청에서 탕건을 만들 당시의 김공춘 선생은 젊은 나이에 눈도 밝았기 때문에 엉성한 탕건은 3일에 한 개 정도를 짰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이 걸려 완성시킨 탕건이 5개나 10개가 되면, 관덕정이나 화북 주변에 있는 삼양, 조천, 서안 등지에서 5일장이 서는 날 새벽에 내다 팔았다. 1970년대 들어서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제주시 화북과 삼양동 일대에 새마을공장이 세워졌다. 이 공장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탕건 제작기능을 지닌 화북동 인근의 수백 명의 여성이 취직하여 관광기념품을 제작했다. 당시는 이미 전통 관모가 소비되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탕건을 비롯한 총모자, 망건 등 말총공예의 여러 기법을 응용하여 여성용 모자, 브로치 등을 개발했다. 1975년 10월 9일에 있었던 제3회 육영수여사배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는 선생은 당시에도 솜씨 좋은 축에 들었다. 1980년에 기능보유자가 된 뒤 매년 전승공예대전 및 기능보유자 작품전에 탕건이나 정자관 등을 빠짐없이 출품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9년 2월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딸인 김혜정 선생이 2009년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대를 이어 탕건 제작기술의 맥을 잇고 있다.

주요 작품

바둑탕건, 김공춘, 21x16cm

바둑탕건
바둑무늬의 탕건으로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접탕건, 김공춘, 21x16cm

접탕건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제작도구와 작업과정

탕건은 줄수와 도리수의 촘촘한 정도에 따라 막줄탕건, 상탕건, 중탕건 및 하탕건으로 구분된다. 제작도구에는 탕건골, 알통골, 쳇때기, 마흐레, 털망, 총사발, 탕건바농, 연발, 박죽, 미명실, 뜸, 장낭과 장낭실, 중등띠, 총칼, 먹솔과 먹사지, 정술, 재골, 재골용 장낭, 골무, 차롱 등이 쓰인다.

제작도구

탕건골: 탕건의 형태로 짜내거나 정자관의 이마 부분을 짜기 위해 사용하는 나무

마흐레: 쳇때기 위에 얹어서 탕건골이 안정적으로 놓여 탕건을 잘 결을 수 있도록 완충작용을 하던 것

쳇때기: 탕건골을 올려놓고 탕건을 결어 가는 일종의 작업대이자 작업도구를 넣어 두는 수납장치

연발: 탕건골의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탕건 작업을 쉽게 도와주는 보조도구

미명실, 뜸, 장난과 장낭실, 중등띠, 총칼, 먹솔과 먹사지, 정술, 재골, 재골용 장낭, 골무, 차롱 등이 쓰인다.

정자관 제작모습

정자관은 첫관, 중간관, 막관을 따로 제작한 후 줄머리, 관꼭대기를 연결하여 만든다.

정자관의 막관을 제작하는 모습

약력
1918
제주도 화북 출생
1975
제3회 육영수여사배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입상
1980
제5회 전승공예전 입선
1980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1981-1992
제6회 전승공예전(한국민속박물관)~제12회 전승공예전 출품
1982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행사 감사패
1985 / 2000
중요무형문화재 기록영화 제작
2009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명예보유자 인정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일 201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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