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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21. 15:23 Bluewave사랑방

조선의 왕족 출신 일연큰스님(日延上人)

탄생사(誕生寺)의 18대 주지였던 일연큰스님(日延上人)이 조선의 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보다 상세한 내용을 소개한다. 이하의 글은원광대 한국문화학과 양은용 교수가원대신문(2005년 4월)에 쓴 기사인'日延上人은 조선 宣祖의 장손인가(상,중,하)'를 중심으로 요약정리및 추가하였음을 밝힌다.

일연큰스님(日延上人)은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臨海君, 1572-1609)의 아들, 즉 선조의 장손으로 파악된다. 임해군은 광해군과 함께 공빈 김씨(김희철의 딸)의 소생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왕실에서는 서둘러 세자를 책봉하게 되었는데, 의빈왕후 박씨(1555-1600)를 통한 적자가 없었으므로 장자인 그가 장자상속의 원칙에 따라 왕위계승의 우선순위였으나, 인성이 사납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아우인 광해군(1575-1623)에게 세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임진년에는 임해군이 21세가 되는데, 광해군의 장자인 폐세자 질이 13세에 결혼한 것처럼 조혼이 관습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결혼하여 자녀를 둔 것이 아닐까? 왕과 신하들이 백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 왕도를 버리고 피난길에 오를 때, 그는 근왕병을 모집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함경도로 떠난다. 물론 왕자인 순화군을 비롯하여 김귀영(金貴榮), 윤탁연(尹卓然) 등의 무리를 이끈 대규모 집단이었다. 피난길을 겸하고 있어서 이들 일행에는 가족들이 함께 했으며, 임해군도 부인과 6살난 딸, 그리고 4살난 상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행이 회령에 이르렀을 때 국경인(鞠景人) 등의 모반자들에게 체포되어, 그해 7월 23일, 그곳까지 밀고 들어온 왜군대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겨진다. 포로의 몸으로 고원에 유폐되었다가, 이듬해(1593) 2월 4일, 나베시마(鍋島直茂)에게 맡겨진 다음 일본군과 함께 남하를 시작하여 4월에 부산에 이른다. 이 사이에 강화교섭이 빈번하게 열렸고, 드디어 6월 2일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방면되어 조선군에 인계된다. 일본측은 임해군의 아들이 왕자이므로 일본에서는 이를 인질로 삼았고, 조선왕실에서는 세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묵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결국 임해군의 어린두남매는 끝내 인질로 일본으로 끌려가고 만다.

일본의 침략이라던가 운이 좋았더라면 선조에서 임해군, 그 다음 대응으로 이어지는 혈통은 장자상속법에 의하여 왕위가 보장되었텐데 이로 말미암아새로운 인생을맞게된다. 일연큰스님(日延上人)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5살인 1593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과 일본의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광해군을 왕세자로 정한 조선왕조에서는 그의 송환노력을 기우리지 않는다. 그 사이에 도요토미(豊臣秀吉, 1536-1598)가 죽고 전쟁도 끝났지만 일본 국내는 도쿠가와(德川家康, 1542-1616)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가운데 전시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이 들어가던 일연큰스님은 드디어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수도승의 길을 걷게 된다. 출가위승(出家爲僧)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은 13세된 1601년의 일이다.


후쿠오카의 법성사(修昌山 法性寺)에서 득도하였으므로, 당시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일연큰스님을 데려간 왜장 가토(加藤淸正)는 철저한 법화종 신자로, 그의 세력권인 규슈지방에는 특히 법화종 세력이 강하며 이후 일연큰스님의 절대적인 후원자가 된다. 왕손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의식했을 것이며, 출가 후 일연큰스님이 수도와 학문에 전념하여 고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가토가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일연큰스님의 누이가 후쿠오카 번주(藩主) 구로다(黑田忠之)의 막하인물인 도가와(戶川)가로 시집간 것을 보면 이곳은 일연큰스님의 제2의 고향이 되어 있었다.


16세된 1604년, 일연큰스님은 수도인 교토(京都)에 입성한다. 그곳의 본국사(本國寺)에 마련된 구법단림(求法檀林)에 수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 해인 1603년에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가 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현재의 도쿄(東京)에 에도(江戶)막부를 개설하고, 이 해에 양국의 선린강화가 이루어졌으니, 드디어 난세가 끝난 상황이다. 1604년 조선은 유정을 전쟁포로 송환의 임무를 부여하여 강화사란 비공식특사를 파견하게 된다. 당시 수많은 포로가 귀환했으므로 조선왕실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했더라면 그도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이미 불문에 귀의하여 잊혀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일연큰스님은 구법단림에서 3년간 불교교리의 기초를 닦는다. "법화경"을 비롯하여 교학연구나 수행에 있어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이어서 19세된 1607년부터 고급과정인 지바(千葉)현의 반고사(飯高寺)에 위치한 반고단림으로 진학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수년간의 고급과정은 젊은 일연큰스님을 법화종의 인물로 성장시키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선조가 붕어(1608)하고, 그의 숙부인 광해군이 등극하며, 부친인 임해군이 의문의 죽음(1609)을 맞이한다. 35세의 나이였다. 장자상속을 전제로 하는 왕위계승 관행과 관련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이이첨 등의 대북파가 작용하여 강화로 유배시킨 다음 몰래 살해한 것이다. 강화현감 이직(李稷)이 죽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권력을 손에 쥔 그들이었기에 마침내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말았다.


이러한 임해군에게는 후사가 없어서 선조의 정빈 홍씨에게서 난 경창군의 아들 양녕군을 양자로 잇는다. 일연큰스님에게 있어서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일본 법화종에서 발군의 실력자로 인정받은 일연큰스님은 가간원(可觀院)이라는 당호와 함께 상인(上人: 큰스님) 칭호를 받는다. 학덕을 겸한 최고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 뒤 대단한 교화력으로 교계(敎界)를 주목시킨 그에게 법화종 최고의 도량인 지바(千葉)현 고미나토(小溱) 탄생사의 주지임사가 맡겨진 것이다. 26세된 1614년의 일이다. 탄생사(誕生寺)란 법화종의 종조인 일련성인(日蓮聖人, 1222-1282)의 탄생지에 건립된 사찰로, 상인은 종조로부터 18세 법주를 계승하고 있다. 이곳에 조사당을 건립하는 등의 불사(佛事)를 행하는데, 당시에 후쿠오카에 용잠사(龍潛寺)를 창건하고 있으므로 누이가 살고 있던 그곳을 왕래했던 모양이다.


법화종에서는 「남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제목(題目)을 외운다. 염불(念佛)이 아니라 염경(念經)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사는 중생이 구제받는 길은 『묘법연화경』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고, 그 무궁무진한 진리는 오히려 경전의 제목을 외어 의지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가르친다. 종조 일련성인은 「제목」을 중앙에 내려적고 사면에 사천왕을 배열하는 등의 만다라(蔓茶羅) 족자를 본존(本尊)으로 제작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상인의 존호를 받은 고승들은 각각 본존만다라를 제작하고 있는데, 탄생사에는 일연큰스님의 작품이 현존하므로 18세 법주당대의 것으로 보인다.

일연큰스님(日延上人)이 볼모로 잡혀 고국 조선땅을 떠나 일본에서 삶을 시작한지 38년째 되던 1630년, 법화종단이 일본의 통치권자인 에도막부의 공양(供養) 즉 시혜(施惠)를 받을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 연루되어, 일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신지대론(身池對論)이라는 신앙논쟁이다. 동서와 고금을 불문하고 어느 국가에서나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종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마련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우선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법화종은 일련성인(日蓮聖人) 당대부터 절대신앙을 강조하므로써 배타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법화경』만이 석가의 진실한 가르침이며 중생이 구제받기 위해서는 이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에서 불교계의 다른 종파까지도 불신(不信) 또는 미신(未信)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불신자, 미신자로부터는 비록 국주(國主)라 하더라도 시주공양을 받지도 베풀지도 말라는 불수불시(不受不施)를 전통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인 1595년에 교토의 동산 방광사에 대불(大佛)을 건립하고 1천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었을 때 법화종에도 참석하도록 명한다. 이에 종단은 신앙전통을 고수하며 불참하는 불수불시파(교토妙覺寺 日奧등)와 신앙전통에 국주를 제외해야 한다며 참여한 수불시파(受不施派, 교토本滿寺 日重 등)로 양분을 가져온다. 원칙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이다. 불교 종단의 논쟁이 점차 가열되어 1630년 2월 21일, 막부에서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수불시파와 수불시파의 대표자 6명씩이 나와 대론을 전개하였고, 불수불시파의 명백한 승리로 종결되는 듯하였다. 불수불시의 이케가미측은 그러한 재판결과를 청하였으나, 막부는 법리론(法理論)이 아니라 전대 막부가 불수불시를 금했던 바를 상기시키는 정치론으로 미노베측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이케가미측에 대해서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불수불시를 주장했던 이케가미측의 대표인 닛쥬를 비롯하여 6명이 모두 추방령을 받고 전국의 외딴 곳으로 유배됐다. 불수불시파의 근본사원이 모두 몰수되어 수불시파에게 돌아갔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들이 같은 주장을 폈던 과거 유배자 니치오쿠에게도 사후의 형벌이 부가되고, 그 제자들까지도 절을 몰수하고 추방시킨다. 그런데 대표자 6명 중에는 니치엔상인이 주석하던 탄생사의 16세 법주 일령(日領, 1572-1663)가 들어있어 유배를 당한다.


일연큰스님은 대론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노베측은 정교(政敎)유착을 경계하여 불수불시를 주장했던 이케가미측의 근본도량 탄생사를 접수하고, 막부에 상인을 유배시키도록 작용한다. 물론 막부에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았으나, 교화의 장을 강탈당한 상인은 결국 유배를 자청한다. 그리고 이세(伊勢)를 거쳐 후쿠오카에 이른다. 오랜만에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출가지에 돌아온 것이다.


유배 당시인 1631년, 일연큰스님은 이미 43세의 불혹을 넘긴 원숙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유배라는 형식의 귀향이었지만 법화종의 근본정신에 충일했던 그를 죄인으로 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법화종의 근본사찰인 탄생사 법주(法主)인 그는 많은 수행자들이 흠모하는 복전(福田)이었다.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표적인 선지식(善知識)을 모시게 된 다행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연큰스님은 주민들의 열열한 환영과 귀의를 한 몸에 받게 된다. 1632년에는 그에게 귀의한 번주(藩主) 구로다(黑田忠之)가 넓은 폐사지에 향정사를 창건하여 바친다. 그로부터 72세인 1660년까지 30년에 가까운 기간이 그에게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이미 명예와 권위, 논리와 대립 등 모든 차별의 세계를 넘어서서 마음속에 거리낌이 없는 이른바 무상(無相)의 경지를 맛보는 그였다.


지금 향정사 정원에는 「상인다리(上人橋)」는 표석이 서있다. 도로확장으로 다리가 묻히게 되자 옮겨온 것인데, 일연큰스님이 어느날 번주와 바둑을 두기 위해 성(城)으로 향했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개울을 건너지 못하자, 번주가 장정들을 동원하여 다리를 놓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한 여유로움 속에서도 골수에 새겨진 것이 고국산천이라, 일연큰스님은 번성한 교화터전 향정사(香正寺)를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고향 쪽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암자 묘안사를 지어 5년을 살다가 입적하였다.」일본 에도(江戶)막부 초기인 17세기에 활동했던 법화종(현재의 日蓮宗)의 일연큰스님(日延, 可觀院, 1589-1665)의 최후 모습이다.입적한 사원 묘안사에는 유려한 『법화경』 사경작품을 비롯하여 숨결을 느끼게 하는 여러가지 유품이 전한다. 자신이 제작하여 받들어온 본존은 「꾀꼬리만다라」라 불린다. 「월조(越鳥)도 남쪽가지 골라 앉아 운다」고 하였던가, 만다라에 그려진 나뭇가지에 앉은 꾀꼬리 한 마리는 상인에게 고향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 아니었을까?

상인의 누이 소식은 알 수 없으나, 목조의 존안상(尊顔像)을 누이가 출가한 집안의 도가와(戶川俊勝, 1646~1712)가 조각한 것을 보면, 부덕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 차례 화재로 얼굴만 남은 상인의 존안상은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양은용 교수의 발원에 의해, 조선왕조의 개기지(開基地)인 전주 모악산금산사(平常주지)의 후원을 받아 2002년 11월 합장입상(合掌立像)으로 다시 태어났다.

日延스님 존안상


日延스님 존안상 봉안식


일본의 혼(얼굴)에 한국의 몸(신상)을 합체한 형태이다. 존안을 모시고 방한했던 묘안사 주지(門田正英) 일행은 종묘-선조왕릉-임해군묘-전주경기전을 거쳐 금산사에서 개안법요를 수(修)하고, 합체된 상을 일본으로 다시 안치하였다. 입상은 어두운 시대를 살다간 왕손의 고향을 향한 눈길이 오늘 평화세계를 향한 염원으로 거듭 태어난 형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400년이 되도록 상인의 부도(묘)를 광택이 나도록 쓰다듬어 온 묘안사의 정경은 새로운 시대의 한일관계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바가 있다.


현재의 도쿄시내 시나가와(品川)지역에는 상인이 창건한 두 사찰이 현존한다. 각림사(最正山 覺林寺)와 원진사(圓眞寺)가 그것이다. 수백미터 떨어져 있는 이들 사찰은 암자격인 원진사에 비하여 각림사는 규모가 크다. 특히 「세이쇼코(淸正公) 신앙처」로 자리잡고 있는데, 일연큰스님을 후원했던 가토가 죽은 후 제사를 지내며 명복을 빌었던 전통이 오늘날까지 계승되는 현상이다.

일연(日延) 큰스님 행장[자료 출처: 법보신문]
1589-1세: 조선왕실에서 임해군 아들로 출생
1592-4세: 4월. 임진왜란 발발, 함경도로 떠남.
1592-4세: 9월. 회령에서 붙잡혀 가또에게 넘겨져 일본으로 이송.
1593-5세: 7월. 부친 임해군 귀환.
1601-13세: 후쿠오카 법성사에서 출가.
1604-16세: 교토 본국사 구법단림 수학.
1607-19세: 치바 반고단림에서 수학[가관원, 일연상인 호를 받음]
1608-20세: 광해군 지지세력 주청으로 부친 임해군 진도로 유배.
1609-21세: 임해군 살해당함.
1614-26세: 치바 탄생사 18세 계승, 조사당 건립. 후쿠오카 용잠사 건립.
1630-42세: 신지대론에 불참.
1631-43세: 동경 각림사·원진사 건립. 신지대론 문제로 추방된 후 후쿠오카로 귀환.
1632-44세: 번주 쿠로다 귀의로 법성사 창건.
1660-72세: 쿠로다의 후원으로 묘안사 창건.
1665-77세: 1월 26일. 묘안사(妙安寺)에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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