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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4. 12:49 Bluewave사랑방

사립명진학교의 비경(悲境)


사상구의 문화유적을 소개할 때 들어가는 것이 '명진학교석주'로서 사상구 덕포1동 사상초등학교 교정에 그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사립명진학교"라고 쓴 글자만 소개되었을 따름이다. 누구도 이 기념비가 세워진 내력에 대해서는아는 사람이 없었다. 삼일절날 학교앞을 지나다가 인조잔뒤로 바뀐 운동장을 보고학교를 둘러보게되었다. 그러던중 우연히 "명진학교석주기념비" 뒷면을 보니 글자가 보였다. "明進學校의悲境" 이란제목의 1919년 8월16일자 매일신보 기사가 2단으로 새겨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오른쪽 옆면에는 이 기념비를 기증한 명진학교 초대교장의 4아들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글자를 한자씩 기록하면서

100년전에 있었던 학교의 운명을 내다 볼수 없었던 재정이 빈약할데로 빈약해진 사립명진학교의마지막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明進學校의悲境"이란 제목의기념비에 새겨진 글을 원문 그대로 아래와 같이 싣는다.오즉 답답하길래 비경이라 하였을까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하자.기사는 주로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조블가족님들께 읽기 편하기 위해절반은 한글을 괄호로 표시하였음을 밝힌다.

明進學校(명진학교)의悲境(비경)

東萊郡 沙上面(명진학교)는 距今(거금)십수년전에其(기)地方有力諸氏(지방유력제씨)의自覺과 熱誠으로 因하야 設立한바인되 以來로 東萊郡內(동래군내) 敎育界(교육계)의 明星으로 其名(기명)이赫赫(혁혁)하고 其功(기공)燦爛(찬란)하얏다. 設立者當時 面長 趙宇植(조우식)池楊潤(지양윤)兩氏(양씨)는 心血을 傾盡(경진)하야 該校(해교)의 繁榮(번영)을 力圖(력도)하야오던바 趙氏(조씨)는 세월이經過한을따라 (사계)의 熱心이 漸減(점감)되고 今에 實業界에 종사한다하며 池씨는 今日까지 繼續盡力(계속진력)인바 到今하야는經費가 ?(군?)하야 經營에 困難이 莫甚(막심)하며 校長 姜大成씨는 學校에서 5里나 되는 自宅에서 매일 不願하고출석하며 교사 손흥교(孫興敎)씨는 東明中學의 출신으로 당년 二十四五세의 靑年이것만은 校長과 같이 每日 熱心으로 四級을 호올로 맛하가지고 複式敎授(복식교수)에 熱中하되 一分 報酬(보수)도없다한다. 차(此)양씨(兩氏)의 열성에 감복하야 今春에 道當局에서 一金백원을 該校(해교)에 기부하얏으나 여전히 經費로因한 아모도 該校를 爲하야 同情하는者가 업다하니 이學校의 將來運命이 如何히될지 오직 地方人士의 奮起(분기)를 切望하며 面長徐氏의 奮勵(분려)를 曞望(여망)한다더라(東萊)

正八年八월十六日每日申報(1919년8월16일매일신보)

비문을 읽어보면서 안타까움이 절로 일어났다. 지금부터100년전에 이 지역의 학교가 얼마나 재정난에 빠져 어려웠던가를 당시 매일신보기자가쓴 기사에서 알 수 있다. 학교를 설립한 십년만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상구 덕포동에 있는사상초등학교의 전신은1909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사립명진학교이다. 그 당시 사상지역은 동래군 소속의 面단위로 인근의 낙동강의 물목로 널리 알려진구포지역과는감히 비교가 안될정도였다. 단순하게 당시 가구수를 기준으로 하면 1/10 수준이라고 할 정도이며주민들은 낙동강에서 조개를 잡고 유두강을 중심으로 논밭농사가 고작인 한촌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1907년 구포에서 사립구명학교가 설립되고 2년 후에

이곳에도 사립명진학교가 사상역 근처에 들어섰다. 구포지역은 오래전 부터 공창이 들어서있어 구포나루를 통한 거래가 왕성하였고 그뒤 낙동장교와 구포역을통한 물자수송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지역이다. 특히 이곳에서 설립된 구포은행은 전국최초의 지방은행이었던점을 미루어볼 때 짐작이간다. 비록 어려운 환경속에서도사상면의 전현직 면장출신의 지역리더와 지역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이후 구국교육의 필요성을 깨닫하고의욕적으로사립학교를 설립운영하였던것이다.

그러나 학교 운영은기념비문에 새겨진 내용처럼 얼마나 어려웠던 지를 말해주고 있다. 학교설립초기에는 의욕이 넘쳤으나 차츰 일본의 수탈이 확대되면서본연의 경제활동마져 위태로워짐에 따라 학교지원이 줄어 들었을 것이다. 학교설립후 10년 후인 1919년경 매일신보의 기자 눈에 비친 학교운영은 한마디로 참담하였으리라 짐작된다.교장과 교사가 4학급을 맡아 한 교실에서 일찌기 복식수업을 하였다. 교장선생은 5리길을 매일 걸어다녔으며 한 명인 교사는 월급 한푼 받지 않고 열심히 가르치는 것에 감복하여경상남도 당국에서 거금 백원을 기부하였을 정도 열성을 기울였다.하지만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웠던지를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학교 운영의 어려움을 매일신보 기자는학교의 장래를 걱정하며 지역민들의 분발을 촉구했다.오죽 딱히 보였으면 기사의 제목을 '명진학교의 悲境'이라고 했을까. 이렇게 어렵게 운영되던 명진학교는 1920년 4월 일제의 학제개편에따라 "사상공립보통학교"로 바뀌면서 11년간 지역 어린이들을 가르치다 끝내 막을 내리게 된다.

끝으로 명진학교 출신으로 삼일운동 때 서울에서 학생대표로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년간 복역한 애국지사 김형기선생에 대하여 삼일절을 맞이하여 추모의 마음을 드린다. 아울러 한자를 찾는데 바쁘신데도 시간을 할애해 주신 대구의 올뫼장광덕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현재의 사상초등학교

지난 겨울방학기간 중 모레운동장에서 인공잔디운동장으로 바뀌었다.

교정 왼편에 세워져있는 사립명진학교 기념비


사립명진학교석주 기념비


사립명진학교 석주

이 석주에는 "私"자는 깨여져 없고 "立明進學校"5글자만 보인다.

우리학교 역사

명진학교석주가 교정 구석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세웠음(1986년8월28일)을

당시 오두용 교장의 이름으로 새겨져있다.

그동안 학장, 모라, 감전 등 6개교가 분리되었으며 한 때 100학급(1979년)

6,000여명의 학생이 다녔던 기록도 있다고 한다.



"명진학교의 비경"이 기록된 기념비

사립명진학교석주 뒷면에는 19019년 8월16일

안까까웠던 학교 사정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를 기록해 놓았다.

석주기념비의 왼쪽

기념비를 기증한 사람의 이름

초대교장을 지낸 강대성의 아드님4분(鎬潤, 鎬德,鎬龍,鎬甲)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이 중 鎬德은 동창친구의 부친이고, 鎬甲은 중학교때 지리선생님이시다.


석주기념비 뒤에서 바라본 모습

[참고]

거금距今 : 지금으로부터 지나간 어느 때
其功(기공) : 그 공로
해교(該校) : 그 학교

사계(斯界) :어떠한 일에 관계되는 그 사회

점감(漸減) : 점차줄어듦

도금(到今) : 오늘에 이르르

분려(奮勵) : 마음과 기운을 가다듬어 힘씀

? (窘 ?) : 군색할 窘이며 다음 한자는 흐릿하여읽을 수가 없으나 앞뒤 문맥으로

보아 '매우 부족한 상태'를 믜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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