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도 설득력을 갖는 반지의 신화 원래 ‘반지’란 긍정적인 상징물이죠. 사랑, 우정, 신의, 소중한 약속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반지는 저주의 반지여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과 배신과 살인을 이끌어 냅니다. 반지를 소유하는 사람은 세계를 다스릴 수 있지만,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기 때문이죠. 강력한 기술 발전과 산업화의 힘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 따위를 아득히 밀어내 버린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것이 이 반지입니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가 현대에도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브륀힐데가 신격을 박탈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발퀴레들은 보탄과 대지의 여신 에르다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인간이 아닌 신이죠. 하지만 보탄의 명을 거역한 벌로 브륀힐데는 신성을 빼앗겼고,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지크프리트와 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발퀴레가 아닌 브륀힐데는 고귀한 도덕성을 포기하고 평범한 세상 여인들처럼 연인의 배신을 맹비난할 뿐 아니라, 자기를 버린 남자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결국 그를 하겐의 손에 죽게 만들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한 신의 보호를 벗어난 인간의 자율성을 보여줍니다. 신화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고, 세상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변화해갑니다. 지크프리트 역시 보탄의 피를 이어받은 신의 손자인데도, 하찮은 사랑의 묘약 때문에 굳건한 맹세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그런 실수를 만회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릅니다. 하겐 역시 악인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신들을 저주하며 인간의 자율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고 용기 있는 주인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바그너는 결말에 가서 불을 정화의 수단으로 삼아, 자유를 획득한 인간이 이런 오류를 통해 파멸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은 불로 정화되어 새롭게 태어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합니다. [니벨룽의 반지] 전 편을 감상하기 위한 17시간이 너무 길다고 화를 낼 수는 없겠죠? 작곡가가 27년 동안 구상하고 손질한 작품이니까요.
추천 음반 및 영상물 (지크프리트-브륀힐데-군터-구트루네-하겐 순) [음반] 볼프강 빈트가센, 비르기트 닐슨,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클레어 왓슨, 고틀로프 프리크 등, 게오르그 숄티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국립오페라 합창단, 1964년 녹음. Decca
[음반] 헬게 브릴리오트, 헬가 데르네쉬, 토머스 스튜어트, 군둘라 야노비츠, 칼 리더부쉬 등,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0년 녹음. DG [DVD] 만프레트 융, 기네스 존스, 프란츠 마추라, 지닌 알트마이어, 프리츠 휘프너 등, 피에르 불레즈 지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파트리스 셰로 연출, 1980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DG [DVD] 알베르트 보네마, 루아나 드볼, 헤르난 이투랄데, 에파 마리아 베스트브뢰크, 롤란트 브라흐트 등, 로타 자그로셰크 지휘, 슈투트가르트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페터 콘비츠니 연출, 2002년 슈투트가르트 국립오페라 실황. TD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