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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6. 19:53 Bluewave사랑방

무인으로 장군과 재상을 지낸 정열공 최윤덕 장상

정열공 최윤덕 장상의 초상

조선 세종때 명장으로 국방의 초석을 다진 인물인 창원 북면 출신 최윤덕 將相(장군+재상․1376~1445)은 역사적 위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잘 발굴하지 못해 그동안 역사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세종 때에는 최윤덕, 이천 , 김종서 등의 활약으로 4군과 6진이 설치되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최윤덕 장군에 관한 내용의 전부이다

조선 초기의 무장으로서 좌의정에까지 오른 최윤덕(1376∼1445) 장군은, 자는 여화, 호는 임곡, 시호는 정열공, 본관은 통천, 지중추부사 운해의 아들. 고려 우왕 (1376년)에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등촌에서 태어났으며, 1446년에 사망하였다.

최윤덕 장군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북면 내곡리 송촌마을 뒷산에 자리잡고 있다. 변경된 새주소로는 창원시 의창구 내곡리 1096 일대이다.

경남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 1096 일대

이 터는 주민들이 정승골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계단식 논과 과수원을 경작하고 있다. 그렇지만 집터의 축대로 추측하는 돌을 쌓은 흔적과 우물이었던 자리가 있고, 기와와 자기 조각들이 나오고 있어 장군의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다.그러는 와중에 언론에서 최윤덕 장군 생가지 오류 가능성 제기에 대하여 지난 3월22일통천 최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족보 을미보(1775년, 영조 51년∼)에 의하면, 부친인 양장공 최운해의 생가지를 '창원부 북 무릉산하 내곡'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문중에서 보관중인 고문서 중 '정렬공 유지'라는 제목의 조선시대 목판 인쇄본 고지도에도 '내곡리' 라는 지명 기록과 함께 3기의 생가지 터 건물자리 표기가 남아있으며, 국가 주요시설 앞에 세워 그 곳을 지나갈 때는 경의를 표하도록 세워진 하마비석의 기록도 남아있다. 이번 문중 기록 자료들을 통해 그동안 경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된 최윤덕 장군 생가지 위치 논란과 관련한 의문들이 풀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면 대산리 사리실 묘입구에 있는 최윤덕 장상신도비

졍열공 최윤덕 장상은 어떻게 살았는지 연혁을 알아보자. 14세때 활쏘기를 잘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학문은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9세 때인 조선조 태조 3년에 갑무과에 합격하였다. 21세 때 부친을 따라 영해의 반포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에 삼군도절제사로서 대마도에 출정하여 점령하고 천신산에서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받았다. 세종 15년 계축에 야인 이만주가 압록강의 지류인 퉁자강을 건너 침입하여 인민을 학살하므로 최 장상이 평안도도절제사로서 평안·황해 2도 군병 1만5천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야인을 격퇴하였다.

세종 15년 왕은 선위사 박신생을 군영에 보내어 여러 가지 물품을 하사하였다. 최 장상이 개선하는 날, 세종은 근정전에서 큰 연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술잔을 잡아 위로하였다. 세종 16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것은 무인에게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최 장상은 관직을 맡아서는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서 이름이 남았고 장수로 30년을 지내면서 그 위력이 변경에까지 알려졌다.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세종은 애도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제사 물품
을 하사하고 시호를 정열공(貞烈公)이라 하였다. 세종 조정에 배향되었고 평안도 안주 청천서원에 봉향되었으며 통천 풍계사(楓溪祠)에 봉향하였다

최윤덕장상 묘로 올라가는 계단


내가 이곳을 처음 방문한 것은 34년전 처가가 최윤덕 장군의 묘가 있는 북면 대산리 사리실이었기 때문이다. 사리실마을은 도둑이 없어 대문이 없이도 편안히 사는 마을로 유명하다.

그때 손아래 처남이 이곳에 유명한 장군묘가 있다면서 안내해준 곳이 바로 사리실 마을 안쪽에 위치한 최윤덕 장군의묘였다. 사리실 마을앞을 흐르는 개울가를 따라 집들이 있었고맨 마지막 집을 지나면 밭이 나온다. 그리고 밭과 산이 만나는 곳에서 신도비가 세워져있고 새로 만들어진 게단길을 따라 100여미터 올라가면 장군의 묘가 보인다.

지방기념물 제121호 최윤덕장군 묘

북면 대산리 사리실마을 뒷산에 위치한 최윤덕 장군의 묘는 봉분의 사면을 호석으로 치장한 조선 초기의 방형원분(方形圓墳)으로 묘 앞에는 상석(床石)과 2단의 계절(階節)이 있으며, 계절의 전방 좌. 우측에 문인석(文人石)이 배치되어 있다.봉분의 규모는 남북 576cm, 동서 465cm의 방형고분이다. 묘 하부 4면은 길이 약 1m 내외의 장대한 화강석으로 치석하여 2단으로 축석한후 윗면을 둥글게 붕토했다. <동국여지승람>에 '최윤덕 묘, 재부북 20리'라 하였다.

장군의 묘 뒤편에는 부인의 묘로 추정되는 같은 형태의 봉분이 하나 더 있다. 최윤덕 장군(1376~1445)은 세종때 대마도의 왜구를 소탕하고 평안. 황해의 여진족을 물리쳐 무인으로서 좌의정에까지 오른 창원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래서 창원지역에서는 행사때마다 장군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최윤덕 장상 동상

최윤덕 장상 동상은 기마상 형태로는 국내 최대인 길이 7.8m 높이 6.5m 규모이다. 좌대는 높이 6m 폭 4.3m의 화강석으로 벽면에는 취지문, 한반도 지도, 장상의 연보 등을 기록했다.
동상은 말을 타고 활 쏘는 늠름한 모습으로 야간에도 위상과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동상은 8억원의 예산을 들여 조선초기 복식과 부장품 전문가 11명, 조각전문가 4명 등이 참여해 제작됐다(2010년 11월12제막)

창원시 용지공원내 있는 최윤덕 장상 신도비

정열공은 최윤덕 장상은 창원지역에서 탄생한 역사적 인물로이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최윤덕 장상을 기리는정려각(旌閭閣)은 창원시 소답동(구 창원읍 동문 밖)에 있고, 정열공 최윤덕 장상 신도비를 1996. 5. 20 건립 창원시 용지공원에 있으며 장군의 기상을 발휘하는 기마상이 창원시청옆에 세워져있다. 한편 최윤덕 장상의 위패는 서울 종묘에, 사당은 전북 장수군과 전남 해남에, 영정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모셔져 있다.

지역출신의 인물로 아직까지 덜 알려진 최윤덕 장상에 관한 체계적인 인물 연구와 업적평가및 홍보가 있어야겠으며더불어지역에서 부터 먼저 향토사 학습과 인물사 학습에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초아님의 관련기사 http://blog.chosun.com/pts47/2721053

posted by bluewa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