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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5. 20:05 살며 사랑하며

남편 이름만 새겨진 현충탑서 통곡…

6·25때 세자녀와 혈혈단신 피난

전몰군경 미망인의 애틋한 사연

"남편이 어디 갔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속태우고 시신은 어떻게 했는지도 몰라 묘도 못 썼는데. 그때는 다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어."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전몰군경미망인회 회원인 김길려(82) 할머니는 전쟁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60여년 전을 이같이 비교적 담담하게 회상했다.

17세 때 이창성(1923년생ㆍ28~29세 사망 추정)씨와 결혼한 김 할머니는 현재 북한 지역인 강원도 금화군에 살았다. 군청에 다녔던 남편은 전쟁이 터지고 그해 9월 국군과 함께 월남했다. 당시 큰아들이 5세, 작은아들이 2세였고 뱃속에는 5개월 된 막내가 있었다. 김 할머니는 "자꾸 인민군이 찾아와 남편 어디 갔느냐며 의심하니 이러다 총살당할까 봐 이듬해 자식들을 데리고 남으로 피란했다"며 "민주주의 좋아한다고 군청에서 싫어하기는 했지만 국군에 자원한 줄은 몰랐다"고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가족들은 우여곡절 끝에 만났지만 남편의 소식을 모른 채 둘째아들은 피난민수용소에서 홍역을 앓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 할머니는 보육원에서 밥을 해주고 미군 군복을 줄여 아이들의 옷을 만들며 두 자녀를 키웠다.

종전 후 철원군으로 통합된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만들려고 군청을 찾았다가 서기로 있는 남편 친구를 만나 확인해보니 남편은 실종자 명단에 올라 있었고 이후 전사통지가 온 것을 확인했다. 조그만 양복점을 차려놓고 미군 군복과 교복ㆍ저고리를 고치며 밤낮없이 일을 해 큰아들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먼저 보내고 막내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던 1975년 김 할머니도 함께 서울로 왔다. 그제야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묘비 대신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현충탑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권대경기자 kwon@sed.co.kr
서울경제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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