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으로 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준비하는 중증근무력증 변혜정 씨 “아들…엄마 꼭 기억해줄거지?”
변혜정(41) 씨가 sbs 스타킹에 출연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래를 부른 건 두 아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병마와 싸워온 지난 8년을 돌이켜 보건데 웃을 일도, 추억할 만한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용기를 냈다. 무리한 노래 연습에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포기 할 수 없었다. 녹화당일 세트장 주변에 의료진과 각종 응급장치를 마련해 둔 뒤에야 그녀는 갈고닦은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폐가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노래 중간 중간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침을 애써 삼켜야 했지만 끝내 그녀의 애창곡 ‘깊은 밤을 날아서’를 다 불렀다. 그리고 두 아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숙연함이 감도는 감동의 무대 옆에서 출연진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텔레비전을 보던 시청자도 울었다. 그렇게 그녀의 모정은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엄마가 없을 때 이 책을 읽어보렴 분당의 한 대학병원에서 만난 변혜정(41) 씨는 침대에 누워 영양제를 맞고 있었다. 중증근무력증을 앓고 있어 근육이 약해진데다 뇌하수체선종과 천식 까지 겹쳐 제대로 약을 쓸 수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 세월이 벌써 8년째…. 착잡한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선 기자를 그녀는 참 반갑게 맞아줬다. “기침이 심해서 제대로 말을 못할까봐 미리 모르핀까지 맞아놨어요.(웃음) 아침은 드셨어요? 제가 아침에 애들 때문에 샌드위치를 좀 만들어 봤는데 이따 꼭 드셔보세요.”
구토증세 때문에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는 그녀는 아침마다 두 아들의 밥상을 차려낸다. 엄마의 음식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저희 집이 병원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 거리를 매일 3, 4번씩 다녀요. 그럴 거면 아예 입원을 하지 왜 번거롭게 통원을 하느냐고들 하는데 제가 병원에 누워있으면 우리 애들은 누가 챙겨요. 다만 한 시간이라도 애들하고 함께 있고 싶어요, 저한텐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녀는 유독 모성애가 깊은 어머니였다.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참 여러 번. 사경을 헤매던 그 순간에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단다. 그 구구절절한 마음으로 항상 ‘만일’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는 훗날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해줄 책 한권을 썼다. “엄마가 절실한 순간들이 있겠죠. 친구랑 싸워서 속상했을 때, 여드름이 났는데 어떻게 세수를 해야 할지 모를 때, 결혼해서 부인이랑 말다툼을 했을 때, 술 진탕 먹었는데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그럴 때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저에게도 엄마는 항상 필요한 존재였거든요. 그때 마다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위로해주려고 썼어요.” 그녀는 다음 달 책이 출간되면 전국에 있는 고아원마다 선물로 보내겠다고 했다. 지난겨울 부지런히 떠놨던 몇 개의 목도리와 함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시련 스쿼시와 수영을 즐기던 그녀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8년 전 기업체를 돌며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하던 때였다. 이유도 없이 쓰러져 팔, 다리에 깁스를 하는 일이 생겼지만 피곤해서 그러겠거니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때 하루에 한 두 시간 정도 잤어요. 강의 준비다 뭐다 참 바빴거든요. 그렇게 병을 키우다 1년 만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천식외에는 정확한 병명을 모르겠다는 거에요. 답답하게 속만 끓이다 큰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거의 혼수상태로 실려 간 병원에서 제가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의사한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겨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울거나 하진 않았는데, 애들이 병원 주변 탄천을 보고 바다라고 하는 바람에 엉엉 울었어요. 생각해보니 우리 재원이, 승원이가 여섯 살이 되도록 바다 한번을 못 데려갔더라고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제가 너무 고생을 했어요. 우리 애들만큼은 풍족하게 잘 키워주고 싶어서 악착같이 뛰어다녔죠. 전 그때까지 돈 많이 버는게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참 바보 같았죠.”
하루아침에 난치병 환자가 된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점차 힘겨워졌노라고 고백했다. 몸은 서서히 근력을 잃어갔고 달리기는커녕 서있기도 힘들었다.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게 되자 ‘차라리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됐으면 그냥 체념하고 살았을 걸’하는 모진 생각까지 들었다.
몸이 아픈 것도 문제였지만 병원비와 재활치료비 등은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집을 줄여갔고,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받아야했다. “우리 애들이 아프면 제 가슴이 찢어져요, 부모가 돼보니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제가 위독할 때마다 부랴부랴 뛰어오는 부모님 심정이 어떨까 생각해보면...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돌봐드리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부모니까 이해하겠지, 나중에 호강시켜드려야지 그런 이기적인 생각만 했어요.” 부모님 얘기에 왈칵 눈물부터 쏟았던 그녀는 자신이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건데 그녀는 참 열심히도 살았다. 어머님의 사업실패로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으나 마음을 다잡아 대학교에 들어갔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카피라이터를 거쳐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다. 그 바닥에서는 ‘꽤’ 잘나가는 작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호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혼자 소주 4병을 마시던 괄괄한 그녀를 9살 연상의 남편은 사랑했다. “솔직히 제 이상형은 아니었어요.(웃음) 그런데 사람이 참 자상하더라고요. 우리 집엔 딸만 넷이라 아들 노릇 해 줄 남자가 필요했는데 우리 애 아빠가 그래줄 것 같았어요.” 전공을 살려 고등학교 사회교사로 취직한 그녀는 시부모님까지 모셔가며 알뜰살뜰 가정을 꾸렸다. 그 틈에 두 아들이 자라났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들이었다.
“우리 가족의 꿈이 뭐였는지 아세요? 바닷가에 집 짓고 사는 거였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마흔 살 까지만 죽어라 돈 벌고 마흔 한 살부터 남편은 낚시하고, 저는 글 쓰며 봉사하고,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뛰어 놀 거라 생각했었죠. 제가 이렇게 되는 바람에 그 꿈을 져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남편은 일까지 그만두고 제 곁에 있으니 그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냐는 말에 그녀는 주저 없이 ‘스타킹 촬영 날’을 꼽았다. 출연을 결정하기 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촬영 하는 내내 정말 즐거웠다고 했다. “아이들한테 정말 좋은 선물이었어요. 학교에서 자랑할 거리도 생기고요.(웃음) 거기서 만난 조혜련 씨나 정시아 씨는 언니 동생처럼 지내요. 이런 말은 처음 하는 건데 조혜련 씨는 일주일 뒤 찾아와 격려도 해주고, 병원비를 보태주시기도 했어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트위터를 보고 많은 분들이 션 씨와 함께 만원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도와주신 적도 있었네요.”
방송이 나간 직후 변혜정 씨를 돕겠다는 이들이 하나 둘 마음을 보탰다. 그렇게 모인 치료비는 280만원 남짓, 오랜 투병생활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았던 그녀에겐 참으로 소중한 격려요 응원이었다. 은지원의 열혈 팬이기도 한 그녀는 녹화 당일 직접 은지원에게 노래를 선물받기도 했는데 나중에 은지원이 익명으로 그녀에게 후원금을 납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일부 언론의 보도처럼 거액의 후원금을 전달받은 것은 아니다. 조만간 전달할 계획으로 알려진 후원금에 대해서, 그 액수가 얼마인지조차 모르는 그녀를 두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수를 꽂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힘들면서 왜 반박인터뷰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가 답했다. “은지원 씨도 도와주고픈 마음으로 시작한 일인데, 제가 괜히 나섰다가 누를 끼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 인터뷰도 사실은 조심스러워요(웃음). 은지원 씨가 직접 제후원금을 팬클럽의 모금계좌에 입금하셨으니 도와주신 건 맞는 거죠. 저를 비난하는 분들보다 힘내라고 응원해 주는 분들이 더 많았어요. 정말 고마운 건 액수가 아니라 마음이니까 저는 행복해요. 미움이니 원망이니 하는 것들로 마음을 소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서로 표현하세요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웃고, 얘기하던 그녀가 갑자기 격한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기자일행에게 괜찮다며 손을 내젓던 그녀는 마치 다 알겠다는 듯 ‘생각처럼 그리 슬프거나 두렵지 않다’고 먼저 입을 열었다.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어요. 어떤 일이든 나한테 닥칠 수 있어요. 심지어 죽음까지요. 제게 문병 왔던 친구가 갑자기 뇌종양으로 먼저 떠나는 걸 보면서 세상이 참 아이러니 하다고 느꼈어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줄래요?” (고개를 끄덕끄덕) “요즘 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지인들에게 전화걸기에요. 병원에 다녀와서 약간의 짬이 날 때마다 목록에 적힌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죠. 그리고는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감사의 마음을 전해요. 고맙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통화가 끝나면 그 사람 이름에 줄을 긋는 거에요. 그렇게 다음사람, 또 그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해요. 생각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요. 표현방식이 좀 서툴면 어때요. 주위 사람들에게 늘 표현하세요. 못 다한 말이 사무치게 다가오지 않도록. 또 하나 작은 부탁은 들어주세요. 병원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참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많이 겪는데 사고로 아이를 잃은 아주머니가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운동화를 못 사준게 그렇게 한이 된다며 우시더라고요. 결국 그런거에요. 내가 해주고 싶은 것, 내가 나누고 싶은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죠. 살아 숨 쉬는 매 순간에 늘 사랑하고 또 감사하세요. 세월이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답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② 새 생명을 위한 10개월의 사투 석지은 씨의 기적 “사랑하는 남편 위해 아이를 꼭 선물하고 싶었어요”
석지은(30)씨의 병명은 만성골수성백혈병이다. 6년 전, 날벼락처럼 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녀는 지난 2월 출산에 성공했다. 죽음을 무릅쓴 10개월의 사투. 지금 그녀의 곁에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딸 윤서와 남편 재오(35)씨가 있다. 취재 김가영 기자 사진 박종혁
“태명이 복실이에요. 사랑이, 봄빛이 등 예쁜 이름 많잖아요. 어떤 걸로 지을까 신랑이랑 고민하고 있는데 친한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태명을 최대한 촌스럽게 지어야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난다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정한 게 복실이예요.”
윤서는 이제 4개월이다. 낯선 기자를 봐도 마냥 웃고 스스럼없이 안긴다. 울지도 않고 웃기만 하는 아기가 그야말로 천사 같다. 지은 씨가 치솟는 암 수치를 감내하며 낳은 아이다.
아무도 백혈병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6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취직을 했을 무렵. 친구들과 콘서트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종아리에 새까맣게 잡힌 피멍과 몽우리를 발견했다.
“양쪽 종아리가 각목으로 맞은 것처럼 새까맣게 멍이 들어 있었어요. 만져보니까 몽우리 같은 게 잡히고요. 이상해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벌에 쏘인 거래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멍이 안 없어지고, 한참 지나니까 옆구리까지 아파 다른 병원을 찾았어요. 혈액 검사를 했는데, 결과를 본 의사 선생님이 다음 날 혈액을 한 번 더 뽑자고 그러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확인할 게 있다고만 했고요. 다음 날 혈액검사를 마친 의사 선생님이 부모님을 뵙자고 했어요. 그리고 며칠 뒤 여의도성모병원에 입원했어요.”
부모님을 병원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그녀는 영문을 몰랐다.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눈 아버지는 그녀에게 퇴원하자고만 말했다. 한 번 치료했는데 왜 벌써 퇴원하느냐는 지은 씨의 말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며칠 뒤, 백혈병 치료로 유명하다는 서울의 한 병원을 찾았을 때 지은 씨는 담당 의사의 문 앞에 쓰인 글자를 보고 자신의 병을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설마 설마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제 혈액검사 수치를 보더니 빨리 응급실로 들어가래요. 갔는데 오는 선생님마다 옆구리를 자꾸 눌러보더라고요. 만성골수성백혈병의 특징 중 하나가 비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는 거거든요. 그래서 혈액 조절이 안 되는데, 제 옆구리가 그랬어요. 여기가 이만큼 부어 있었어요. 의사 선생님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만성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듣고 알았어요. ‘아, 내가 백혈병에 걸렸나 보다.’”
입원 전, 지은 씨는 디스크 수술을 핑계로 어린이집에 1주 휴가를 받았다. 디스크 수술은 곧 백혈병이 되었지만 그녀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만둔다는 말은 속으로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그러더라고요. 혈액 수치만 잡으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니까 상태를 두고 보자고요. 항암 치료한 지 9~10일째 되니까 암 수치가 안정권으로 떨어졌어요. 그래서 퇴원을 하고 한두 달 쉬다가 다시 어린이집으로 일하러 나갔죠. 반나절만 일하는 조건으로요.”
국내 성인 백혈병 환자 가운데 15%가 만성골수성백혈병을 앓는다. 매년 그 수가 늘고 있고 연구도 활발하다. 연구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생존율도 높은 편이다. 최근 기존 치료제인 글리벡의 100배 이상의 효과를 내는 슈퍼글리벡이 출시되기도 했다. 다행히 지은 씨는 만성골수성백혈병에서도 초기에 속한다. 약만 잘 먹으면 남들과 다를 게 거의 없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백혈병은 ‘TV에서나 보는 낫기 힘든 병’이다.
“이번 방송(MBC 휴먼다큐 사랑 ‘엄마라는 이름’에 그녀의 출산일기가 보도됐다)을 보고 제 병을 몰랐던 주변 친구들이 저한테 그래요. 미안하다고. 그럼 전 이렇게 말해요. 대체 네가 뭐가 미안하냐고. 그런 반응 때문에 제 병을 말하지 않게 돼요. 나를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3년 전 소개팅에서 만난 남편 어쩌다 한번 나가는 소개팅 자리는 지은 씨에게 그저 기분을 전환하는 시간이었다. 애프터가 들어와도 두세 번 만나면 스스로 거절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다 2008년 11월, 재오 씨를 만났다.
“아프고 나서는 남자를 아예 안 만났어요. 결혼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어쩌다 외로우면 소개팅을 해달라고 하거나, 부탁을 받아서 나가요. 근데 막상 나가면 제가 마음을 못 열어요. 스스로 선을 그어놓는 거죠. 남편과의 소개팅도 심심한 차에 밥이나 한 끼 얻어먹자는 심정으로 나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어요. 되게 편했고, 대화도 잘 통했어요. 말하길 좋아하는 제가 하는 말에 호응도 잘 해주고요.”
처음 만난 후 나흘 동안 계속 데이트하면서 재오 씨와 지은 씨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만난 지 백일쯤 됐을 무렵, 재오 씨가 먼저 결혼을 언급했다. 그때마다 지은 씨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친다는 심정으로 웃어 넘겼다. 그때마다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결혼 얘기 나오기 전부터 내가 이 사람한테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병을) 숨기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남편이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냐?’라고 물어올 때면 농담으로 받아치면서도 그 농담이 농담이 아니었어요. 고민 고민하다 결국 고백을 했는데, 이미 제 병을 알고 있더라고요. 소개팅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2009년 4월 형의 결혼식이 있던 날, 재오 씨는 가족이 있는 광주로 내려가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말씀드렸다. 참하고 예쁘지만 아프고 아이를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재오 씨의 아버지는 ‘네 인생이고, 네가 좋아서 한 선택이라면 난 괜찮다”며 격려해주었다. 지은 씨와 재오 씨는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임신 후 두 갈림길에서 “작년 5월에 이상하게 몸이 안 좋았어요. 다리에 염증이 생기고 불면증에도 시달렸어요. 평소 먹는 글리벡 외에 항생제, 소염제, 수면제까지 먹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생리를 안 하는 거예요. 임신 테스트기로 검사를 해봤는데 두 번째 테스트에서 ‘임신’했다는 표시가 나왔어요. 보자마자 그동안 먹었던 약을 전부 싸가지고 병원으로 갔어요. 임신인 줄 모르고 이 약을 한 달 내내 먹었는데 아이는 괜찮겠냐고 물어봤어요.”
담당 의사는 낙태를 권유했다. 그녀가 한 달 동안 먹은 약은 아이가 기형아로 태어날 가능성을 일반인의 100배 이상으로 높였다. 임산부가 먹으면 안 되는 가장 치명적인 약에 글리벡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글리벡을 먹지 않으면 암 수치가 올라가는 백혈병 환자다. 아이를 낳으려면 글리벡을 중단해야 한다. 그녀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 욕심에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에게 문제가 있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남편도 네가 그 아이의 인생을 평생 책임질 수 있냐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어요. 임신 후 2주 동안 인터넷 카페와 산부인과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그러던 중 한 의사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임신한 줄 모르고 글리벡을 복용한 당신 같은 케이스가 두 번 있었다. 둘 다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당신도 건강한 아이를 낳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선택은 네 몫이다.’ 그 말을 듣고 기억에 남은 건 두 분이 건강하게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뿐이었어요. 나도 왠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어요.”
결국 지은 씨는 마음을 굳혔다. 10개월 가까이 아이와 함께하며 그녀의 암 수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출산 2개월 전, 의사는 다음 검사 때 만약 수치가 더 높아지면 글리벡을 다시 먹어야한다고 했다. 다음 검사 때까지 지은 씨가 할 수 있었던 건 기도뿐이었다.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신기하게도 수직상승하던 암 수치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고 평행선을 보였다. 의사는 전보다 나빠지지 않았으니 좀 더 버텨보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은 씨는 예쁜 딸을 낳았다. 지은 씨는 ‘아기가 보채지 않아 힘들 일이 없다. 오히려 너무 편해 살이 안 빠진다’며 웃는다. 윤서는 지은 씨와 재오 씨의 보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