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설란 화분 귀퉁이에 풀 한 줄기가 올라왔다. 집안에 식물이 적어 푸른 잎이 귀하기에 내버려두었다. 그 가느다란 줄기 끝에 꽃이 한 송이 피었다. 가시 같은 잎이 눈에 익다 했더니 노랑색 채송화다.
며칠동안 집을 비운 후 돌아와서 화분에 물을 주며 살피다가 꽃을 발견하고 소리쳐 남편을 불렀다.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도 높은 목청에 마음이 동했는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서 보더니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채송화를 본 것이 몇 해 전인가, 시골집 얘기가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었다.
우리가 신혼시절 몇 해 살았던 집은 동네 한쪽 산밑에 넓은 땅을 거느리고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집 주변은 오랜 세월동안 그곳에 살다간 조상들이 심은 나무들로 무성했다.
집 뒤란과 이어져 있는 산등성이에 자생하는 수백 그루의 참나무를 위시해서 산비탈 텃밭 주변에 대추나무가 수십 그루였고 사당 채의 긴 담벼락을 따라 늘어선 두릅나무는 이른 봄 내내 새순을 돋아내 두릅향기가 식탁에 가득하게 만들어 주었다.
집 둘레에 심심찮게 서있는 감나무, 고추밭 가장자리에 서너 그루 우뚝 솟은 미루나무도 볼만했으며 그 옆의 밤나무들도 가지가 무성하여 많은 열매를 달아 밤추수도 제법 일거리였다.
그 곳에서 지내며 늘 바라보던 나무의 크고 많음에 지금도 무리 지어 있는 것들에 대한 향수가 깊다.
어머님께서는 바깥마당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될 때마다 눈에 뜨이는 나무에 대한 내력을 말씀해 주셨다. 집안에 심겨진 대부분의 나무에는 작은 사연이 담겨져 있었다. 마당 한 모서리의 늙은 감나무에는 팽이 모양의 감이 열렸는데 나이가 많아서 해를 걸러 감이 열린다고 측은한 정을 보냈다. 그것은 모든 나무 중에도 어른 대접을 받는 고목이라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보곤 했다. 감히 가지 위에 올라가 감을 따지 못해 얼마간의 열매가 있어도 까치 밥으로 내버려두고는 했다.
사랑방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커다란 측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옆에 무궁화가 기우뚱한 자세로 심겨져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중학생일 때 시동생과 같이 심었다고 했다. 어른이 된 남편은 작약밭 귀퉁이에 자목련 몇 그루를 심어서 나무심기의 내력에 얘기 하나를 보태었다. 앵두나무를 심은 것은 작은할아버님인데 그분이 음력 4월에 돌아가셔서, 이른 앵두를 따서 제사상에 올렸기에 당신께서 심은 공을 잡수셨다고 했다.
앞으로 누구에겐가 그 얘기들을 전해 주어야 될 나도 문중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시로 백합 몇 뿌리를 얻어다가 심었다. 마늘쪽과 모양이 비슷한 뿌리를 해마다 나누어주었더니 그것도 다른 식물을 닮아 포기가 커서 꽃이 많았다.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짙은 백합 향기로 마음이 현란했다.
마당 한편이 널따란 채소밭으로 경작되는데도 빈땅이 많아서 봄이 되면 무엇이건 심어야 되었다. 어머님께서 살뜰히 여기는 그 많은 나무들이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에 크게 도움이 되었고, 바람 같은 남편 대신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진작 눈치챘더라면 먹고사는데 아무 소용에 닿지않는 백합보다 가지나 토마토 따위를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님은 키가 훤칠한 나무를 가꾸기보다는 작고 아담한 꽃을 좋아하셨다. 해마다 백일홍이나 일년국화 따위를 골목길에 심어서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꽃같은 자식들이 한창 자라나던 젊은 시절에는 다른 꽃을 찾아다니시느라 집안에 소홀하셨다.
내가 결혼을 해서 시댁으로 들어간 후에는 집안에 계시면서 화단의 꽃들을 돌아보시고 잡초를 뽑아주면서 소일을 하셨다. 그런데 화초와 같이 잡초도 쉴새없이 돋아나 며칠만 소홀히 해도 마당에 잡초가 무성해서 온 식구가 잡초 뽑기에 동원되어다. 늦잠을 자고 싶은 남편은 '풀 뽑아라' 하는 소리를 기상 나팔로 듣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농사짓는 시골집답지 않게 마당이 깨끗이 정리되었다.
잡초 때문에 사람이 시달리자 잡초가 잘 돋아나는 곳에 채송화를 심었다. 채송화는 도시계획에 따라 잘 정비된 길처럼 마당을 이리저리 갈라놓았다. 그것은 땅에 나직이 엎드려 밭과 마당을 경계해 주었고 낮은 곳과 높은 곳을 구분 지었다. 또 집 모양에 따라 축대 밑으로 길게 이어져 흡사 꽃밭 위에 세워진 것처럼 집이 아름다웠다. 채송화는 하수도 옆에도 심어졌고 사당으로 통하는 구석진 길에도 얌전히 누워 있었다.
채송화가 자라서 꽃이 피어 있을 동안은 잡초 뽑기에서 놓여날 수 있어서 편안했다. 대신 소일거리가 줄어든 아버님은 며칠씩 사랑방을 비우셨다.
나는 아버님이 계시지 않는 사랑 마루에 올라앉아 마당에 만발한 채송화를 내려다보곤 하였다. 그 꽃은 지붕 위로 비죽 솟아오른 나무들을 숭배하는 듯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한자리에 서서 온갖 풍상을 겪어내는 나무를 바라보는 것보다 시간이 흐르면 살아있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는 일년초 같은 인생을 사랑한 것인가, 나무 한 그루 남기지 않은 아버님의 인생에서 귀하게 남겨진 모습이 남편의 웃음인가 보다. 화분에 돋아난 채송화를 바라보는 모습이 천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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