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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18. 13:23 Bluewave사랑방

66년전 일제신사(日帝神社)불태우듯


용두산공원

부산의 대표적 명소인 용두산공원.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용두산 신사(龍頭山神社)'가 버티고 있었다. 이 신사(神社)는 광복 3개월 후 1945년 11월 17일 불타 전까지만 해도.....하지만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일제시대 용두산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과 좋던싫던 이곳을 참배한 나이가 지긋한사람들 밖에없다.

용두산 신사는 가장 역사가 오랜 신사일 뿐 아니라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신사였다.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게 되면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금도비라신(金刀比羅神)을 모신 사당을 부산진에 지었는데, 1678년 왜관을 용두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쓰시마 번주(宗義眞)가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를 건립하였다. 이 신사가 1894년에는 거류지 신사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신사가 초라하여 부산거류 일본인들이 거액을 모금하여 신사재건사업을 전개하여 1899년 준공하고 그해 7월 8일에는 신사 천궁식(遷宮式)을 거행하였다.

용두산신사

1900년에는 이 신사가 용두산 신사로 개칭되었다. 이 용두산 신사는 항해의 안전을 지켜 준다하여 뱃사람이 많이 신봉했던 금도비라신(金刀比羅神)을 비롯하여 주길대신(住吉大神), 관원대신(官原大神),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 등 여러 신들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1910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31개의 신사(神社) 혹은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용두산 신사는 으뜸이었다. 1915년에는 용두산 신사는 새로운 건물인 신락전(神樂殿)을 건립하였고, 1916년 10월 15일 용두산 공원 조성을 계기로 용두산 신사는 일제의 현존과 일본적 종교의 중요한 거점이자 부산의 명소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당시의 일제는 용두산신사사진에 '부산명소'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용두산 신사 입구

계단에 한복입은 남녀학생들과 뒤에 우뚝솟은 도리이가 보인다

용두산 신사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도리이(鳥居)라고 불리는 ‘ㅠ'자 모양의 입구가 있었다. 도리이는 일본 지도에서 신사를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하다. 도리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석등(石燈)이 늘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좀더 들어가면 한 쌍의 사자상이 있는데, 흔히 해태상이라고 말하지만 일본말로는 ‘고마이누’라고 한다. 이것은 해태상과 마찬가지로 악귀를 막는 수호상이었다.

용두산 신사 본전

신사 건물 앞쪽 한 귀퉁이에는 약수터같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데미즈야(手水舍)라고 부른다. 신 앞에 나아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로 손을 씻는 곳이다. 이런 정화의식을 ‘하라이(濯 祿)’라고 부른다. 이런 석상 뒤에 있는 것이 배전(拜殿)이다. 이곳이 참배자들이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벽을 치는 곳이다. 그 뒤에 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본전(本殿)이 있다. 본전을 신전(神殿), 혹은 정전(正殿)이라고 부른다. 본전에는 제신과 제신을 상징하는 예배 대상물 곧 신체(神體)가 모셔져 있어 일반 참배자의 출입이 금지된다.

1925년부터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려는 의지가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구체적으로 강요된 것은 1935년 이후였다.특히 1935년 4월 정무총감(今井田淸德)은 도지사 회의석상에서, “신을 경배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가 나라를 세운 도의 요체이고, 국민도덕의 연원임에 비추어 이를 명징(明徵)하고 선양함으로서 날로 국민정신의 진작, 경장(瓊章)을 도모할 것이다”고 훈시하고, “신사에 참배하여 경건한 기(氣)를 갖고 감사하는 것이 품성도야에 알게 모르게 심대한 영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것임을 보다 분명히 했다.

청소년 시절을 부산 부평동에서 지냈던 김열규 교수님이 부산일보에 연재중인기사에 의하면 1934년에는 옛 용미산에 당시 부산부청(중구 중앙동 옛 부산시청) 건립계획이 추진되면서 용미산 신사도 용두산 동편으로 옮겨 놓았다. 당시 초등학생 아이들도 교사의 지시에 따라 '신사 참배'를 해야 했다고 한다.

특히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엔 소위 '황민화(皇民化)정책을 제시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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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사의운명은 해방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게된다. 일제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한국 사람들로서는해방과 함께 일본종교의 거점이었던 신사를 불태우거나 파괴 시키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의 경우, 일제의 패망이 확실해 지자 조선총독부가 신궁의 본전(本殿)까지 스스로 소각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한국인들에 의해 불탔다. 해방 후 8일 만에 전국 136개 처의 일본 신사가 불태워졌다. 그런 와중에 부산의 용두산 신사는 해방되고 3개월이 지나도록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라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45년 11월 17일, 오후 6시 용두산 신사가 불길에 휩싸였다. 신사는 때맞춰 불어온 부산 앞바다의 세찬 해풍을 맞으며 순식간에 번져 한줌의 재로 변했다.용두산신사가 불타는 것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의 억지 절까지 받아먹어 화력(火力)이 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갈치 시장 앞 바다에서 본 용두산 공원으로 사진 왼쪽이 용두산신사이다


당시 부산지역 신문인 일간지 민주중보(民主衆報) 11월 19일자 신문에는 '용두산 신사 소멸,방화 혐의 농후… 일인의 모략'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보도됐다. 방화의 혐의가 짙었지만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용두산 신사의 화재에 대해 속시원해했다. 소방서에서 조사에 나섰지만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 있었다.

50여년이지난 후 2007년 01.27 부산일보에서방화범이스스로 입을 열었는데 용두산 신사의 방화자는 당시 36세의 기독교 청년 집사 민영석씨였다며 "50년이 지났기에 건조물 방화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고 보도하였다.민씨는 일제에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두 번이나 투옥되고 직장까지 잃었다. 민씨는 2006년 부산경남교회사연구회에서 "시너를 두되들이 병에 담아 들고 불을 붙였다"고 공개적으로 방화 사실을 증언했다.

교단에서 가장 최고령으로 알려진 민영석 목사가 지난 4월 23일 10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입성을 했다. 고 민영석 목사는 고려신학교 5회 졸업생으로 진주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엄궁, 하단교회, 등 주로 농촌지역의 목회자로 활동하다가 의령성당교회를 끝으로 목회일선에서 은퇴했다. 일생 11개 교회를 섬겼다.

posted by bluewa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