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1. 00:57
세상사이야기

줄타기 명인 김대균
줄타기는 나례도감儺禮都監 혹은 재인청才人廳 계통의 광대줄타기와 유랑예인 계통의 남사당패 어름줄타기가 있다. 광대줄타기는 줄광대가 어릿광대와 함께 삼현육각의 반주에 맞추어 기예(잔노릇)·재담·소리를 하는‘ 판줄’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어름 줄타기는 익살스런 재담에 무게를 둔다. 줄타기란 이름으로 광대줄타기가 중요무형 문화재 제58호로 지정돼 있고, 어름줄타기는 남사당놀이의 일부로서 무형문화재 제 3호다. 하지만 남사당놀이 여섯 종목 가운데 어름줄타기 예능보유자는 없다. 김대균 은 현재 판줄의 맥을 잇고 있는 유일한 줄광대다. 글 윤덕한 기자 사진 임승수(사진가)
줄타기 명인 김대균

그래서 그 말만 믿고 홑 아홉 살에 줄에 올라와 줄타기를 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별 볼 일 없네그려. 매일 엉덩이만 터지고.
그래도 딱 하나 좋은 것이 있는데,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나를 올려다본다는 것!” 6월 3일 경기 양평군 강상면 체육공원.‘ 2010 농어촌 찾아가는 문화순회 공연’의 하나로 김대균이 줄놀음 공연을 펼웃다. 뙤약 볕이 내리쬐는 몹시 더운 날이었다.
“우리 줄타기는 연희하는 저희와 구경하시는 여러분이 나눠 져 있지 않습니다. 눈과 마음으로 교감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 입니다. 여러분을 정성껏 모시고 여행 한번 떠나보겠습니다.” 공연은 줄고사로 시작한다.
“1300년 맥을 이어온 우리의 조선 광대줄타기가 오늘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판을 벌였습니다. 200여 년 전 임금님 앞에서 줄 을 타시어 이름을 하사받은 김상봉 선생님, 최상천 선생님, 그리 고 저를 몹시 아껴주셨던 김영철 선생님, 마지막 재인청 창우셨 던 이 선생님, 오늘 부디 좋은 공연이 될 수 있도록 살펴주시 길 바랍니다.” 큰절을 두 번 올린 후 작수목과 말뚝에 술을 붓는다. 다시 한 잔을 받아 관객에게 음복하도록 한다. 제물을 관객들에게 나눠 주곤 고사상을 물린다. 이어 춤사위 한 자락과 새타령을 뽑아 보 이더니 발바닥에 물칠을 하고 작수목에 오른다.
“야단이로세, 줄도 엄청나게 따듯하구나.”
잔노릇과 재담·소리가 한판을 이루는 무대

“여기 오신 분들의 수심을 다 모아서 여기 남한강 제일 수심 깊은 곳에 갖다 버릴 것이야. 이제 7년 동안 운수 대통할 것입니 다.” “이제 이 발바닥으로 오두방정을 떨어보는데 장히 어렵겠다.
요놈이 잘 디뎌줘야지 잘못 디뎌서 밑으로 내려가는 꾳이면 낙 동강상 오리알 떨어지듯 내려가고 말겠다.” 공연은 어느새 막바지로 접어든다.
“자 이제 요것 하나만 하고 내려가자꾸나.” 하늘로 번쩍 솟구쳐 오르는 허공잽이로 마무리를 하고는“ 내 가 더 하다가는 여러분 간이 다 떨어질 것 같으니 요만큼만 하고 내려간다 이 말씀이요” 하고 줄에서 내려와 크게 인사를 한다.
줄타기 공연의 30~40%는 관객의 몫이다. 다른 나라 줄타기와 확연히 구분되는 부분이다.‘ 줄 위를 걷다’는 뜻의 줄타기는 서 양의 개념으로 이들은 쇠줄을 이용한다. 당연히 그 위를 걸으며 단순한 기술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 하지만 우 리의 줄타기는 줄놀음이다. 여기에 관객이 참여해 판줄을 완성 한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는, 서커스보다 연 극에 가까운 공연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독일 베를린 문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에 들렀다. 그런데 그 친 구들 말이“ 줄타기는 독일에도 많다. 하지만 예술로 취급하지 않 는다” 였다. 프레젠테이션 영상을 보고서야“ 이것은 진정한 예 술이다. 우리 줄타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 한다.
줄광대는 관객과 소통하면서 점차 신명이 올라 꼭짓점까지 도달한다.“ 혼자서는 아파 죽지. 관객이 있으니까 흥이 나서 계 속 가는 거지.” 그래서 제대로 신명이 났던 공연은 기운이 몇 달, 몇 년이 간다고 한다. 2006년 춘천마임축제 때 밤 12시에 공연했 던 도깨비난장은 수많은 관객과 함께‘ 풀어 재낀’ 공연으로 아 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다.
“혼자는 아파 죽지. 관객 덕에 신명 나서 하는 거야.”

그곳에서 스승 김영철을 만났다. 그해 줄타기가 중요무형문화제 로 지정되면서 첫 예능보유자가 된 김영철은 민속촌에서 줄타기 공연을 했다“. 아홉 살짜리가 뭘 알았겠습니까. 그냥 재미있어서 매달려 놀았던 거지요. 당시 스승님은 제자가 없었는데, 시골 할 아버지처럼 아주 인자하게 대해주셨어요.” 김대균은 김영철의 무릎제자가 됐다. 김영철은 열 살이 된 김대균에게 줄 위에서 왔 다 갔다 달리는 것까지 가르치고는 민속촌 공연을 그만두고 전 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거기서 일이 생겼다. 1979년 전남 장흥에 서 공연을 마치고 잠시 쉬던 김영철이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 수가 됐다. 그의 나이 예순 살이었다. 줄타기의 전통이 끊길 위 기에 놓인 것이다.
김래문이 김영철을 집으로 모시고 병 수발을 했다. 한번 오시 면 두세 달을 머물다 가시곤 했다. 거동조차 힘든 김영철이었기 에 줄타기 시범은 물론 불가능했다. 김영철이 말로 알려주면, 김 대균은 이를 듣고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혼자 줄 위에서 연습하 는 외롭고 긴 수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줄타기 잔노릇 을 익혔다.
원래 줄광대들은 줄을 탈 때 엉덩이를 보호하기 위해 두툼한‘ 들보’를 댄다. 하지만 김대균은 줄의 감각을 생생하게 느 끼기 위해 들보를 떼어버렸다. 억센 삼줄에 쓸려 흰 바지와 줄이 피로 물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1년이 지나자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됐다.
‘왜 줄을 타는가’, 20년 만의 판줄 복원

1997년 경남 의령에서 공연 도중 줄이 끊어지는 큰 사고가 발 생했다. 제일 중요한 발목을 다쳐 꼬박 1년을 병상에 누워 있었 고 6개월 재활치료를 했다. 처음 한두 달은 돈 걱정이 먼저였는 데, 5개월이 넘어가자‘ 다시 줄을 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련이자 전환점이었다. 남들보다 세 배는 더 열심히 재 활에 노력했다. 그 덕분인지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병상에서 생각한 것이 있었다. 축제 현장을 쫓아다니는 것만으론 안 된다 는 것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연희과에 입학했다. 체계 적인 이론 정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은 안동대학교 민 속학과로 진학했다. 배움은 에너지가 됐다. 주말엔 공연을 했다.
하지만 잔노릇만 보여주고 뜨내기 구경꾼의 입맛에 맞추는 공연 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침내 1999년 11월 판줄 복원 공연을 성 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1979년 김영철이 덕수궁에서 판줄 공연 을 한 뒤 20년 만의 재현 무대였다. 그리고 2000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서른네 살이었으니 너무 빠른 것도 같지만,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생각한다. 시간을 많이 줬으니 앞으로 할 일이 많 은 것 아니냐는 뜻도 담고 있다.
줄광대 본향 과천에 정착
2008년 경기 과천으로 터를 옮겼다. 과천은 줄광대의 본향이다.
이를 기려 과천시가 지원을 약속하며 유치에 나선 것이다. 전통 연희극장을 지어 공연을 상설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 역에 뿌리내린 전통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들도 친 숙하게 받아들인다. 전수교육장을 마련해 잘 운영하는 것이 과 제다. 아이들이 이곳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게 할 생각이다. 현재 열 명 정도가 학습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 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총명하고 꾸밈이 없다.
“어느 나라든 아주 예전부터 줄타기가 있었어요.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내려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줄타 기를 모든 놀이의 고향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줄타기에 흠뻑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본능 같은 거예요. 뛰어놀다가 그중 에 전승하는 녀석도 나올 것이고, 아니더라도 마음 한곳에 우리 줄판을 재미있는 문화 자산으로 간직하게 되겠지요.”
이를 기려 과천시가 지원을 약속하며 유치에 나선 것이다. 전통 연희극장을 지어 공연을 상설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지 역에 뿌리내린 전통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들도 친 숙하게 받아들인다. 전수교육장을 마련해 잘 운영하는 것이 과 제다. 아이들이 이곳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게 할 생각이다. 현재 열 명 정도가 학습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 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총명하고 꾸밈이 없다.
“어느 나라든 아주 예전부터 줄타기가 있었어요.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내려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줄타 기를 모든 놀이의 고향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줄타기에 흠뻑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본능 같은 거예요. 뛰어놀다가 그중 에 전승하는 녀석도 나올 것이고, 아니더라도 마음 한곳에 우리 줄판을 재미있는 문화 자산으로 간직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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