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화면과 진한 먹물이 작가의 손을 통해 선과 번짐으로 이어진다. 부분적인 외관이 점차 하나의 자동차로 완성된다. 농담(濃淡)으로만 표현된 고급차는 그렇기에 더욱 미려하다. 그림 속 자동차는 어느덧 실사(實寫)로 변해 저 멀리 질주한다.
폭스바겐 자동차를 수묵화로 표현한 광고가 화제다. 폭스바겐코리아는 지난 5월부터 자사의 쿠페형 세단 ‘CC’를 수묵화로 그린 영상 광고를 선보였다. 광고 속 그림은 32세의 젊은 동양화가 장재록이 2주 동안 직접 그린 것. 붓으로 작업하는 모습도 담았다. 그는 주로 자동차(특히 수입 고급차)와 현대 도시 풍경을 수묵화로 그려온 작가로, 화려한 자본주의 도시를 순수한 흑백으로만 표현함으로써 그 괴리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극대화했다. 폭스바겐코리아 측은 “순수 예술가가 자신의 철학을 꿋꿋이 표현하는 열정을 보여주면서, 폭스바겐의 장인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상업주의의 꽃’인 광고에서 순수 미술을 활용하는 일이 최근 부쩍 늘었다. 2002년 창(窓) 광고에서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을 전면에 내세운 이후 유명 작가나 작품을 담은 광고가 하나둘 생겨났긴 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2007년 ‘아담의 창조’ ‘타이티의 여인’ 등 명화 속에 LG 제품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 LG의 명화 캠페인 시리즈가 빅히트를 친 후, 고전 작품은 물론 팝아트 등 현대 미술을 패러디한 광고가 봇물을 이뤘다. 또 CJ홈쇼핑 광고로 큰 인기를 얻은, ‘여자를 그리는 화가’ 육심원처럼 신진 작가가 광고를 통해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노화한 이미지에 생기 불어넣기
이처럼 광고에서 미술을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LG 광고대행사인 엘베스트 정원재 AE는 “광고의 역할이 세일즈 자극에서 브랜드 강조로 옮겨지다 보니 예술을 활용하는 일이 많아졌다”며 “미술, 특히 친숙한 그림은 소비자의 기분 좋은 반응을 불러오고, 이는 기업 브랜드 이미지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오리콤 브랜드전략연구소 허웅 소장도 “광고에 미술을 활용함으로써 노화한 기업 브랜드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물론 기업이 추구하고자 하는 고급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금융·통신 회사 및 대기업에서 미술 활용 광고를 많이 선보이는 현상도 이런 측면에서 봐야 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최근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더해졌다.
그런데 앞선 폭스바겐코리아 광고에서 보듯, 최근 광고와 미술의 만남은 조금 색다른 측면이 있다. 단순히 작가의 작품을 가져다 쓰는 차원을 넘어, 기업과 작가 간 콜래보레이션(collaboration·협업)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장재록 작가는 자신의 의견이 광고에 상당히 많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작게는 광고 속 자동차의 색깔에서부터 크게는 자동차 그림과 제작 과정을 통해 추구하는 바에 이르기까지, 광고 제작 전 과정을 작가와 함께 논의해 진행했다. 그는 “광고를 찍으면서 상업성에 물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순수 예술적인 측면이 극대화됐다”며 만족해했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최근 방영 중인 SC제일은행 TV 광고, 즉 스탠다드차타드의 글로벌 광고는 젊은 아프리카 남성의 성장담을 보여주는데, 강렬한 색감의 유화가 인상적이다. 이 광고는 아예 아프리카 출신 미술가인 에즈라 우베가 감독을 맡았다. 그는 유화를 디지털 사진으로 촬영한 뒤 이를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SC제일은행 언론홍보팀 정혜란 과장은 “유화를 활용한 건 어느 기업 광고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법”이라며 “전통(유화)과 현대(디지털 사진을 통한 애니메이션)의 접목을 통해 은행의 철학을 은행 같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했고, 전 세계인에게서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어냈다”고 강조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미술계는 ‘순수 예술과 함께한다’는 고급화 전략을 통해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려는 기업과 다양한 분야에서 활로를 모색하는 미술계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고 있다. 미술 전문지 ‘아트 인 컬처’의 호경윤 기자는 “기업, 특히 자동차 및 명품업계에서 작가들에게 다양한 콜래보레이션을 많이 제안한다”고 했다. 광고는 물론 기업과 작가가 함께 전시회를 기획·진행하고, 명품지 등의 지면을 구성하며, 단행본을 내기도 한다. 물론 기업의 제품이 직간접적으로 작가의 작품 소재가 된다.
BMW코리아 주양예 홍보이사는 “과거에 작가들에게 콜래보레이션을 이야기하면 ‘상업적이라서 싫다’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작업 과정에서는 당연히 작가에게 최대한 재량권을 준다”고 했다. 현재 BMW코리아는 김중만 사진작가와 함께 작업 중이다. 그 결과물이 광고가 될지, 전시나 단행본이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광고 자체를 ‘아트’로 만들어야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을 활용한 광고가 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미술평론가 이정우 씨는 “광고 자체를 ‘아트’로 만들어야 하는데, 제작자들이 단순히 ‘아트’에 기대려 한다. 아이디어의 빈곤이 낳은 결과다”고 주장했다. 호 기자도 “특히 명화 활용의 경우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보기 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쓰는 손쉬운 방법일 뿐, 발전적인 광고 형태로 보긴 힘들다”고 지적했다. 한 미술계 인사는 “미술계와 산업계의 협업 역시 많아졌다고 하나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미술계에서 좋아하는 작가군과 패션이나 명품업계에서 선호하는 작가군이 따로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미술과 광고의 만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니, “순수 미술과 광고 디자인, 그리고 영상의 경계는 사라졌다”는 영국 출신 팝아트 작가 줄리안 오피의 말처럼, 더 이상 미술과 광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미술을 활용한 다양한 광고가 어떤 새로운 ‘아트’로 나타나 소비자들을 즐겁게 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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