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수원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 오프닝 콘서트
[중앙일보]2011.08.12 00:51 입력 / 2011.08.12 13:48 수정
1962년 케네디 대통령 시절 미국 백악관에 초청돼 연주를 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한동일씨. ‘클래식 한류’로 불릴 만큼 요즘 급성장한 한국의 클래식 연주자들도 한씨 같은 선구자가 있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다. 한씨가 13일 피아니스트 후배들과 함께 한 무대에 선다.
‘음악신동 1호’ ‘유학파 음악인 1호’ .한국 피아니스트 1세대 한동일(70·사진)씨를 따라다닌 수식어다. 그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크게 두 번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한동일의 해’로 꼽는 것은 1954년이다. 6·25 종전(終戰) 이듬해 그는 미군 헬기를 타고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군 사령관이 그를 위해 유학 자금을 모았다. 한국 현대음악사에 ‘신동’이란 개념을 처음 심었다. 65년도 극적인 해다. 뉴욕 리벤트리트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한국 최초 콩쿠르 우승’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한씨가 꼽는 결정적 전환기는 68년이다. 그는 이때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연주를 끝내고 혼자 호텔 방에 누워 “천장이 무너지고 사방의 벽이 좁혀져 오는” 경험을 했다. “담요를 뒤집어 쓰고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내 삶이 달라질 거란 걸 예감했다”고 말했다.
연주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한씨는 열셋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혼자 떠났다. “한국 사람들은 굶어 죽느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하던 때였다. 나는 음악을 하기 위해 천국으로 떠났다 여겼다.”
행복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10여 년 동안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연주해야 했다. 미군이 모아준 유학 자금은 떨어졌다. “물건을 들고 해외를 떠도는 세일즈맨이 된 기분이었다. 68년 즈음, 독일에서 연주 하는데 큰일이 생겼다.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 음악인데도, 일부러 연주를 망가뜨렸다. 내 자신을 망치고 싶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싫어졌다. 뉴욕 필하모닉, 러시아 내셔널 심포니,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그였다. 런던 필하모닉과는 스무 번 넘게 함께했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연주했던 스타였다.
하지만 무대를 떠날 시간이 왔다. 마침 인디애나 음대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 28세부터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레슨실에 찾아올 때마다 ‘이제야 나도 가족이 생겼다’라는 안도를 했다. 나는 열세 살부터 10여 년을 혼자 다녔다. 황량한 무대 뒤를 지켰다. 어른 세상에 홀로 온 아이 같아 무서웠다.” 그는 37년 동안 인디애나·보스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2005년 돌아온 한씨는 현재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다. 서울에는 자그마한 연습실 겸 스튜디오만 있을 뿐이다. “이제 나에겐 정해진 직함이 없다. 50년 동안 몰랐던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한국 음악사의 각종 기록을 세웠던 그는 영광 대신 가족과 안정을 선택했다. “라흐마니노프·프로코피예프 같은 어려운 작품을 연주하던 시기는 지났다. 나는 충분히 할 일을 다했다 생각한다. 이젠 영적이고 정신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나의 후배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돕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10대의 ‘신동’ 한동일에게 음악은 구원이었다. 가난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연주는 내게 연주가 아니다. 삶을 축하하는 행위다. 70세에 접어들면서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며 친구들과 같이 잔치를 벌이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한씨가 13~20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에 11명의 피아니스트와 함께한다. 그는 13일 오프닝 콘서트에서 베토벤 협주곡 4번 연주를 맡았다. 신수정(69)·이경숙(67)씨부터 김영호(55)·김대진(49)·손열음(25)씨, 조성진(17)군까지 출연하는 축제의 최연장자다. 그가 ‘1세대’로서 고통스럽게 지났던 길에서 ‘3세대’ 피아니스트들은 팡파르를 울리고 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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