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순공주(義順公主, 1635년-1662년)는 조선 왕족의 딸로 효종의 양녀이다.1650년 효종 원년 3월에 청나라 사신 파흘내(巴訖乃) 등이 가지고 온 칙서 가운데에 “귀국과 혼인하여 우의를 공고히 하고자 하니 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족이나 대신의 딸 중 재색을 겸비한 자를 뽑아 보내라.”고 하였다. 청나라는 우리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선린을 굳게 한다는 미명아래 종실의 미녀들을 무수히 요구해 온 것이다.
이에 종실금림군은 자신의 딸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효종은 그녀를 자신의 양녀 자격으로 시비를 딸려 청나라로 보냈다. 이렇게 청나라로 차출된 의순공주는구왕(九王)의 부인이 되었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지 못한 탓으로 구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그가 청으로 간 다음해에 구왕이 황제의 자리를 엿본다는 혐의를 받아 반역죄로 몰리면서 구왕의 부인들이 여러 왕족과 장수들에게 분배될 때, 그는 구왕의 부하장수 보로(甫老, 또는 박락)에게 재가했다가 이혼하게된다.
그 뒤 그의 아버지인 금림군이 사신이 되어 청나라로 들어갔을 때에 딸의 환국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 1656년4월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2번씩이나 오랑캐에게 개가한화냥녀란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다가26세로 요절하고만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양주면 금오리(현 의정부시 금오동)에 안장되었다.'족두리묘'로도 불린다.봉분의 앞에 상석과 향로석 및 1쌍의 문인석이 조성되어 있으며, 의정부문화원에서 세운 묘역의 내력을 소개한 표시판이 있다.
한편 실록의 내용과 달리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에는 의순공주가사신과 함께 보냈는데 청나라로 가는 도중 평안도 정주에 다다르자 '짐승보다 못한 오랑캐 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가마를 멈추고 볼일이 있다고 속인 다음 가파른 벼랑아래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정조를 지켰다 한다.공주의 주검은 구하지 못하고 쓰고 있던 족두리만 건져 올려 천보산에 의관장을 해서 지금도 족두리 산소라 불리운다.
조정에서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큰당, 작은당, 색시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이곳 당에서 식음을 전폐한 채 멀리 북쪽 정주당 땅만 바라보며 애타게 딸을 찾았다고 하여 정주당이라 불려지고 있다.
이른 봄 화창한 날을 골라 색시의 얼을 추모하는 한편 마을의 풍년과 무병을 빌기 위하여 동네사람 모두가 이날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정주당 놀이'라 하였다. 6·25동란을 전후로 하여 이 놀이가 차츰 열리지 않다가 매년 회룡문화제 때에 공연되면서 다시 보존·계승되고 있다.
금림군(1591(선조24)~1672(헌종13)
휘는 개윤(愷胤), 자는 흠길(欽吉), 호는 벽암(碧巖), 시호는 출숙(出肅). 봉성군<鳳城君, 중종 6남>파 4세, 품계는 현록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 폐위론이 일어났을 때 구천군 등 18명의 종친과 함께 이이첨을 처벌하라는 상소문을 올리는 데 참여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임금이 공주로 갈 때 호종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임금을 모시고 강화로 옮겨갔다. 그리고 왕명에 따라 적성 등지에 가서 군사와 군량미를 서울로 운송해 왔으며 호란 이후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는 일을 맡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은 숙녕원 당상관으로 인목대비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이를 지켰다. 오랑캐가 강화에 들어오자 다시 피난하여 마니산 바위 틈속에서 신주를 모시고 13일 동안 지내다 교동으로 빠져나와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1650년(효종 1) 청나라에서 조선 왕실의 공주와 혼인을 요구해와 곤경에 빠졌을 때 공은 자신의 딸을 공주로 대신하라고 내놓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의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라 하고 청나라 황자(皇子) 구왕(九王) 에게 보냈다. 청나라 구왕은아내를 맞아들이게 되나 얼마되지않아 반역죄로 몰려 부하장수에게 배분된 두뒤 이혼하게 된다. 보다못한 금릉군은후에 이행진(李行進)이 공과 함께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강력히 요청하여 그 딸을 데려왔다. 공이 세상을 뜨자 현종대왕은 친히 제물을 내려보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45-22 천보산자락
토번으로 시집간 당나라의 문성공주
문성공주(文成公主 623?~680)
이름은 이설안(李雪雁). 토번 이름은 갑목살한공주(甲木薩漢公主).
강하왕 이도종(江河王 李道宗)의 딸이라는 설이 있지만, 정확히 누구의 딸인지 분명하지 않다.
당나라 때, 토번의 송찬간포(松贊干布)의 제 2황후(제 1황후는 지금의 네팔에서 왔다).
그녀는 본래 당나라 황친이었다. 토번을 통일한 송찬간포가 당 태종에게 공주와의 혼인을 요청하자, 당나라에서는 혼인을 거부했다. 그러자, 토번은 당나라를 향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래서 641년, 당 태종은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문성공주는 토번에 중국 문화를 유입시키는 등 많은 공헌을 했다. 그로 인해, 라마교의 존상(尊像)이 되었다.
포달랍궁(布達拉宮/포달라궁)은 송찬간포가 문성공주를 환영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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