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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2. 00:56 생활의 지혜

홍수, 가뭄, 폭풍, 서리, 폭설, 흙비, 지진, 폭우, 우박, 안개, 이상 기후 등 다양한 기상 이변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와 더불어 해충들의 이상 번식 역시 우리 조상들의 삶에 큰 재앙으로 다가왔다. 우리 조상들은 해충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세계인을 괴롭히는 해충

2012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리비아 등에서는 메뚜기떼가 나타나 농가에 큰 피해를 입혔다. 2011년에는 호주와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떼의 습격이 있었다. 특히 호주에서는 8㎝가 넘는 커다란 메뚜기가 농장과 목초지를 초토화시켜, 호주 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를 표현한 1689년의 동판화. 메뚜기는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두 배에 달하는 작물을 먹어치우는 식욕을 가지고 있으며, 가뭄과 기근 등의 피해 시에 메뚜기떼가 발생해 더욱 큰 재앙이 되기도 한다.

해충들 가운데 인간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메뚜기다. 메뚜기는 평소에는 단독생활을 하는 순한 곤충이지만, 무리를 이루면 맹렬한 공격성을 갖는 무서운 해충으로 변신하게 된다. 메뚜기떼의 발생은 가뭄으로 먹이가 줄어드는 등 한곳으로 몰려야 하는 상황에서 주로 발생한다. 메뚜기는 한자로 황(蝗), 황충(蝗蟲), 비황(飛蝗)으로 표현하는데, 우리말로는 ‘누리’라고 한다.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누리 피해가 많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도 해충 때문에 고통을 겪었음을 알게 해준다.

삼국시대의 누리 피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누리 피해 8회, 백제 5회, 신라 25회가 기록되어 있다. 누리의 피해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음력 7월과 8월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메뚜기는 약 140여 종(種)이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재앙을 일으킨 누리는 주로 풀무치로, 가을철 곡식을 수확할 시기에 주로 활동하며, 건조한 기후에 이어 습기와 따뜻한 온도가 맞게 되면 대규모로 번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종이라고 한다. 이들은 논보다는 산에 인접한 밭이나 휴경지에서 서식할 수 있는 종이고, 유전적으로 대규모로 발생할 요인을 갖고 종이다. 또 애메뚜기 종류들도 삼국시대에 큰 피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도 한다. 삼국시대는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중이 높고, 1년 농사를 짓고 경작지를 한 두 해 묵힌 후 다시 농사를 짓는 농사법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요즘 논에서 볼 수 있는 벼메뚜기는 삼국시대에는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리로 인해 주로 피해를 입은 작물은 보리나 콩이 아니라, 가을에 수확하는 벼나 조였으며, 특히 조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397년 7월 신라 하슬라(강릉 일대)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생겨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거나, 465년 신라 사벌군(상주)에 누리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기록 등 구체적인 지명을 거론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나라에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발생한 누리의 피해가 서로 공통되는 바가 적어, 누리의 피해가 광범위한 지역이 아닌 국지적으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1~412) 15년 7월 ‘누리와 가뭄이 있었다.’, 신라 실성이사금(實聖 尼師今, 재위: 401~417) 5년 7월 ‘나라의 서쪽에서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는 기록은 405년에 동시에 발생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동시에 누리의 피해를 입었다면, 피해지역은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122년과 399년 신라, 62년 고구려, 208년 백제에서 발생한 누리에 대해서는 황이 아닌 특별히 비황(飛蝗)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누리가 이동하여 피해를 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누리의 피해를 막기 위한 노력

메뚜기는 한자로 황충(蝗蟲), 비황(飛蝗), 우리말로는 ‘누리’라고 한다. 가뭄으로 인해 메뚜기떼가 발생하면 식량생산이 줄어들어 기근이 발생하고, 이는 전염병의 창궐 등과 맞물려 끔찍한 재앙으로 다가왔다. <출처: gettyimages>

가뭄이 들어 농사가 잘 안될 때에 누리가 발생하여 논밭에서 자란 곡식을 다 갈아먹으면 농민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져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된다. 754년 누리가 발생해 곡식이 귀해지고 백성들이 굶주리자, 향덕(向德)이란 자는 너무 가난해 아버지를 봉양할 수 없어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이기도 했다. 흉년의 피해가 다음해에도 이어지자 당시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 사람,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 가난한 자들에게는 곡식을 나눠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조치를 해주었다. 571년 고구려 평원왕은 누리떼가 발생하자, 당시 짓고 있던 새 궁궐인 장안성 축조를 중지시켰다.

굶주린 백성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해 백성들을 위로해 주거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면서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도 했다.

누리의 발생은 정치를 잘못한다는 신호로 여겨져, 왕으로 하여금 정계 개편을 단행하게 만들기도 했다. 720년 신라 성덕왕은 누리가 발생해 농사에 큰 피해가 생기자, 요즘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중시(中侍) 사공(思恭)을 물러나게 하고 파진찬(波珍湌)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는 정계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769년 5월 누리와 가뭄이 발생하자 혜공왕은 백관들에게 각자 아는 인물을 천거하게 했다. 이러한 삼국시대 왕들의 조치들은 고려, 조선으로도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누리 피해

삼국시대 황충은 곡식에 피해를 입혀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나쁜 해충이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 22회, [고려사]에 57번 기록된 황충 기록 가운데는 이상한 것이 등장한다. [고려사절요]에는 1133년(인종(仁宗) 11년) 황충이 경기의 산과 들에서 소나무를 먹고 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가뭄과 황충이 동시에 벌어진 이 해의 황충 기록에는 누리뿐만 아니라,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의 피해도 같이 기록된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1191년 8월 해주에서 발생한 황충은 벼농사를 해친 벼멸구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1016년 7월 비황(飛蝗)이 발생한 사건은 전형적인 누리의 피해로 볼 수가 있다. 1016년 현종은 누리의 피해가 발생하자 죄수를 석방하고, 다음 해에도 계속되자 대궐의 정전(正殿)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근신하는 감상선(減常膳-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들 때에 임금이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근신하는 의식)의 의식을 치름으로써 재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보였다. 또 세금을 낮추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228년 고종(高宗)은 누리로 인해 농사가 망치는 일이 벌어지자 신하들을 보내어 여러 곳의 신사(神祠)에서 재앙을 멈추게 해달라고 빌고, 또 불교의식인 반야도량(般若道場)을 궁궐 안에 있는 선경전(宣慶殿)에서 27일 동안 베풀어 종교적인 힘으로 이를 물리치려는 노력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재해 대책

1536년(중종(中宗) 31년)에는 3도(道)에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들을 뒤덮어 남아난 곡식이 없을 정도였다. 오랜 가뭄 끝에 누리의 피해를 입은 후에는 다시 장마가 범람해 산과 언덕이 무너지고, 태풍이 불어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흙더미에 깔리는 참혹한 재해가 잇달아 벌어지기도 했다. 그 해 9월 신하들은 중종에게 강무(講武-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일)를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중종은 재해를 만나 매사에 한층 삼가는 것은 지당하지만 임금이 재해에만 마음을 써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폐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옳지 못하다고 했다.

적은 수의 메뚜기는 좋은 간식거리지만, 수백ㆍ수천ㆍ수억 마리의 누리는 인간이 당장 어쩌지 못하는 재앙 그 자체였다. 이 때문에 벌레를 많이 죽이면 조화로운 기운(和氣)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잡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잘못된 말이 민간에 퍼지기도 했고, 누리의 발생은 임금이나 관리의 덕이 부족해 발생한 탓이므로 임금과 수령이 덕을 닦아서 물리쳐야 한다는 믿는 선비들도 있었다.

1447년 세종은 요망한 기운은 덕(德)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는 선비들의 생각을 두고 글자에만 구애되어 변통할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면서, 해충이 발생하는 즉시 잡아서 묻어버리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도 해충으로 인한 재해를 없앨 수 있는데 민간에서 이런 이치를 모르고 처음에 제거하지 않기 때문에 큰 우환이 된다고 하였다. 세종은 누리떼가 번식하지 못하도록 발생 초기부터 제거하도록 명령하고, 황충이 처음 나오는 상황을 조사해 보고할 것을 주문했다.

세종의 이와 같은 조치는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누리떼의 발생을 미리 예방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누리가 먹지 않는 토란 등을 다른 작물과 함께 심고, 겨울철에 메뚜기 알을 찾아 박멸하며, 발생 시기를 관찰해 즉시 죽이거나, 떼를 지어 날을 때에는 낙하지점을 알아내서 포살하고, 긴 장대에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아 자신의 논밭에 오지 못하게 쫓아내거나, 볏짚을 태운 재나 석회를 살포하고, 누리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아침에 포살하는 등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세종은 1444년 공주에서 누리가 발생해 곡식을 해치므로 군대를 출동해 잡게 했는데, 잡은 것이 60여 석이나 되었다. 농민들은 누리가 발생하면 물론 잡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누리를 제대로 막기란 불가능했다. 백성들은 하늘에 빌거나, 하늘을 원망하는 것 외에는 날씨가 추워져 저절로 누리가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 피해를 끼친 누리

1604년(선조(宣祖) 37년) 6월 강원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강원도 간성(杆城- 고성군) 지역에는 황흑색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전답에 두루 깔려 곡식을 남김없이 다 갉아먹었으므로, 며칠 사이에 들판이 불타버린 땅과 같이 변하고 백성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다고 하였다.

1437년 (세종(世宗) 19년) 2월 기록에는 작년에 중남부 지역 4개 도(道)가 모두 흉년이 들어 거의 대부분 지역이 농사를 짓지 못했는데, 특히 경기도의 안성과 충청도의 공주(公州)·신창(新昌)·아산(牙山)·회덕(懷德)·직산(稷山), 전라도의 전주(全州)·함열(咸悅)·임피(臨陂) 등의 고을은 모두 누리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금년 봄에는 역질(疫疾- 강한 유행성 전염병)마저 유행해, 백성들이 자기 손으로 소와 말을 잡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보리 뿌리를 캐어 먹이를 하며, 처자를 보전하지 못하여 처자를 버리고 도망하는 자도 있고, 혹은 아이를 길에 버리어 아이가 쫓아가면 나무에 잡아매고 가는 자도 있다는 참혹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누리는 가뭄이나 역병, 홍수 등 다른 재앙과 겹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심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누리의 피해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충청도, 영남과 호남 등 전국에 걸쳐 발생했다.

백성들을 괴롭힌 송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261건의 황충 발생기사 가운데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곡식을 해치는 벌레뿐만 아니라, 소나무 등 산림을 해치는 해충들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황충이 모두 누리는 아니었고, 일부는 나방이나, 벼멸구, 송충이도 황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곡식에 피해를 주었던 나방(왼쪽)과 소나무에 큰 피해를 입혔던 송충이(오른쪽). <출처: gettyimages>

황충 외에 가장 많이 역사에 기록된 해충으로는 송충(松蟲)이 있다. 송충이가 피해를 입히는 소나무는 고려와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관리되고 보호되는 나무였다. 송충이 주로 먹는 소나무 껍질은 백성들에게 최후의 구황(救荒)식품이기도 했던 만큼, 국가에서 송충이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1101년에는 고려에 송충이가 크게 번식했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1102년 5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도교의 행사인 초제(醮)를 올렸고, 다음 달에는 재상에게 명해 5방의 산신과 3곳의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송충이가 없어지기를 빌기도 했으며, 군사 5백 명을 풀어서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조치를 취했다.

송충이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

송충이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1403년 태종 임금은 송충이를 잡을 것을 명령했다. 이에 승추부(承樞府), 순위부(巡衛府) 등 여러 관청의 장인과 관리가 사람을 내어 1만 명이 참여하였고, 한 사람이 석 되(升) 정도를 잡아 땅에 묻었다. 태종은 송충이의 재앙은 인력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신하들은 이를 생각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여러 날에 걸쳐 송충이를 잡는 일을 한 끝에 송악산의 여러 골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잡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송충이를 잡는 일은 본래 승추부의 일이었다.

이렇게 송충이를 잡았어도 또 다시 발생하자, 태종, 세종 등은 여러 관청의 관원들과 노비 등을 징발하여 수시로 송충이를 잡게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송충이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과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시기에 다시 큰 피해를 입혔다. 1685년 숙종은 한성부로 하여금 오부의 군졸들을 다 동원해 경계를 나누어 송충이를 잡아 없애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1702년에는 한양 인근 산에서 송충이가 번식하자, 3일 동안 사람들을 뽑아 잡은 송충이의양이 3,972석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 숙종은 송충이를 제거하기 위해 특별히 재앙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기양제(祈禳祭 - 재앙을 쫓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해충 제거와 백성들의 피해

정이품 소나무.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궁궐 수리 등의 이유로 특별히 보호를 받기도 했다. 특히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는 세조(世祖)에게 도움을 준 인연으로 벼슬을 받았다. 송충이는 소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나쁜 해충이었다.

송충이를 잡기 위해 백성을 동원하다 보니, 백성들의 피해가 커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1729년 영조는 ‘송충이를 잡는 일은 폐단이 커서 백성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으니, 송충이를 잡느라 백성을 상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금원(禁苑- 대궐 안의 동산)의 소나무 잎을 상하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하고서, 군졸들을 시켜 사직단 주변의 송충이만을 잡게 하고 나머지는 놔두라고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1755년 한양의 사산(四山- 인왕산, 낙산, 남산, 북악산)에 송충이가 크게 번지자,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동원되어 잡았다. 임금의 명이 철저히 지켜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특히 왕릉(王陵) 주변 숲에 송충이가 발생하면, 백성들은 농사일을 제쳐놓고 군사들과 함께 송충이를 잡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송충이는 백성들의 비상시 먹거리인 소나무 껍질을 없애고, 땔감인 소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등 이래저래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벌레였다.

한국사에 익숙한 해충

미국의 작가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은 그녀의 대표작 [대지(The Good Earth)]에서 중국에서 발생한 메뚜기떼의 피해를 생생하게 묘사한 바가 있었다. 이 때문인지 메뚜기떼의 피해를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20세기 이후에는 방충제(防蟲劑)와 농약(農藥)의 사용으로 인해 해충으로 인한 피해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을 위협한 자연재해의 하나로, 해충 특히 누리와 송충이의 피해는 매우 컸었다.

  1.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은 [광개토태왕릉비문]과 1년 오차가 있다. 따라서 그의 즉위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392년보다 1년 앞당겨 보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기록뿐 아니라, 신라 측 기록도 1년을 앞당겨서 보아야 한다. 실성이사금의 즉위년은 402년이 아닌 401년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역사의 아침, 2011년. 53~63쪽 참조.

참고문헌:[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井上秀雄, [고대조선사서설], 영락사, 1978;문태영, 윤일, [삼국사기의 蝗에 대한 문화곤충학적 해석], [고신대학교 논문집] 5집, 2000;윤일, [조선시대 충청권에서 발생한 황충에 대한 문화곤충학], [자연과학] 13-1, 대전대학교, 2002;문태영, 윤일, 남상호, [역사서에서 곤충기록의 형태], [자연과학] 14-1, 대전대학교, 2003;박해철 외, [조선왕조실록과 해괴제등록 분석을 통한 황충의 실체와 방제 역사], [韓應昆誌] 49-4호, 2010.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세상을 바꾼 수레],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2.06.20

posted by bluewa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