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bluewaves
Bluewave의 아름다운 세상을 방문해 주신 파란가족님들께 행운과 사랑을 한아름드립니다 ^^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Tag

2019. 9. 14. 09:42 생활의 지혜

명지와 분포리의 소금[리더스 칼럼]

김효진 기자 | khj@leaders.kr

명지·분개 생산 전오염·자염 최고로 쳐
일제강점기 염전 운영권 강제로 빼앗아


소금은 곡물과 더불어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으로 그 역사도 인류 역사와 함께한다. 하얀 금이라고 하는 소금이야말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품 중 하나이다. 이것은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꼭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 맛은 조리하는 음식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좋은 소금을 찾기 마련이다. 좋은 소금은 아무 곳에서나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 모래, 일조량, 진흙 등과 같은 자연 입지조건이 맞아야 한다. 자연이 소금을 만든다는 말과 같이 자연조건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소금은 제조방식에 따라 바닷물을 끌어넣고 침전시키는 방식으로 만드는 천일염(天日鹽), 천일염을 해수나 수돗물에 녹인 후 다시 끓여 증발시키거나 전기분해하여 만드는 재제염(再製鹽), 검은빛을 띤 모래를 깔아 서실을 만든 다음 둑과 수문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투입하여 햇볕에서 바닷물이 증발되고 나면 염분을 머금은 모래를 모은다. 그 모래에다 다시 바닷물을 부어 염도가 높은 물을 지하수로를 통해 탱크에 저장해 두었다가 주물 솥에 끓여 소금을 생산하는 전오염(煎熬鹽)이 있다. 전오과정(煎熬過程)은 짠물 모으기, 짠물 끓이기, 소금 저장하기의 순으로 진행하여 소금을 생산한다. 육지의 소금광산에서 채취하는 암염과 땅에서 채취하는 토염이 있다. 조선후기 이후로 명지도나 분포리의 염전은 제방이 있는 유제 염전이었으며, 일본의 소금 생산 방식인 전오염이 유입되면서 줄곧 자염(煮鹽)을 생산해 왔다.

부산지방의 염업을 살펴보면 15세기 말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당시에 동평현 경내에 염분이 설치된 제염지가 현 동쪽의 비오리(非吾里), 현 남쪽의 노리(老里), 전포리, 장림리, 부산포, 장술포의 6개 처에 있었다. 19세기 전기에 편찬한 ‘동래부읍지’에는 염분이 도면에 23좌, 남촌면에 38좌, 부산면 4좌, 사하면 9좌, 도합 74좌로 전기에 비하여 9좌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향토사학자인 주경업 민학회 회장은 소금 중에 제일로 쳤던 것은 명지소금이라고 하였다. 그다음으로 분개소금, 일본소금, 중국소금 순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명지도나 분개(용호동)에서 생산되는 전오염 또는 자염이 맛이 있었다.

명지도에서 언제부터 소금이 생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소금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지도는 낙동강 하구에 있는 섬으로 염전을 조성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명지도의 염전은 해안가를 따라서 해척 마을, 평성 마을, 중신 마을, 하신 마을, 진목 마을, 중리 마을, 조동 마을, 동리 마을, 조서 마을, 진동 마을 등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1731년(영조 7) 삼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진곡 확보를 위한 명목으로 명지도에 공염장(公鹽藏)이 설치되었으며, 명지도 염민(鹽民)들의 반발로 폐기될 때까지 90여 년간 운영되었다. 공염장 폐지 이후에도 명지 소금은 영남의 대표적 소금으로 1950년대까지 이어져 왔으나, 정부의 천일염 장려 정책과 1959년 태풍 사라호의 피해로 점차 소멸되어 염전 자리는 대부분 파밭 등 농토로 바뀌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동래현에 25좌, 동평현에 40좌의 소금을 굽는 가마(동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부읍지’ 역시 동면(현 해운대구)에 23좌, 남촌(현 남구)에 31좌, 부산(현 동구)에 4좌, 사하에 7좌의 염분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약 4백여 년 전 대연동의 석포(石逋)부락 동쪽에 소규모의 염전이 개발되었는데 4개의 동이가 있어 사분개(四盆浦)라 하였다. 사분개는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 앞바다의 옛 지명인데, 이곳의 넓은 갯벌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므로 남향의 긴 모래사장이 있어 천일제염을 하기에 적당하였다. 그 후 해마다 바다의 자연 매립으로 인해 이 염전은 용호동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후에 분포리(盆浦里)라고 불렀던 용호동에는 진흙이 있는 넓은 모래사장과 장산의 큰아들의 산이라는 장자산(長子山)의 서편 골짜기에서 흐르는 소량천이 있어 소금 생산에 적합하였다. 동이(盆)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분포리(盆浦里)’, 또는 분개라고 불러 ‘분개염전’이란 말이 생겼다.

본래 분개의 소금은 천일염으로 질이 좋기도 유명하며 분개 소금으로 장을 담그면 맛이 좋았다고 한다. 분포리에는 24개의 동이가 있었는데, 한일병탄 직전에는 6개만 남았다. 인부들이 거분, 신분, 강개분, 보리분, 광계분, 동분이라 불렀다. 한일합방 이후 영도에서 소규모로 소금을 생산하던 시라이시(白石馬太郞), 시라이시간지로(白石漢次郞), 호시노(星野政太郞) 등이 용호동에 와서 전오염 염전이 개발되었는데 사람의 손으로 산을 파내고 흙을 들어낸 후 시멘트 공사로 작업장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왕병연 씨와 박두상 씨가 허가를 받아 소금을 생산하여 부산진시장은 물론이고 영도까지 가서 소금을 팔았다. 1946년에 당시 창궐했던 콜레라로 왕병연 씨가 사망하여 경영이 어려워지자 이규정 씨가 인수를 받았다. 그 소금도 1970년대까지 생산하다가 동국제강 등이 바다 앞을 막는 바람에 택지로 개발되어 사라졌다.

명지도와 용호동 외에도 소금을 구었던 곳이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노리(老里), 전포리, 장림리, 부산포, 범일동의 소금을 굽던 마을이 있었다. 장림에는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들었던 가마가 있었고, 범일동 앞바다에서 소금을 굽던 마을이라 하여 생긴 ‘소고마을’이 있었다.

부산에서 생산되었던 소금의 생산량은 대한제국 당시 간행된 ‘염업 조사’에서는 명지면의 염전 수가 총 37개이며, 염전 면적은 82.6정(町), 생산량은 3만7287석(石)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0년 발간된 조선총독부의 재정통계 연보에 의하면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년 당시 이곳 분포의 연간 제염량은 44만4200근으로 집계되어 있다.

지금은 소금을 적게 먹게 되고 천일염의 생산으로 전오염으로 소금을 생산하던 용호동과 명지의 소금은 사라졌지만 넓은 염전과 동이, 간수를 주물 솥으로 졸여 생산하던 하얀 소금은 추억 속에 있다. 모래 위에 하얀 메밀꽃이 핀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마음속에 핑크빛이 도는 하얀 보석으로 그리면 우리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여름이 되면 섶자리에 가서 수영하려고 용호동 고모집에 자주 놀러 갔다.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 후에 용호동 염전에서 일을 한 고모부 왕병연 씨와 박두상 씨가 염전허가권을 얻어 소금을 생산하다가 콜레라로 작고하시는 바람에 고모 혼자 염전을 운영하지 못해 이규정 씨에게 운영권을 넘겼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모래밭에 뿌려두면 하얗게 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것을 다시 녹여 가마솥에서 부어 끓이면 하얀 결정체가 생성되는데 연한 핑크빛이 보인다고 하여 이를 자염(紫鹽)이라고 했다. 과거 명지도나 분개(용호동)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국내에서 제일 맛이 있는 소금이었다. 이 소금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생산되는 소금이나 천일염에 비하여 높은 값으로 거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개인이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으나, 좋은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국가에서 통제하였다. 소금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게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부산장, 동래장, 구포장이나 하단장이나 영도까지 소금을 이고 가서 팔기만 하면 바로 현금화할 수 있었다. 일제는 자칫 독립자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닷가의 토지를 국유지로 삼아 누대에 걸쳐 그곳에서 소금을 만들어 왔다고 할지라도 염전 운영을 한국인들에게서 빼앗아 일본인들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용호동 염전의 경우에 용호동 주민들의 염전을 빼앗고 더 넓게 하여 노일전쟁에 참전했던 시라이시(白石馬太郞) 형제 등에게 넘겼던 것이다. 우리 주민들은 그들이 만든 소금을 비싸게 사 먹어야 하니 일종의 일제의 수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염전은 길가에 있어 고모집을 오가며 소금을 만드는 광경을 다 볼 수 있었다. 여름날 일조량이 좋을 때 염전을 따라 걸으면 보석처럼 하얗게 꽃이 핀 메밀밭을 볼 수 있었다. 달 밝은 날에 염전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염전가부터 시작하여 길을 따라 노랗게 꽃이 핀 달맞이꽃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지금은 염전과 버스종점이 있었던 곳은 용호시장과 아파트가 들어섰고, 요즘 이곳에 2000원에 팔고 있는 ‘할매 단팥죽’집이 유명한데, 이곳 염포에서 소금을 굽던 일꾼들은 어디에 갔는지 세월은 무상하고, 신작로를 건너 이기대 입구에선 염전을 설명하는 입간판만이 홀로 서서 그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출처: 일간리더스경제신문

[관련기사] 부산의 옛 고갯길

 

부산의 옛 고갯길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는 부산은 산들이 바다를 감고 길게 뻗은 도시이다. 지리적으로 산과 산 사이에 마을이 있어 이들이 서로 교류를 하려면 고개가...

leaders.asiae.co.kr

김효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posted by bluewa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