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수필순례] 김소운 - 특급품
일어(日語)로 '가야'라고 하는 나무 - 자전에는 '비(榧)'라고 했으니 우리말로 비자목이라는 것이 아닐까. 이 비자목으로 두께 여섯 치, 게다가 연륜이 고르기만 하면 바둑판으로는 그만이다.
오동으로 사방을 짜고 속이 빈 - 돌을 놓을 때마다 떵떵 하고 울리는 우리네 바둑판이 아니라, 이건 일본식 통나무 기반(碁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자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두세 판국을 두고 나면 반면(盤面)이 얽어서 곰보같이 된다. 얼마 동안을 그냥 내 버려 두면 반면은 다시 본디 대로 평평해진다. 이것이 비자반의 특징이다.
비자를 반재(盤材)로 진중(珍重)하는 소이(所以)는, 오로지 유연성을 취함이다. 반면(盤面)에 돌이 닿을 때의 연한 감촉 - , 비자반이면 여느 바둑판보다 어깨가 마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흑단(黑檀)이나 자단(紫檀)이 귀목(貴木)이라 해도 이런 것으로 바둑판을 만들지는 않는다.
비자반 일등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반재며, 치수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일급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나,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품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일급이 2천원(돌은 따로 하고) 전후인데, 특급은 2천 4,5백원,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키는커녕 오히려 비싸진다는 데 진진(津津)한 묘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치 않은 불측(不測)의 사고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 된다. 그 균열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木枕)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갈라진 균열 사이로 먼지나 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단속이다.)
1년, 이태, 때로는 3년 까지 그냥 내 버려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동안에 상처났던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대로 유착(癒着)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긴다.
비자의 생명은 유연성이란 특질에 있다. 한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 힘으로 도로 유착, 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라 특질을 실지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 증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감이 될 뻔했던 불구 병신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 내면 되레 한 급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이것을 인생의 과실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다.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매양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다. 과실에 대해서 관대해야 할 까닭은 없다. 과실은 예찬하거나 장려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치 않는다'고 양언(揚言)할 것이냐? 공인된 어느 인격, 어떤 학식, 지위에서도 그것을 보장할 근거는 찾아내지 못한다.
어느 의미로는 인간의 일생을 과실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접시 하나, 화분 하나를 깨뜨리는 작은 과실에서 일생을 진창에 파묻어 버리는 큰 과실에 이르기까지 여기에도 천차만별의 구별이 있다. 직책상의 과실이나 명리(名利)에 관련된 과실은 보상할 방법과 기회가 있을지나, 인간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과실도 있다. 교통사고로 해서 육체를 훼손하거나, 잘못으로 인명을 손상했다거나 -.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과실이 아니다. 애정 윤리의 일탈(逸脫), 애정의 불규칙 동사, 애정이 저지른 과실로 해서 뉘우침과 쓰라림의 십자가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가려는 이가 내 아는 범위로도 한둘이 아니다. 어떤 생활, 어떤 환경 속에도 카츄사가 있고, 호손의 '주홍글씨'의 주인공은 있을 수 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 개개의 인품과 교양, 기질에 따라서 그 십자가에 경중(輕重)의 차가 있다는 것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윤리적 과실을 범한 한 부인이 식음을 전폐하다 굶어 죽었다는 예화를 들은 바 있다.)
이렇게 준엄하게, 이렇게 극단의 방법으로 하나의 과실을 목숨과 바꾸어서 즉결처리해 버린 그 과단, 그 추상열일(秋霜烈日)의 의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의를 표할 뿐이다. 여기에는 이론도 주석도 필요치 않다. 어느 범부( 凡夫)가 이 용기를 따르랴! 더욱이나 요즈음 세태에 있어서 이런 이야기는 옷깃을 가다듬게 하는 청량수요, 방부제이다.
백 번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 하나의 여백을 남겨두고 싶다. 과실을 범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가 있다 하여 그것을 탓하고 나무랄 자 누군인가? 물론 여기도 확연히 나누어져야 할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제 과실을 제 스스로 미봉해 가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목숨을 누리는 자와, 과실의 생채기에 피를 흘리면서 뉘우침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와 -. 전자를 두고는 문제삼을 것이 없다. 후자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죽음이란 절대다. 이 죽음 앞에는 해결 못할 죄과가 없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선택, 일급품 위에다 '특급품'이란 예외를 인정하고 싶다. 남의 나라에서는 채털리즘이 논의된 지도 오래다. 그러나 우리들은 로렌스, 스탕달과는 인연 없는, 백 년, 2백 년 전의 윤리관을 탈피 못 한 채 새 것과 낡은 것 사이를 목표 없이 방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쪽의 가부론(可否論)이 아니다. 그러한 공백(空白) 시대인데도 애정 윤리에 대한 관객석의 비판만은 언제나 추상같이 날카롭고 가혹하다. 전쟁이 빚어 낸 비극 중에서도 호소할 길 없는 가장 큰 비극은, 죽음으로 해서, 혹은 납치로 해서 사랑하고 의지하던 짝을 잃은 그 슬픔이다. 전쟁은 왜 하는 거냐? '내 국토와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 국토는 왜 지키는 거냐? 왜 자유는 있어야 하느냐? - '아내와 지아비가 서로 의지하고, 자식과 부모가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떳떳하게,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이다. 그 보람, 그 사랑의 밑뿌리를 잃은 전화(戰禍)의 희생자들-, 극단으로 말하자면,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그 희생이 바로 그 당자에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은 남편이, 죽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전쟁 미망인, 납치 미망인들의 윤락(淪落)을 운위(云謂)하는 이들의 그 표준하는 도의의 내용은 언제나 청교도(淸敎徒)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채찍과 냉소(冷笑)를 예비하기 전에, 그들이 굶주린,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될 말이다. 신산(辛酸)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절조(節操)와 용기는 백 번 고개 숙여 절할 만하다. 그렇다하기로니, 그 공식, 그 도의 하나만이 유일무이(唯一無二)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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