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경제 포커스] 동아시아 패권전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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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직원들에게 가끔 허를 찌르는 질문을 잘 던지던 경제부총리가 있었다. 한번은 “아세안(ASEAN)이 뭐의 약자지”라고 물었다. 부하 직원이 답하길 “아세안이 아세안 아닙니까. 아시아 국가들 아닙니까”라고 했다. 그 직원은 되게 혼났다.
아세안은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이다.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의 약자다. 모두 10개국이다. 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브루나이·라오스·미얀마·베트남·캄보디아. 이들 10개 나라가 아세안이다. 한국이나 일본, 중국은 여기에 없다. 물론 인도 파키스탄 같은 나라도 없다.
지난 4월11일 태국의 휴양지인 파타야에서 데모대가 회의장을 난입하는 바람에 회의 무산됐던 바로 그 모임이 ASEAN+3다. 아세안에다가 3개 나라를 합친 회의다. 여기서 +3는 한국, 중국, 일본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교전을 감상하려면 이 ASEAN+3회의체를 잘 이해해야 한다. 한국이 아시아 외교를 잘 하기 위해서도 이 ASEAN의 실체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자칫 멍하게 있다가는 한방 얻어터지기 십상이다.
기본적으로 ASEAN국가들은 좀 못사는 나라들이다. 10개국의 GDP를 다 합쳐봐야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50명 정원인 학급이 있다면 30~40등 하는 아이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힘 좀 써보겠다고 그룹을 만든 게 ASEAN이다. 일본 중국 등 강대국이 있지만 ASEAN+3 회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동남아국가들이다. 그들이 늘 호스트를 한다. 지금까지 모두 12차례 회의가 열렸는데 모두 아세안국가에서 개최를 했다.
회의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첫째 날 ASEAN 정상회의를 한다. 동남아 10개국 자기들끼리 일단 만나 현안을 논의한다.
그 다음 날 오전께 한, 중, 일 한나라씩 부른다. 한-아세안 정상회의, 중-아세안 정상회의, 일-아세안 정상회의를 한다. 각개격파 작전이다.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짐작이 간다. 좀 점잖지 못한 표현을 쓰자면 이간질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본과의 회의에서는 “중국이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려고 하는데 너희는 뭘 할거냐.” 이런 걸 요구한다. 중국과의 회의에서는 그 반대다. 한국과 만나면 “당신은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여력이 없지만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오후에 드디어 본게임을 한다. ASEAN+3 정상회의. 점심 한 끼 우아하게 먹고 다 짜여진 각본에서 회의하고 기자회견한 뒤 기념사진 찍는다. 이번 파타야 회의일정도 그렇게 짜여져 있었다.
여기서 잠시 ASEAN+3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ASEAN의 모임이 있었다. 그 중 동남아 지역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이었다. 1997년, 그러니까 외환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맹공을 펼쳤던 바로 그 인물이다.
이 때 일본이 ASEAN에 주목했다.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은 야망을 품은 일본으로선 중소국들의 모임인 ASEAN은 매력적인 그룹이었다. 그래서 199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ASEAN 회의가 열릴 때 일본이 “나도 거기 좀 가면 안돼”하고 마하티르 수상에게 추파를 던진다. 마하티르는 “이게 웬떡인가” 싶었다. 안 그래도 동아시아의 리더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일본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니 드디어 호기가 온 것이었다. 마하티르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일본 이외에 중국과 한국도 오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리하여 역사적인 ASEAN+3 회의가 태동한다. 이게 1997년 12월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놓고 볼 때 첫날 ASEAN끼리 정상회담을 하고 그리고 별로도 +3개국을 끼여 그 다음날 정상회담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프레임이다.
따라서 정말 정신 차리지 않고 있으면 큰일 날 모임이 이 ASEAN+3다. 아세안국가들은 한, 중, 일 3국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하고 한, 중, 일은 거꾸로 아세안 국가들의 환심을 사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향후 아시아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이들의 협력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그동안 공을 많이 들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외교는 미국 일변도라서 아시아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과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제 목소리도 못내고 그냥 13개 참가국의 하나로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이런 빈약한 아시아 외교를 환골탈태하자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소위 신(新)아시아 구상이다.
올해는 한국이 아세안과 관계를 수립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오는 6월1~2일 제주도에서 한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를 연다. 일본과 중국이 빠지는 회의다. 물론 이런 형식의 회의를 일본은 6년 전, 중국은 3년 전에 한번 했다. 그렇더라도 아세안 10개국을 초청해 별도의 모임을 갖는 첫 번째 회의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매일경제 전문기자
- 손현덕 기자 (ubsohn@mk.co.kr)
매일경제신문 21년 차 기자로, 주로 경제 금융을 취재했으며 워싱턴 특파원, 청와대 출입을 거치면서 정치 외교 국제 문제도 다룸
유통경제부장, 중소기업부장, 국제부장, 경제부장을 거쳐 지금은 정치부장을 맡고 있음
<부자나라 가난한 나라> 등 10여권의 책을 출간
손현덕의 백그라운드 브리핑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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