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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8. 21:16 역사와 유물

[스크랩] 한국전통건축순례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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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소재지 : 경북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

연대 : 682년 창건.

특징 : 구릉 2탑형 가람배치.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 변하는 과도형. 중문, 금당, 강당이 일렬 축선상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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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

소재지 : 경북 월성군 강동면 양동리 연대 : 16세기초

규모 : 1동 25칸.

특징 : 자연미와 유교적 금욕성. 사랑채는 2칸 대청에 방 두칸, 행랑채는 2칸 부엌에 방 3개, 안채는 6칸 대청을 중심으로 대칭구성.

구조특징 : 익공계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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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소재지 : 전남 승주군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특징 : 1626년 임경업장군에 의해 기본골격이 갖추졌다고 전함. 관에 의해 계획된 전형적인 예. 도로체계는 T자형으로 동문과 서문을 연결. 현재 150호의 민가(18-20세기 건축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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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소재지 :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특징 : 보물 291호

조선 인조11년, 고종2년 중건

형식 : 정면3간, 측면3간, 단층 팔작지붕. 다포계. 꽃살무늬 문짝. 내 5출목, 외 3출목의 공포.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이곳에 절을 세워 큰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하였는데 그 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아 오던 중 조선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했고, 고종 2년 관해스님이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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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다산초당은 유배 18년 동안의 후기인 1808년 봄부터 10년을 지낸 초당이었으나 누후로 인해 붕괴 된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냈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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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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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사적 제170호(1969. 5. 28)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선조7년(1574) 서원을 건립하여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인선조8년(1575)에 한석봉이 쓴 편액을 국왕이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이르러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은 상덕사, 전교당, 전사청, 한존재, 도재, 서재, 광명실, 장판각, 도산서당, 역락서재, 농운정사, 진도문, 유물전시관인 옥진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와가로써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전면에는 반칸 후퇴하여 평주 4개를 설치하였으며, 평면 구성은 매우 단순하여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마루방을 꾸미고 신위를 모셨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였고 마루 위에는 여러 겹의 왕골자리를 깔아 신성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전교당은 유생들이 강학을 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좌측면은 2통 간 온돌방으로 구성하여 한존재라 이름을 붙이고 나머지 6칸은 모두 우물마루로 대청을 구성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원생들이 기숙하면서 강학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에 대향배치되어 있으며 각 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도산서당은 원래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였으나 후에 좌우퇴간을 증설하여 현재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동서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이며 광명은 수많은 책이 나에게 서광을 준다 라는 뜻이고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광명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2층 누각 건물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1,300여종에 5,000여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장판각은 서원의 출판소이며 퇴계 선생 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 12곡, 선조어필 등의 목판각이 37종 2,790장 보관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전사청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여 두는 곳으로써 제수청과 주고가 있다. 이 건물은 동서의 두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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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봉사(奉祀)한 옥산서원(玉山書院) 뒤편에 있는 별채인데,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대청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청 앞면에는 문짝을 달았던 문설주가 남아 있다. 기둥은 두리기둥인데, 공포는 이미 초익공(初翼工) 계통의 구성과 같으며, 기둥 위에 얹은 기둥머리로 직접 대들보(大樑)와 도리를 받치고 있다. 그러나 기둥머리에 꽂힌 첨차(墅遮) 형태는 아직 주심포집 건축의 전통이 남아 있다.

대청의 연등천장에서 볼 수 있는 대들보와 그 위의 마루보는 제법 형식을 갖추어 다듬어 놓았으나, 양자 사이에 받쳐져 있는 대공(臺工)은 양봉형(樑奉形)의 간단한 부재이다. 대청과 양쪽 방과의 경계에 배치된 양재(樑材)는 인방(引枋)보다 좀 굵은 정도의 재목을 썼으며, 그 아래는 기둥머리를 얹은 모기둥(方柱)이 받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대공을 동자주(童子柱)로 대신하게 하고, 회벽(灰壁)을 쳐서 공간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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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황가

·중요민속자료 제 104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1747년 처음 세워졌으며, 박팽년의 11대손 성수가 이해에 이곳에 초가를 짖고 자신의 호를 따 삼가헌이라 했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이 1783년 묘골에서 이곳 파회로 분가한 다음 1809년 초가를 헐고 정침을 지었으며, 18년 뒤인 1826년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채인 하엽정은 이보다 더 늦은 1874년 광석의 아들 규현에 의해 지어졌다.

살림채와 별당채로 구별됨. 살림채는 문간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곳간채로 나누어지고, 별당채는 하엽정과 인공연못으로 구성. 살림채와 별당채은 담장으로 나누고 일각대문으로 연결됨.사랑채는 바깥 사랑과 안사랑으로 구성, 앞면의 바깥사랑은 2간의 사랑방과 2간의 대청이 이어져 있고, 왼쪽 뒷면의 안사랑은 각각1간의 마루방과 온돌방이 맞붙어 있다. 사랑방 앞면 오른쪽으로는 툇마루에 연결된 1간 짜리 동상방이 있는데 원래 사랑의 심부름을 하는 하인이나 어린 머슴이 쓰던 방.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중문채를 지남.

안채는 왼쪽 익부가 짧은 튼'ㅁ'자형 건물. 몸체에 있는 2간의 안방과 2간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이 부엌이고 오른쪽에 건넌방과 갓방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이 사용하는 공간이고, 건넌방은 주로 며느리가 사용하던 방, 갓방은 안손님들이나 출가한 딸들을 위한 방. 안채는 사랑채보다 지반이 높음.

하엽정은 원래 이곳에 있던 파산서당을 개축한 것으로 일렬 4간 방에 한간 누마루를 내어 단 ㄱ형 정자이다. 누마루는 바닥과 천장의 높이가 2m 남짓밖에 되지 않고 너비도 사방 한 간에 지나지 않지만 앞에 펼쳐진 연못의 풍경을 즐기기엔 모자람 없는 공간이다. 연당은 본채를 지을 때 필요했던 많은 흙을 파낸 자리를 손질하여 만든 것이라 하는데, 세로로 긴 장방향의 못 가운데는 동그란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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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팔상전

5층의 높은 건물로 5층 옥개는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위에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이다. 건물은 각면에 돌계단을 가진 비교적 낮은 석조기단위에 섰으며,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돌리고 공포의 헛첨자는 기둥머리에 꽂혔다. 공포는 이출목(二出目)으로 출목의 끝은 외목도리를 받치나, 점차 형태는 조선 말기의 매우 장식적인 파련각을 가졌다. 2·3·4층의 공포는 모두가 기둥위에 놓이기는 하나 다포(多包)집 양식의 공포이며 5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평방(平枋)을 돌려 완전한 다포집 양식이 되었고,공포는 주두위에만 있으나 형태는 역시 다포집 양식의 것이다.

이와같이 1층은 주심포(柱心包)이고, 2층이상은 다포집 양식의 포작을 가졌다는 것은 금산사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나 쌍봉사대웅전(雙峰寺大雄殿)등 3층 건물에 잇어서도 보지 못하는 특수한 수법이다. 내부 가구는 평면 가운데에 심주가 있고 모서리 안쪽에 귀고주를 세웠으며, 2층의 모서리기두은 1층변주와 귀고주를 연결한 퇴보위에 세워진다. 3층 역시 귀고주와 2층 변주를 연결한 퇴보위에 그 기둥을 세우고 4층 변주는 이 대들보 위에 서게되었다. 심주는 기단 윗면 심초(心礎)위에서 5층 옥개 밑 중도리까지 이른다 .이러한 가구방식은 금산사미륵정의 가구방식과 같은 계통의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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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현재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의 사적지 면적은 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담장과 그 주위를 통틀어 6,825평에 이른다. 경내 건물로는 존덕사·입교당(立敎堂)·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장판각(藏板閣)·동재(東齋)·서재(西齋)·만대루(晩對樓)·복례문(復禮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병산서원의 건물 배치
서원의 기본 배치는 성균관 문묘나 고을의 향교들처럼 남북 일직선상에 외삼문·누각·강당·내삼문·사당을 놓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놓으며, 강당 뒤쪽에 전사청과 장판교를 두었다. 그리고 외곽에는 이 모두를 감싸는 낮은 돌담을 두르고, 사당공간에도 특별히 담을 둘러 출입을 엄히 통제하였다. 병산서원은 이 기본 배치를 충실히 살리면서 살짝 축을 비껴 사당을 두었는데, 전체적인 조화로움은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다른 군더더기가 없으니 엄격하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공간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만대루(晩大褸)


문루(門樓)인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고자(庫子)가 개좌와 파좌를 외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기와집에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만대루의 만대(晩對)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다. 병산서원의 핵심은 바로 이 만대루이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까맣게 잊게 할 만큼 사람을 취하게 한다.
자연스런 형상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달리 위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와 기둥들이 정제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꼿꼿하고 청정한 유학의 맥이 동시에 느껴지는 건물이다. 그리고 병산서원처럼 마당의 기능이 약하고 누마루의 기능이 강화된 서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입교당(立敎堂)
이 집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그 이름에 걸맞는 강당으로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한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기와집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樑)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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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리 초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중요민속자료157호

이금재가옥

득량면 오봉리 228번지

전통건조물

중요민속자료159호

이용욱가옥

득량면 오봉리 243번지

전통건조물

중요민속자료160호

이식래가옥

득량면 오봉리 414번지

전통건조물

중요민속자료162호

열 화 정

득량면 오봉리 230번지 전통건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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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경상북도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天燈山)기슭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孤雲寺의 말사이다. 682년(신문왕 2)의상이 창건한 사찰로서,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이 도력으로 종이로 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종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후 의상은 이 절에다 華嚴講堂을 짓고 神琳등의 제자들에게 傳法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의상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각기 독립된 7동의 건물이 구릉형의 터 위에 비교적 짜임새있게 배치된 봉정사는 신라사찰다운 웅대한 모습은 볼 수 없으나 동북쪽 약 150m거리에 있는 영산암과 서북쪽 약 400m거리의 지조암등 부속암자를 가진 안동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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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 만세루, 우화루, 요사채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밖에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경판고)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부속암자로는 퇴락한 영산암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이 있다.

(1) 극락전
고려 중.후기의 목조 佛殿. 국보 제15호. 197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1625년작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때 能仁大德에 의하여 창건되고 고려이후 圓鑑.安忠.普照.信敬.密巖등의 스님들에 의하여 무려 여섯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 지정 23년(공민왕 12년.1363년)에 용수사의 大禪 축담(竺曇)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적어도 고려중기인 12-13세기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가공석 및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로 지은 柱心包系 맞배지붕 건물이다.가구는 기둥 윗몸에 昌枋을 두르고 주두를 놓은 후 그 위에 공포를 짜올려 구성하였다. 첨차는 도리바향으로든 보방향으로든 행공첨차를 쓰지않았고, 출목의 첨차로 外目道里를 받치고 이로써 지붕 전체를 받치게 하였다. 건물 바깥쪽으로는 정면 가운데 칸에 판장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光窓을 내었으며 그밖의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아 감실형(龕室形)건물을 구성하였다. 정면 창방 위에는 산 모양으로 만든 복화반대공(覆花盤臺工)을 매 칸마다 얹어서 뜬장혀를 받쳤다. 기둥머리에 짜올린 拱包 가운데 도리방향으로 놓은 첨차로 위 뜬장혀를 받치고, 다시 뜬장혀 위에 놓은 첨차로 柱心道里와 외목도리를 받쳤다. 측면의 架構는 기둥 높이에 변화를 주어 귀기둥을 平柱로, 그 안쪽의 두 기둥을 약간 높은 高柱로 하고, 가운데 고주는 마루도리까지 올라가게 하였다. 여기에 따라 보의 높이에도 변화를 주었다.


기둥머리 위에는 3겹으로 포갠 첨차와 장혀 및 주심도리가 길게 튀어나온 채 측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宗中道里및 외목도리와 더불어 樑架를 이루고 있다.한편, 마루도리와 주심도리를 잇는 八자형 솟을합장을 둔 것이 특색이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方塼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佛壇을 설치하였다. 불단위에는 불상과 佛畵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뒤 多包式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닫집을 마련하였다. 대들보 위에 2개의 복화반대공을 놓아 덧보를 받치고 이 위에 종보를 놓았고, 종보 위에는 다시 대들보 위 복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의 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받았다. 종도리 양 옆에는 소슬합장을 두어 측면으로 힘을 전달하도록 처리하였다. 이 건물이 지닌 몇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古式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경상북도 의성군 탑리의 오층석탑, 불국사 청운교 돌난간의 기둥, 전라남도 화순군 쌍봉사의 철감선사탑 기둥 등은 봉정사 극락전의 가구형식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비교자료가 된다.

(2) 대웅전
조선 초기의 불전. 보물 제55호.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로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이다. 자연석의 막돌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기둥은 柱間 크기에 비하여 얕은 감이 있으나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기둥 위에는 昌枋과 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는데, 주간이 넓고 5包作이라서 包壁이 넓게 보인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出目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牛舌形)이며 내부쪽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짜였는데 그 수법이 고려말.조선초의 양식을 잘보여주고 있다. 柱間裝置는 전면에 모두 창호를 달고, 후면에도 3칸 모두 문비(門扉)를 설치하였으며, 측면은 양 挾間에 창호를 달았다. 가구는 一古柱九樑架인데, 천장이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어 상부 가구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지붕은 팔작(합각)으로 비교적 처마깊이가 깊고, 처마는 겹처마로서 네 귀의 추녀끝에는 活柱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全面에 깔고, 내부 고주를 이용하여 후불벽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안치하였다. 단청은 조선 초기 기법과 색채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고색창연하다. 그 예가 많지 않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가구수법을 잘 보여주는 유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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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이 집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유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응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롬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던 모양이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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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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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은 동향이고 배향의 중심공간인 사당은 남향이며, 기타의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잡고 있어 곧 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 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높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 위에 놓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층쌓기로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고석들을 바른층쌓기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초석들 위에는 방주(方柱)들을 세웠는데, 전면 양측간의 두 개 기둥, 후면 양측간의 귓기둥으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첨차를 놓아 몰익공식으로 하였는데, 첨차의 모양은 단순하다. 특히 뒷면 귓기둥에서는 헛첨차 모양의 것이 돌출되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걸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랴응로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건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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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34년(1308년)에 건축된 고려말의 주심포계 건축이다. 1937년 건물을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墨書名)에 의해 건축연대를 알 수 있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축 중에서 건축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제작연대가 뚜렷하고 구조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건축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1962년에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높다랗게 쌓아올린 기단 위에 건축되었으며, 기단 양쪽에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대략 북좌남향(北坐南向)하고 있으며, 평면은 정면3칸, 측면4칸이다. 정면은 중앙의 어간이 4.681m, 좌우 협간이 각 4.742m로 양 협간이 약간 넓지만 거의 같은 정도의 간살을 이루고 있다. 양측면은 중앙에 방형단면의 기둥(角柱)를 세우고 그 양 옆으로 기둥을 세워 4칸으로 구획하였다. 중앙의 두 칸은 2.676m, 양쪽 끝 칸은 2.712m로 정면과 마찬가지로 거의 동일한 길이로 칸살을 설정하였다. 내부에는 전후로 각 두 개씩의 내진고주를 세워 전후퇴칸을 형성하였다. 후면 내진주 앞쪽으로 불단을 두어 불상을 안치하였다. 종단면 가구는 9량(주심도리와 외목도리는 하나로 취급)이며, 전후로 퇴칸이 있다.

초석은 자연석 상면을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다. 또한 초석들 중에는 상면에 기둥이 놓일 자리(柱座)를 마련한 것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연석이 그대로 외부로 노출되어 깔끔하게 다듬어 쌓은 기단, 그리고 기둥에서 시작되는 그 상부의 세련된 가공수법과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석 주춧돌 상부에 기둥을 세우는데는 그랭이질이라고 하는 수법이 사용되었다. 그랭이질은 초석 위에 기둥을 올려놓으면서 기둥 밑둥을 초석상면에 맞추어 정밀하게 깎아내는 기법으로 매우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전통기법 중의 하나이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가운데를 배부르게 한 배흘림(entasis)기둥이다. 흘림의 정도가 강하여 강릉객사문에 사용된 배흘림기둥에 다음가는 비례를 지니고 있다. 기둥의 직경은 높이에 비해 1/10-1/12 정도가 보통이지만 약 1/7 정도로 상당히 굵고 튼튼한 비례이다. 강한 배흘림과 높이에 비해 굵게 한 직경으로 인하여 강직한 인상을 주고 있다. 정면에서 칸 사이가 넓은 것을 고려한 비례라고 생각된다.

기둥상부에는 이웃한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창방을 끼웠다. 창방은 기둥상부를 안정되게 잡아주는 기능을 한다. 대웅전에 사용된 창방은 기둥 상부 직경의 약 1/3 정도의 폭으로 직사각형 단면을 이루고 있는데, 창방의 폭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굵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창방이 귓기둥 밖으로 돌출한 부분(창방뺄목)은 초각을 하여 장식하였다.

대웅전은 기둥상부에만 공포가 설치된 주심포계 건축이다. 공포는 기둥상부에 창방과 직각으로 헛첨차를 끼우고 기둥 위에는 주두를 올려놓았다. 주두 위에 첨차와 살미를 十자로 결구한 위에 보와 뜬창방을 十자로 결구하였다. 보머리에는 출목첨차를 보와 직각으로 결구하였다. 이 위에 다시 주심에는 첨차와 운공(雲工)을 직각으로 결구하고 제2출목선상에는 단장혀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공포의 구성은 외2출목으로 내부에는 출목이 없이 보를 받치고 있는 보아지형 초각되어 운궁형(雲宮形)을 이루고 있다. 살미와 첨차는 그 형태가 서로 다르다. 살미와 첨차는 서로 十자형으로 결구되어 주두, 소로와 더불어 공포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부재이다. 살미는 보방향, 첨차는 도리방향으로 사용되는 부재이다. 살미의 외단과 보머리는 모두 쇠서(牛舌)형으로 초각하여 장식하였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의 공포구조만을 살펴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과의 비교검토를 통해 그 건축사적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시대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강릉 객사문, 성불사 극락전 및 응진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부석사 조사당, 심원사 보광전 등 열 손가락 안에 들어온다. 이 중 성불사 극락전과 응진전, 그리고 심원사 보광전은 북한 땅에 있어서 가 볼 수 없다. 9개의 건축물 중에서 8개는 모두 기둥위에만 포를 구성한 주심포 건물이며, 심원사 보광전만이 기둥 사이에도 포작을 둔 고려시대의 소위 다포계 건물이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물은 모두 주심포계 건축이다. 우리나라에 주심포계 건축이 언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것은 확실하다. 고려시대의 주심포계 건축이 중국 송(宋)나라 때 들어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전후의 건축적인 상황으로 보아 이러한 주장을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축물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되고 있는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현재 13세기초의 건축으로 추정)이다. 봉정사 극락전과 양식을 같이하는 건축물의 부재가 안압지에서 출토되었다. 이미 신라 통일기에 주심포계 건축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화순 쌍봉사에 있는 철감선사부도(868년)와 남원 실상사 백장암의 삼층석탑(9세기) 등의 석조물에는 기둥과 창방, 그리고 기둥 상부의 공포 등이 표현되어 있어서 신라 통일기의 건축양식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배흘림기둥과 굽은 곡면이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가 묘사되어 있다. 첨차는 양측면을 직절(直切)하고 하부는 교두형이라고 하는 곡면으로 깎아낸 모습이다. 봉정사 극락전의 공포에 사용된 주두와 소로는 굽이 곡면이고 굽받침이 없는 형으로 신라 통일기의 건축양식과 동일하다. 또한 첨차와 살미는 동일한 형태로 단부를 직절한 것은 신라 통일기의 첨차와 동일한 모습이다. 다만 첨차 하부를 연화두형(蓮花頭形)으로 깎아 장식한 것만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봉정사 극락전은 신라 통일기의 건축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주심포계 건축은 중국 송나라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신라 통일기부터 존재하던 건축양식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봉정사 극락전을 이은 건축물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현재 13세기말로 추정).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르러 고려시대 주심포계 건축양식은 보편적인 양식으로 정착하게 된다.

앞서의 봉정사 극락전과 구분되는 차이점은 주두의 굽이 곡선이지만 굽받침이 있으며, 첨차의 양단이 직절이 아니라 사절(斜切)되어 있다는 점이다. 살미와 첨차는 동일한 형태로 하부는 봉정사 극락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연화두형으로 초각하여 장식하였다. 고려시대 주심포계 건축물에 사용된 주두는 대부분 굽을 곡면으로 깎고 굽받침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과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굽을 사절하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첨차는 거의 부석사 무량수전에 사용된 첨차와 마찬가지로 단부를 사절하고 그 하부는 연화두형으로 초각하였다. 따라서 곡선의 굽과 굽받침이 있는 주두, 단부를 사절하고 하부를 연화두형으로 초각한 첨차가 고려시대 주심포계 건축의 일반적인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살미는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살미는 보방향으로 놓이는 부재로 첨차와는 十자형으로 결구되어 공포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부재이다. 살미가 첨차와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건물이 수덕사 대웅전이다. 수덕사 대웅전의 살미는 외부가 쇠서(牛舌)형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보머리 역시 살미와 같은 쇠서형으로 깎았다. 이러한 쇠서형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보머리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무량수전의 보머리는 끝이 위를 향하고 있는 갈고리 모양으로 초각되어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살미에 초각된 쇠서형은 성불사 극락전과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는 더욱 발전하여 끝이 더욱 뾰족해지고 장식적으로 발전한다. 수덕사 대웅전에 사용된 살미의 내부는 보를 받치고 있는 보아지형으로 초각이 되어 외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를 운궁형(雲宮形)이라고 부르는데, 역시 성불사 극락전과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초기에 만들어진 무위사 극락전과 도갑사 해탈문의 살미가 형태적으로 성불사 극락전이나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을 닮아 계승되어 나감을 볼 수 있다. 살미의 모습으로 볼 때 수덕사 대웅전이 고려전기와는 다른 고려후기의 주심포계 형식을 시작하는 구분점이 됨을 알 수 있다. 주두의 모양은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주두는 굽이 직선으로 사절되고 굽받침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덕사 대웅전이 이전의 건축물, 즉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과 구분되는 큰 차이점은 헛첨차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헛첨차는 기둥 상부를 보방향으로 관통하면서 창방과 직교하여 결구되는 부재이다. 기둥 상부에 놓이는 공포를 기둥과 한 몸으로 안정되게 결구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듯 하다. 헛첨차의 외부는 단부를 사절하고 하부를 연화두형으로 초각하여 첨차와 같은 형태로 하였다. 그러나 내부는 살미와 더불어 보아지형으로 초각하여 운궁형을 이루고 있다. 헛첨차는 이후 강릉 객사문, 성불사 극락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부석사 조사당 등 고려시대의 주심포 건축에서 보편화되어 사용된다. 이 점에서도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전기의 주심포계 건물형식과는 다른 고려후기의 주심포계 건물형식의 특징이 시작되는 초기적인 건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헛첨차는 창방뺄목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익공계 건축의 시작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 부재라고 생각된다. 또한 헛첨차의 사용은 중국이나 일본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건축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종단면 가구는 평주 내부의 전후로 내고주를 세우고 전후 평주상의 공포 상부에서 내고주의 몸체로 툇보를 끼웠다. 전후 내고주 상부에는 간단한 공포를 구성한 위에 대보를 걸었다. 대보 상부에 화반과 공포를 구성하여 종보를 받도록 하였다. 종보 상부에는 역시 초각을 한 화반형의 대공을 두어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보머리가 공포와 결구되는 부분에서는 보의 단면을 공포부재의 단면과 동일하게 줄여 결구하였다. 보의 단면은 아랫부분을 좁고 윗부분을 넓게 하였으며, 양 측면은 볼록한 곡선형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항아리형으로 만들었다. 단면의 아래와 위를 동일한 폭으로 하면 시각적으로 불안정해 보인다. 사람의 시점이 보의 위치보다 아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부재인 보에 착시교정이라고 하는 세심한 의장적인 처리를 한 것이다. 대웅전의 가구에서 특이한 점은 각 도리 사이로 우미량(牛尾樑)이라고 부르는 심하게 반곡된 부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우미량은 각 도리 사이를 강하게 결속시켜 주는 구조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구조적인 역할을 하는 부재를 장식하여 의장적인 기능으로 승화시킨 고도의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미량은 그 이후 강릉 객사문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사용된다. 조선시대 초기의 건물인 관룡사 약사전에서도 그 구조적인 기능은 다르지만 의장적인 효과가 비슷한 우미량이 사용되었다. 종도리 양 옆에는 종도리를 잡아주는 심하게 반곡된 부재가 사용되었다. 솟을합장이라고 부르는 '&#44097;'자형의 부재이다. 봉정사 극락전에서도 솟을합장이 사용되고 있으나, 수덕사 대웅전과는 달리 직선형이다. 이후 강릉 객사문, 성불사 극락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부석사 조사당 등 고려시대의 모든 주심포계 건축에서도 솟을합장이 사용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솟을합장과 같이 곡선형의 부재이지만 곡선의 곡률은 수덕사 대웅전보다 약하다. 조선시대가 되면 솟을합장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이는 대공의 형식이 판대공을 기본으로 한 종도리를 좀 더 안정되게 받쳐줄 수 있는 부재로 변화되었다는점과 관련이 있다. 솟을합장은 인자대공(人字臺工)과는 구분하여야 한다. 인자대공은 솟을합장과는 달리 종대공을 좌우에서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하부에서 받아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인자대공이 사용된 예는 매우 드물다. 현재 그 최초의 모습은 고구려 때의 고분인 천왕지신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석조이지만 목조와 마찬가지 수법으로 실제 구조적인 역할을 한다. 목조건축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인자대공을 들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양 측면의 가구가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고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내부에서도 가구가 그대로 노출된다. 가구가 노출되는 만큼 가구부재들은 의장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수덕사 대웅전의 가구재는 구조적인 역할과 더불어 의장적인 역할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만큼 많은 공을 들여 가구재를 가공할 필요가 있다. 수덕사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상당한 재량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구조적인 목적을 충족시키면서 그것을 그대로 의장재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재량이 있었다. 고려시대 대부분의 건축물은 수덕사 대웅전처럼 내부가구가 그대로 노출되고 가구재에 의장적인 가공을 한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초가 되면 내부에 천장이 가설되고 지붕의 형식은 팔작지붕이 주류를 점한다. 맞배지붕이라고 하더라도 측면에는 풍판을 막아댄다. 가구재가 외부에 노출되는 비율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때가 되면 천장속에 가려진 가구재들은 거의 의장적인 가공을 하지 않고 거칠게 가공한 상태로 마감을 끝낸다.

내부의 바닥에는 원래 전돌을 깔았으나 현재 우물마루가 설치하여 덮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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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주 소안동시 법흥동

구 분

연 도 중종10년(1515) 형조좌랑(刑曹佐郞) 이낙(李洛)이 건립
중앙선 철도부설 당시 50여칸의 행랑채, 부속채가 철거 - 세칭99칸집

배 치 用자형의 살림채와 별당 군자정(君子亭), 사당으로 구성

중 요 13칸으로 구성된 행랑이 외부에서 규칙적인 입면을 형성하고 내부에는 5개의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있다.
이렇게 단일 건물 내부에 여러개의 마당이 있는 것도 드물지만 그 높이를 다르게 해서 명확한 위계를 둔 것도 특징이다.
안채는 2x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방을 두어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랑채는 2x1칸의 대청에 한쪽은 안채와 이어지는 방을 다른 한쪽에는 한칸짜리 온돌방을 두었다.
이렇게 사랑대청이 조금 작은 듯한 이유는 별도로 군자정이라는 별당을 두었기 때문이다.
안채옆으로 붙어있는 안행랑은 여자노비들이 거처하는 곳인데, 마루 없이 모두 온돌방만으로 구성되었고 부엌일을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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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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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

주 소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구 분 보물 제306호

연 도 조선전기

배 치 하회마을의 중심. 정면4칸 측면3칸, 단층 팔작지붕

중 요 안동 양진당(養眞堂)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형인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의 종택으로 풍산유씨(豊山柳氏)의 대종가이다.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 세웠고 건물 둘레에는 쪽마루와 난간을 돌렸으며 마치 누(樓)와 같은 인상을 주는 별당 건축으로 원주를 사용하고 그 위에는 기포(棋包)가 받쳐져 있다. 기포의 구조는 이익공(二翼工)집과 같은 계통이나 쇠서가 생략되어 간단히 초각(草刻)되었고 기둥의 머리 위에서 좌우 벽면에 뻗은 두공첨차는 모가 나게 꺾였으며 화반(花盤)은 널판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오른쪽 3칸이 대청이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인데 대청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대들보는 통나무를 대강 다듬어서 그대로 사용하였고 종량(宗樑)과 충량(衝樑)도 같다. 양진당이란 당호는 겸암 유운룡의 6대손인 유영(柳泳)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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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주 소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

구 분 사적 제154호

연 도 선조(宣祖)5년(1572)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봉사하기 위해 창건
1574년 사액서원(賜額書院)
임진왜란 병화(兵火)에도 피해없이 보존

배 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무변루(無邊樓)가 있는데 2층 양측 내실과 1층 통문을 갖추었고 모두 원주에 난간을 돌렸다. 문루(門樓) 뒤 중앙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역시 원주를 사용하였다.
좌측은 해립재(偕立齋), 우측에는 양진재(兩進齋)란 협실이 있다.
구인당(求仁堂) 뒤 서북 모퉁이에는 기대승(奇大升)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와 비각이 있고 중앙 뒷편 분장(分墻)된 곳에 사묘(祀廟)인 체인묘(體仁廟)가 있어 내삼문(內三門)으로 통한다. 그 동편에는 경각(經閣) 곧 어서각(御書閣)과 문집판각(文集板閣)이 있어 내사전적(內賜典籍), 회제문집(晦齊文集) 및 판목(板木)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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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사

위봉사에 있는 목조건물. 정면 3칸, 측면 3칸.‘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는 현판 옆에 도광(道光) 18년(1835:조선 헌종 1년)에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 연대는 그 이전일 것이 분명하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가운데에 돌계단을 만들었으며 정면 3칸은 모두 각각 세 짝의 문을 달았다. 이들 문짝 아래 부분에 궁판이 있고 문살 형식은 넉살무늬로 되어 있으며, 세 짝의 문은 처마 밑에 달아매게 만들어졌다. 가구(架構)는 높은 기둥을 사용한 고주(高柱)집 건축의 기본적인 7가량(架樑)이며 대들보는 우직한 느낌을 주나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살리려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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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가

제주도 민간주거양식이 한반도의 주거양식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마당을 중심으로한 구심점 배치와 철저한 별동배치 형식을 들수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한국건축의 특성으로 지적되는 비대칭적 분산배치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사합원(四合院)주택의 배치형이나 평지가람(平地伽濫)에 더 유사하다. 외부공간의 특이성은 올래, 올래목, 마당, 안뒤의 리듬구성을 들 수 있다.

제주의 초가는 자연환경과 가족구조 및 그 생활양식이 반영된 것으로서 그 기본구조는 기둥, 귀틀, 보, 보짓, 내도리, 중보, 중마루, 상마루 등 뼈대를 나무로 만든 후 주위 벽을 굵은 돌로 쌓아 두루고 제주도 전역에서 자생하는 연한 갈대처럼 생긴 띠풀(또는 "새" 라고도 함)로 지붕을 덮은 것이다. 벽은 흙을 발라 붙여 돌담을 단단히 하고 지붕은 띠로 덮은후 직경 5cm의 굵은 밧줄로 바둑판 처럼 얽어 매어 놓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태풍과 바람이 많은 제주의 기후조건에서 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지혜로운 건축기술이라 할 수 있다. 지붕은 1년 또는 2년에 한번씩 덮은위에 다시 덮어 가므로 상마루선이 완만하고 부드러운 선을 이루게 된다. 가옥내부는 3간 또는 4간으로 나뉘어져 방, 마루, 부엌 , 창고 등으로 되어 있다.

제주도의 민가를 살펴보면 하나의 주택 내에서 두 건물에 독립적인 '정지'를 갖는 모습이 종종 보여진다.
'안끄리'라고 하는 살림채내에서도 '정지' 또는 '정재'라고 불리는 부엌이 있으며, '바끄리' 나 '모커리'라고 하는 부속채에도 '정지'를 두는 것이다. 살림채는 주로 부인 부부가 사용하고, 부속채는 아들 부부가 생활하면서 부엌을 따로 쓰고 있다. 이것은 고부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방법으로서 부엌을 분리하였다는 것이다.

부엌의 분리는 취사 단위의 분리, 즉 생활 단위의 분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제주도에서는 분가하지 않고도 세대별로 독립적인 생활 단위를 이루게 하는 방법으로서 부엌을 분리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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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묘

주 소 종로구 훈정동

구 분 국보 227호

연 도 1395년 창건, 임진왜란 중(16세기 말) 소실, 1608년 재건, 이후 수차 증축

배 치 종묘 정전(正殿)은 익공계, 정면 19칸+6칸, 측면 3칸, 홑처마 맞배지붕,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 중 공이 많은 임금(不遷位)과 당대 임금의 4대조까지의 신위를 모시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9칸의 태실(太室)에 왕과 후비(后妃)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그 양 옆에 익실(翼室)각 3칸과 5칸의 날개채가 붙어 국내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이다. 공포는 단순한 익공식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40도에 가까운 급경사로 우뚝 솟아 정전이 종묘 전체의 중심 영역임을 나타낸다. 건물과 기단에는 증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건물 전면에는 주랑이 형성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각 태실의 판문(板門)이 있는데 평소에는 그 위에 발이 걸려 있다. 신위들은 서상(西上)의 원칙에 따라 위계가 높은 조상이 서쪽의 태실에 모셔져 있으며,이 때문에 정전의 증축도 서에서 동으로 이루어졌다. 박석(薄石)을 덮은 월대(月臺)는 공간의 위계를 구분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잇으며, 그 가운데에는 신도(神道)가 지나간다.


수평으로 길게 뻗은 건물 구성과 우뚝한 지붕의 기념비적인 스케일은 보는 이에게 장중함과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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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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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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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국보 제67호로 지정된 각황전은 통일신라시대에 건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석축 위에 조성된 대지에 주축선과 직각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구식으로 잘 짜여진 석조 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팔작지붕 다포집이다. 가구구조 형식은 기둥머리에 창방을 끼고 그 위에 평방을 돌리고 있으며 평방 위에는 기둥 위와 기둥사이에 공포를 올렸고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외이출목으로 되었다. 내부는 맨 위 천장까지 터 있는 통층으로 되었고 초층(初層)은 짧은 퇴보로 안쪽의 고주와 바깥쪽의 변주가 연결되었다. 천장은 고주를 끼워 우물 천장이 가설되었으나 그 주변이 굽어 경사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적은 수법이다.
공포 양식은 외부첨차가 곡이 심한 쇠서(牛舌)로 시대가 떨어짐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체적인 느낌은 매우 복잡한 공포가 처마 밑에 꽉 차 아주 화려한 느낌을 준다. 또한 공포의 부재가 두툼하고 건실하여 안정된 감을 준다. 신라 때에는 건물내벽에 대리석으로 화엄경을 석각(石刻)하여 장치하였으나 그 후 불타버리고 현재는 건물 불단 밑에 그 파편이 따로 수장되고 있어 옛날 화엄학의 대도량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화엄사 사적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중건년대는 숙종25년(1699)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4년간에 걸쳐 완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황전 본래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다. 중창 때 각황전 현판을 걸어 지금까지 각황전이라 부른다. 부처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 만한 장육의 금색불상을 봉안했을 것이고, 그 부처님은 지금의 좌불과는 달리 입불이었다고 생각된다.
전체적인 모습이 장중하고 안정되었으며 가구의 치목과 짜임이 우수한
건물이라 하겠다. 또한 규모의 면에 있어서도 여수 진남관에 버금가는 건물이다.

- 화엄사 대웅전은 경내에서 각황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일주문으로부터 이루어진 축선에서 타소 이탈되어 위치한다. 건물의 전면에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대석단(大石壇)과 석계(石階)가 있다. 이 건물은 각황전과 함께 조선중기이후 건축으로 대표적 건물이라 하겠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둥사이 간격을 모두 동일하게 하였고 또 기둥이 높아 기둥열이 매우 정연하다. 다포형식인 공포는 내외 삼출목으로 외부에는 쇠서부분에 장식적 요소가 증가되고 내부에서는 대들보는 받친 공포의 살미첨차가 한 몸으로 합쳐져서 장식판처럼 변형되었다. 전면 기둥 사이에는 각각 세 짝의 문을 달았으며 그 위에는 교창을 만들었다. 지붕의 가구(架構)를 위하여 불단 후면에 3개, 불단 전면 좌우에 각 1개씩의 고주(高柱)를 배치하여 대들보를 받쳤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주위의 바깥둘레칸을 중앙부분보다 한층 낮게 만들었다. 이는 불단부분을 높게하여 장엄을 주기 위함이다. 불단에는 화엄종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좌우로 모셔 법·보·화 삼신불을 이루고 있고 협시보살을 한 분도 모시지 않았다. 불상은 조선시대 것으로는 크고 제작도 우수하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은 불멸의 원리 자체를 상징하기에 법신(法身)이라 한다. 그 왼쪽 즉, 바라보기에 오른쪽에 있는 노사나불은 보살로 있으면서 원과 행을 닦아 얻은 인연으로 이룬 보신(報身)이라 하므로 보관을 쓴 보살상으로 표현하였다. 법신 오른쪽의 석가모니불은 이념적인 불신이 실제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내 보인 것이기에 화신(化身)이라 한다. 불상의 위에는 정(丁)자 모양의 닷집을 3개 달았는데 전체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화엄사 사적기에 의하면 본 건물은
임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인조 14년(1636)에 벽암선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벽암선사는 인조가 즉위한 후 남한산성을 쌓는데 공을 세우고 이후 훼손된 사찰들을 재건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화엄사가 완성되었을 때 나라에서는 화엄사에 선종대가람이라는 교지를 내렸다. 왕실의 비호 아래 중창된 사실을 표방하기 위해서 대웅전 현판은 원종(元宗)의 친동생으로 인조의 유일한 친숙부였던 의창군 광(珖)이 쓰고 그 사실을 낙관으로 드러내었다. 이는 억불체제 아래에서 왕실의 힘을 빌려 사격(寺格)을 높이고 관리와 유생들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화엄사라는 대가람의 대웅전으로는 다소 적은 편이나 부처님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보면 계곡을 지나 멀리 섬진강의 주변풍경을 느낄 수 있다

- 사찰건축에서 강당건물은 불교의 교설을 강의하기 위한 공간으로 석가모니 당시부터 존재하는 공간이다. 사찰이 처음 한국에 조영될 당시에는 불전(佛殿) 뒤에 배치되었다. 이후 불교가 우상 숭배화하여 기복적으로 변하고 개인신앙화 함에 따라 그 필요성을 잃어가게 되어 불전의 전면에 오게 되었다. 중정형(中庭型) 사찰에서는 대웅전 건너편에 위치하여 좌우로는 승방과 마주보고 있다.

강당과 승방은 때로는 구별이 없이 같은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평면형태도 승방과 비슷한 발전을 보였다. 강당은 누(樓)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늘날 이러한 누는 집회, 사무 등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강당의 기능은 보통 대웅전에서 행해지고 있다.


화엄사 보제루는 본래 승려나 신도들의 법요(法要)시 집회강당으로 쓰여진 건물이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기둥 직경이 70cm나 되는 매우 우람한 건물이다. 한 단으로 된 막돌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낮은 루하주(樓下柱)를 세웠다. 전면에는 지면에 바로 초석을 놓았으나 뒷면은 누정 형식으로 받침기둥[樓下柱]을 세워 마루바닥 밑을 빈 공간으로 처리하였다.
루마루 윗 기둥은 민흘림의 원주이며 내부 바닥은 모두 마루를 깔았다.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짝의 빗살문을 달았다. 뒷면의 중앙 5칸은 두짝의 판문을 달았고 좌우 양끝칸은 판벽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공포형식은 초익공이며 뒷면은 포를 결구하지 않았다.


원래 전면의 창문은 달지 않고 개방되었던 것인데 1976년 지붕 및 일부 목부(木部)교체 공사를 하면서 창문을 달았다. 조선사찰사료에 의하면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19세기 초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경상도 지방의 사찰에서 강당형식은 높은 루형식을 취하여 루
하진입(樓下進入)을 하는 경우가 많으나 전라도의 경우는 누하진입이 거의 없고 건물측면을 끼고 돌아 사찰의 중앙부인 중정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화엄사의 경우도 보제루 옆을 돌아 쌍탑이 있는 중정으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호화롭지 않아 단촐하지만 길게 버티고 앉아 중정공간을 위요해 주는 무게가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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