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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8. 02:19 연예와 문화
[新 문화지리지 2009 부산 재발견] <8> 누나야 강변 살자- 낙동강 문화지도
나루,소금,재첩,강노래…시나브로 사라졌다
백현충 기자
또 다른 기억들…강. 강. 낙동강.

구포의 대리 팽나무(수령 500여년)는

부산 경남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당산나무다.

도심에 당산나무가 있다는 것도 을씨년스럽지만

그런 나무가 낙동강 주변에 포진한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강서구 송정마을에는 '벅수'라고 불리는 돌장승이 서 있다.

어릴 때 어리석고 모자라는 행동을 하면

으레 "벅수 같은 놈"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문화는 딱히 서술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로, 문학으로 옮겨지지 않아도

문화는 온전히 전승될 수 있다.

그런 '전승의 힘'을 낙동강에서 확연히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낙동강 문화'라고 이름을 짓고 싶었다.

하지만 성급하고 어설펐다.

강에서 목격된 것은 쇠락이었고 무관심이었다.

나루도, 소금도, 재첩도, 강 노래도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었다.

문화가 사라지고 있었다.

'현대 문명'에 밀려 무관심 속 쇠락
시인·화가 등 예술인이 파수꾼 역할


그래픽 디자인=동서대 안병진 교수팀(박재용)

사진=김진문 프리랜서·일부 북구청 제공


# 소통문화의 산실, 나루

동원진은 낙동강의 부산 경계 안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나루였다. 그 아래로 구법진이 있었고 또 그 아래로 감동진(구포)이 놓여 있었다. 감동진은 남창나루로도 불렸는데, 남창은 세금으로 거둔 물건을 저장하던 창고였다. 낙동강이 한때는 물류의 거점이었다는 증거다.

낙동문화원 백이성 원장은 "부산권 낙동강에만 수십개의 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나루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가장 중요한 교통과 물류 중심지였다"고 말했다. 특히 구포의 감동진은 전체 낙동강 중에서도 가장 큰 나루 중 하나로 소문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번창한 나루가 지금은 단 1개도 남아 있지 않다. 아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하단포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포구나 나루가 있었음을 지칭하는 표지석을 구경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나루의 옛 영화를 더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루는 그렇게 명멸했다. 하지만 나루를 퇴출시킨 다리의 신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33년 구포둑과 함께 설치된 구포장교(옛 구포다리·1천60m)는 건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한강에도 이만한 다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새 다리가 개통된 이후 천덕꾸러기가 됐다. 지금은 표지석도 없이 철거된 상태다. 소용이 다 되면 마냥 잊혀지는 것일까?

# 낙동강에 소금밭이 있었다고?

낙동강 하구가 한때 죄다 소금밭이었다고 하면 이를 믿어줄 부산시민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낙동강에 대해 무관심했음이다. 강서구 명지는 지금에야 대파밭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대파를 심기 전에는 온통 염전이었다. "전국 천일염의 30%가 낙동강 하구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

그럼에도 당시 염전이 어느 정도까지 넓게 포진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고증은 일체 없다. 기록에 그만큼 약한 것이다. 다만 강서구 중신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을비석에서 "조선시대부터 염전이 많아 낙동강을 거슬러 현풍까지 올라가 식량을 교환해 왔었다"란 문구를 읽을 뿐이었다. 주 회장은 "하신마을의 대파밭 가장자리에 흐르는 농수로가 옛 염전 수로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 손톱 굵기의 하단 재첩은 어디가고

낙동강 재첩은 유난히 더 컸다. 하구가 넓은 만큼 섬진강 재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른 손톱만 한 크기에 씹는 맛이 구수했다. 그 재첩은 이른 아침 부산의 골목을 죄다 쏘다녔다. "재첩국 사이소." 재첩과 함께 유명세를 떨쳤던 백합도 마찬가지다. 가장 늦게까지 낙동강 재첩국을 팔았던 하단포 일대는 시나브로 낙동강 대신 섬진강을, 하단 대신 하동 상호를 붙인 음식점이 선점했다. 재첩국 골목으로 홍보되고 있는 삼락동 일대도 다르지 않다.

재첩과 백합이 한창 팔리던 근대 초기에 하단포는 초량에 버금갔다. 그때는 김해의 쌀이 이곳에서 정미돼 일본으로 수출됐다. 이른바 국제항이었다. 주 회장은 "전성기의 하단포 객주(일종의 저축은행)는 같은 시대의 초량 객주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영화는 이제 사하구 가락2단지 아파트 놀이터에 세워진 하단포비에서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다.

# 강. 강. 강…또 다른 기억들

낙동강에는 '에덴'으로 불린 강변의 청년문화도 있었다. 신의 땅인 에덴처럼 1960∼80년대 독재정권에 짓눌린 청춘들은 무시로 에덴공원의 음악카페와 막걸리촌을 찾았다. 그곳에서 자유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앞선 세대들은 배에 짐을 부리고 맨손으로 그물을 끌어올릴 때 강의 노래를 불렀다. 구포 선창노래가 그랬다. 그런 민요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를 애석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지역의 소설가, 시인, 사진가, 화가들이 끊임없이 낙동강을 쓰고 그리고 있으니 다행일 테다. 그들이 파수꾼이다. 문화의 파수꾼. 백현충 기자 choong@busan.com

도움말=주경업 부산민학회장 / 백이성 낙동문화원장

백현충 기자 icon다른기사보기

부산일보 | 31면 | 입력시간: 2009-07-09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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