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0. 06:56
역사와 유물
임나일본부 망령에서 벗어난 전방후원분
기사입력 2008-11-21 15:03
13곳 중 7곳 발굴.."倭色 짙으나 임나일본부설 반증"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립광주박물관이 유적 정비 차원에서 최근 전남 해남군 삼산면 창리 578번지 소재 용두리(龍頭里) 고분을 발굴조사함으로써 현재까지 파악된 한반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3기 중 7곳이 속살을 드러냈다.
전방후원분이란 글자 그대로는 무덤 주인공을 매장하는 봉분은 둥글게 축조하고 그 전면에는 편평한 방형 기단을 마련한 고분을 말한다. 이 전면 기단에서는 제사와 같은 모종의 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확실한 전방후원분으로는 ▲전북 고창군 칠암리 고분 ▲전남 영광군 월산리 월계고분 ▲담양군 고성리 고분(월성산 고분)과 성월리 고분(월전 고분) ▲광주 월계동 1ㆍ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長鼓山)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杓山) 고분군 중 제1호분 ▲함평 신덕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영암군 자라봉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 외에 이번 해남 용두리 고분이 꼽힌다.
이 중 월계동 1ㆍ2호분(전남대박물관)과 자라봉 고분(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화동 고분, 신덕 고분, 그리고 방산리 고분(이상 국립광주박물관)은 이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전방후원분은 우선 호남지방에 편중해 있긴 하지만, 밀집된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산재'(散在)하는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나아가 축조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최근에는 6세기 중반에 집중 조성됐다는 점에는 학계가 대체로 합의한다.
전방후원분은 그 독특한 양식이 일본열도에서 유래했다는 데도 이견은 없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일본 고대사는 조몬시대와 야요이시대를 거쳐 대체로 서기 4세기 무렵 이후는 고분(古墳)시대로 든 것으로 보는데, 이 고분시대의 마스코트가 전방후원분이라 할 정도로 등장시기도 한반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빠르고 숫자 또한 구체적인 통계가 불가능할 만큼 많다.
따라서 전방후원분은 1980년대에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지구상에서 오직 일본열도에만 있었고, 그에서 만개(滿開)한 문화적 특징으로 거론됐다.
이와 같은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나아가 실제 발굴성과에서도 '왜색'(倭色)이 짙다는 사실이 확연해 짐에 따라 고대 한-일 관계사, 특히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두 나라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실재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적인 것으로 완전히 깨뜨려버렸다고 자신한 한국학계로서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이런 '우려'가 지금도 싹 가셨다고 하기 힘들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박천수 교수는 2006년 충남대 백제연구소 기관지인 '백제연구' 43집에 투고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통해 본 5-6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라는 논문에서 "한국측 일부 연구자 중에서는 '임나일본부'와 관련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또는 부정하려는 현상조차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우려'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함평 신덕고분 발굴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분은 1991년 3월 국립광주박물관이 현지 실측조사를 하다가 도굴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같은 해 6월17일 이후 7월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도굴 피해를 보긴 했지만, 나중에 그 도굴품 중 상당수를 회수한 데다 수습 유물 또한 만만치 않아 이번에 같은 기관에서 발굴한 용두리 고분까지 포함해 조사가 이뤄진 전방후원분 7곳 중 가장 많은 성과를 냈다.
그럼에도 신덕고분 발굴성과는 17년이 흐른 지금까지 구체적인 공개가 없다. 다만 광주박물관은 지난 95년 '함평 신덕고분 조사개보'라는 '행정보고서'만을 작성해 관계기관에 배포했을 뿐이며, 이조차 '대외비'로 묶어놓았다.
박물관이 당시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발굴성과가 자칫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이후 전방후원분을 바라보는 한국 학계의 사정은 매우 '호전'됐다.
박 교수 같은 이는 외려 전방후원분 분포 양상이야말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현지 수장층이라는 견해와 왜인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들 무덤이 왜색을 짙게 풍기기는 하지만 백제적인 요소 또한 농후하다는 점을 들어 왜에서 영향을 받아 백제 현지인들이 축조한 무덤이라고 본다. 이 경우 임나일본부설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후자 즉,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을 왜인으로 보는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결론은 마찬가지다. 무덤 분포양상으로 보아 왜(倭)가 호남지역을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는 없으며, 외려 백제에서 지방통치를 위해 '채용'한 사람들이 묻힌 곳이 바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다.
당시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신덕고분 발굴에 참여한 조현종 현 국립광주박물관장이 "언제든 (신덕고분의) 정식 보고서를 낼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으며, 그런 걱정(임나일본부설 논란)은 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립광주박물관이 유적 정비 차원에서 최근 전남 해남군 삼산면 창리 578번지 소재 용두리(龍頭里) 고분을 발굴조사함으로써 현재까지 파악된 한반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3기 중 7곳이 속살을 드러냈다.
전방후원분이란 글자 그대로는 무덤 주인공을 매장하는 봉분은 둥글게 축조하고 그 전면에는 편평한 방형 기단을 마련한 고분을 말한다. 이 전면 기단에서는 제사와 같은 모종의 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확실한 전방후원분으로는 ▲전북 고창군 칠암리 고분 ▲전남 영광군 월산리 월계고분 ▲담양군 고성리 고분(월성산 고분)과 성월리 고분(월전 고분) ▲광주 월계동 1ㆍ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長鼓山)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杓山) 고분군 중 제1호분 ▲함평 신덕 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영암군 자라봉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 외에 이번 해남 용두리 고분이 꼽힌다.
이 중 월계동 1ㆍ2호분(전남대박물관)과 자라봉 고분(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화동 고분, 신덕 고분, 그리고 방산리 고분(이상 국립광주박물관)은 이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전방후원분은 우선 호남지방에 편중해 있긴 하지만, 밀집된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산재'(散在)하는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나아가 축조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최근에는 6세기 중반에 집중 조성됐다는 점에는 학계가 대체로 합의한다.
전방후원분은 그 독특한 양식이 일본열도에서 유래했다는 데도 이견은 없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일본 고대사는 조몬시대와 야요이시대를 거쳐 대체로 서기 4세기 무렵 이후는 고분(古墳)시대로 든 것으로 보는데, 이 고분시대의 마스코트가 전방후원분이라 할 정도로 등장시기도 한반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빠르고 숫자 또한 구체적인 통계가 불가능할 만큼 많다.
따라서 전방후원분은 1980년대에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지구상에서 오직 일본열도에만 있었고, 그에서 만개(滿開)한 문화적 특징으로 거론됐다.
이와 같은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나아가 실제 발굴성과에서도 '왜색'(倭色)이 짙다는 사실이 확연해 짐에 따라 고대 한-일 관계사, 특히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두 나라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실재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적인 것으로 완전히 깨뜨려버렸다고 자신한 한국학계로서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이런 '우려'가 지금도 싹 가셨다고 하기 힘들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박천수 교수는 2006년 충남대 백제연구소 기관지인 '백제연구' 43집에 투고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통해 본 5-6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라는 논문에서 "한국측 일부 연구자 중에서는 '임나일본부'와 관련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또는 부정하려는 현상조차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우려'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함평 신덕고분 발굴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분은 1991년 3월 국립광주박물관이 현지 실측조사를 하다가 도굴 구멍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같은 해 6월17일 이후 7월18일까지 약 한달 동안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도굴 피해를 보긴 했지만, 나중에 그 도굴품 중 상당수를 회수한 데다 수습 유물 또한 만만치 않아 이번에 같은 기관에서 발굴한 용두리 고분까지 포함해 조사가 이뤄진 전방후원분 7곳 중 가장 많은 성과를 냈다.
그럼에도 신덕고분 발굴성과는 17년이 흐른 지금까지 구체적인 공개가 없다. 다만 광주박물관은 지난 95년 '함평 신덕고분 조사개보'라는 '행정보고서'만을 작성해 관계기관에 배포했을 뿐이며, 이조차 '대외비'로 묶어놓았다.
박물관이 당시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발굴성과가 자칫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이후 전방후원분을 바라보는 한국 학계의 사정은 매우 '호전'됐다.
박 교수 같은 이는 외려 전방후원분 분포 양상이야말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현지 수장층이라는 견해와 왜인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들 무덤이 왜색을 짙게 풍기기는 하지만 백제적인 요소 또한 농후하다는 점을 들어 왜에서 영향을 받아 백제 현지인들이 축조한 무덤이라고 본다. 이 경우 임나일본부설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후자 즉,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을 왜인으로 보는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결론은 마찬가지다. 무덤 분포양상으로 보아 왜(倭)가 호남지역을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는 없으며, 외려 백제에서 지방통치를 위해 '채용'한 사람들이 묻힌 곳이 바로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다.
당시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신덕고분 발굴에 참여한 조현종 현 국립광주박물관장이 "언제든 (신덕고분의) 정식 보고서를 낼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으며, 그런 걱정(임나일본부설 논란)은 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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