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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18. 12:53 생활의 지혜

인류는 숲에 많은 것을 의존하며 문명을 만들어왔다. 인류는 숲을 보존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지만, 여러 이유로 숲을 파괴하기도 했다. 숲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쳐왔다.

농업의 시작과 숲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내장산 백양사 쌍계루 주변의 아름다운 숲.
숲은 홍수를 조절하고 공기와 수질을 정화하는 기능 외에도 건강과 휴식을 위한 녹색 공간을 제공한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 인류는 숲 속에서 사냥과 채집 등으로 삶을 영위해왔다. 하지만 농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인류는 숲을 농경지로 바꾸며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숲이 농경지로 바뀌어갔지만, 농업사회에서 숲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숲이 훼손되면 목재와 땔감이 부족해지는 것은 물론, 물의 정상적인 순환을 어렵게 하여 홍수, 가뭄, 강의 범람 등으로 인해 농업생산에 타격을 주는 자연재해가 일어난다. 따라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숲을 보호해야만 한다.

삼국시대의 숲 파괴


[삼국지(三國志)] 〈한(韓)〉조에는 ‘염사치(廉斯錙)란 자가 서기 20~23년경에 낙랑(樂浪)으로 가던 도중에 호래(戶來)라는 한(漢)나라 사람을 만났는데, 호래의 무리 1,500명은 재목(材木)을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1,500명이 벌채(伐採- 나무를 베어냄)를 할 정도라면, 넓은 지역의 숲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숲을 파괴하면서까지 벌채를 하려던 것은 철이나 소금 생산에 필요한 연료를 구하거나, 또는 대형 건축물이나 큰 배를 만들 재목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造船), 건축(建築), 야철(冶鐵- 철기를 제작함), 제염(製鹽- 소금을 만듦) 등은 숲을 파괴하는 주요한 산업들이었다.

300년 고구려의 제 14대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300)은 궁궐 수리를 위해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켰다. 왕은 숲을 파괴하면서 얻은 목재로 화려한 건축물을 지어 자신의 위엄(威嚴)을 과시하고자 했지만, 백성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나무를 깎고 돌을 다듬는 일(木石之役)로 힘겨워했다.

삼국시대에 두드러지게 숲의 파괴가 일어난 것은 전쟁과 관련이 깊다. 초기의 전쟁은 전사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싸움이었기에 숲의 파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보병을 중심으로 한 다수가 참전하는 대규모 전쟁이 발생하면서, 숲은 크게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지역은 평양(平壤) 일대였다.

612년 고구려는 수나라 대군을 물리치기 위해 청야(淸野- 주민들을 성안으로 들이고 군수물자와 식량을 차단하는 병법) 전술을 감행해 살수대첩을 이끌어 승리했다. 하지만 들판을 비우는 이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유실수(有實樹)를 베어버리는 등 숲의 파괴가 먼저 진행되어야 했다. 661년 8월 당나라 대군은 수천 척의 배를 동원해 황해를 건너 평양을 직접 공격해왔다. 이들은 다음해 2월까지 평양 일대에 머물다가 고구려 군에게 패해 쫓겨났다. 667년 말부터 668년 9월 고구려가 항복할 때까지 당-신라 연합군 수십만이 평양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가 한곳에 장기간 머물게 되면 땔감이나 방어용 목책, 공성 무기의 생산과 수리, 사망자의 화장 처리 등에 필요한 나무가 대량으로 필요해진다. 따라서 평양 일대의 숲은 크게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弓裔, 재위: 901~918)는 사람들에게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군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200여 년이 지난 시기까지도 평양 지역이 황폐해져 있었기에 이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몽골의 7차례에 걸친 고려 침입(1231~1257)을 비롯해, 고려 말 왜구의 해안가 침탈 등 이후로도 다수의 전쟁은 우리 숲이 파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큰 전쟁이 지난 후에는 유독 가뭄과 홍수로 흉년이 들어 백성의 삶이 곤경에 빠지는 일이 많다. 그것은 숲의 파괴로 농업환경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1차로 사람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2차로 숲과 농경지를 파괴해 사람들의 생명을 다시금 위협했던 것이다.

숲의 파괴와 홍수


880년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은 신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아니하며,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 하지 않는다 하니 사실이냐.”


신하는 실제로 그러하며, 이는 백성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왕의 성덕(聖德)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라의 풍요는 심각한 산림파괴를 가져왔다. 기와를 만드는데는 대량의 연료가 필요하다. 또 숯은 좋은 연료이기는 하지만 자원 낭비가 심하다. 무게로 따져 질 좋은 숯은 원료가 된 나무의 1/10에 불과하다. 숯의 사용이 늘어난 만큼, 숲은 빠르게 훼손된다. 당시 경주는 국제적인 대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이 숯을 사용하면서 숲이 파괴되자, 신라는 886년부터 888년까지 계속해서 가뭄에 시달렸다. 그러자 889년(진성여왕 3)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원종·애노의 난). 이를 계기로 신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니, 숲의 파괴를 신라 멸망의 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숲의 보호


숲은 자연 그대로의 천연림(天然林)과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조성되거나 보호된 인공림(人工林)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숲을 뜻하는 영어 forest는 라틴어 foresta에서 유래된 것으로, 제한구역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유럽에서 숲은 왕의 사냥터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산업화의 동력으로 많은 나무들이 베어졌음에도 숲이 보존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도 왕실 전용 사냥터가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 기산(箕山), 질산(質山), 왜산(倭山) 등은 여러 차례 왕이 사냥했던 곳으로, 대개 도성에서 말을 타고 1〜2일 가야하는 곳에 있었다. 이러한 사냥터의 숲은 당연히 훼손이 안 되고 보존되었다.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숲에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나, 신성한 나무가 위치해 종교적 성지가 된 곳이 있다. 신라는 한때 ‘계림(鷄林)’이라고 불렸다. 계림은 신라의 수도인 반월성 북쪽에 위치한 숲으로, 이 숲에서 김씨 왕족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 계림은 도심의 한복판에 위치한 곳이지만, 시조가 탄생한 신화가 담긴 곳인 만큼, 오래도록 보존되어 왔다.

신라의 건국 전설이 깃든 계림. 신라 수도 월성 바로 북쪽 시내 한가운데에 있다.

각저총 씨름 그림의 신성한 나무. 특별한 나무는 숭배되어, 보호를 받았다.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 씨름하는 사람들 옆에 보이는 나무는 아래에 곰과 호랑이가 있고, 새가 날아오는 모습이어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를 그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한(三韓)의 종교적 성지인 소도(蘇塗)는 큰 나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숲이라고 할 수 있다. 소도의 중심이 되었던 귀신이 머문 나무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가 된다.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노거수명목지]에는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노거수(老巨樹- 수령이 오래된 커다란 나무) 5,330점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동제(洞祭)를 지낸 곳이 450개소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크거나 오래되거나 아름다운 나무는 성스러운 나무로 간주되어 신이 거주하거나 예배의 장소, 또는 하늘과 통하는 길목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신성한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桓雄)이 머문 신단수(神檀樹)라고 할 수 있다. 신단수와 같이 신성한 나무인 당산(堂山) 나무가 있는 숲은 특별히 보호를 받고 보존되었다.

이 밖에도 해안가에서 바람을 막는 방풍림(防風林), 강가에서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조성한 방제림(防除林) 등은 관리가 잘 되어 오래 보존될 수 있었다.



숲의 개인 소유와 파괴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한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은 다음 해에 정치를 쇄신하기 위해 포고령을 내린다. 이때 내려진 15개 항목 가운데 ‘산림(山林)과 개천과 못(澤)에서 생산되는 이익을 백성들이 함께 소유하게 하며,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이념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민간인이 숲을 넓게 점유하지 못하게 했다.

국가에서 개인이 숲을 함부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법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1325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은 ‘산림과 강과 못은 백성과 이익을 같이 하는 것인데, 최근 들어 권세가 스스로 점유하여 개인의 재산으로 삼으니, 이를 벌하겠다.’고 했다. 이는 숲의 사유화가 고려시대에 이미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조상의 무덤을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의 독점적인 권리를 개인에게 주기도 했다. 기존 무덤 주변에 다른 이가 무덤을 만들거나 벌채를 하지 못하게 했고, 무덤 주변에 임산물을 길러 채취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인정해주었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숲의 사유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사유화된 숲은 관리가 쉽지 않아 목재나 연료를 채취하기 위해 몰래 나무를 베는 투작(偸斫)을 막기가 어려웠다. 투작 때문에 개인 소유 산림에 대한 법적 권리분쟁인 산송(山訟- 묘지에 관한 소송)이 크게 늘어났다.

화전의 확대와 숲의 파괴

인구가 증가하고 농지가 부족해지자 산의 나무를 태우고 곡식을 재배하는 화전이 크게 늘었다. 화전은 광복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1968년 화정정리법을 통해 법령으로 금지되었다.


17, 18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인구는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일본, 청과의 전쟁 이후, 조선에서는 농토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들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火田)을 일궈 새로 농지를 확보해 살 길을 마련했다. 정부에서도 새로운 경지 개간을 장려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산에는 새로운 밭(山田)이 크게 늘었는데, 정부에서는 화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우리나라의 산악이 국토의 3/4이므로 화전의 면적이 평지의 논밭과 비슷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화전 때문에 전국적으로 엄청난 숲이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1675년 조선정부가 화전을 금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지만,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화전은 수확이 평지의 밭(原田)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세금 또한 적게 냈기 때문에 농민들은 화전을 계속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화전을 일군 후 차츰 계속 농사를 짓는 숙전(熟田)이 되는 경우도 많아 산골에 들어가 농사짓는 농민들의 숫자는 늘어갔다. 게다가 산에 계단식 논(沓)까지 만들면서 숲은 더욱 파괴되었다.

불법 벌목과 금산정책

조선 후기 숲이 황폐화되가는 주요 원인에는 화전의 증가와 더불어 땔감 수요의 증가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 송(宋:960~1279) 시기에 취사와 난방을 위해 석탄(石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왕실에서 종친들에게 석탄을 내려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삼척(三陟)과 통진(通津) 등지에 광산이 있었지만 석탄은 연료로 거의 쓰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서 땔감은 나무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

17~18세기 인구 증가와 더불어 온돌이 널리 보급되면서 땔감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나무 가격이 크게 급등했다. 백성들은 나무로 된 관(棺)을 마련하지 못해 장례를 초장(草葬-시신을 짚으로 사서 임시로 매장하기)을 치러야 할 정도였다. 나무 값이 오르자 불법으로 다른 사람의 산에 침범해 몰래 나무를 베는 투작(偸斫) 행위가 더욱 심해졌다.

국가에서는 궁궐을 보수할 때 필요한 큰 소나무 등이 자라는 곳이나, 염전(鹽田)에서 필요한 나무가 있는 지역 등을 금산(禁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몰래 나무를 베는 자는 곤장 90대를 때리는 엄벌에 처하기도 했다. 금산에는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경계표식을 하여 경계 안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일체의 경작행위도 금지시켰다.


20세기 초의 나무장수. 땔감이 귀했던 한양에서는 소에 나무를 싣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각 마을에서도 마을 공동의 숲의 보호하기 위한 송계(松契- 소나무를 잘 가꾸고 보호하기 위해 모은 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산지기라 불리는 사람들은 가문의 묘소들을 돌보는 한편 숲을 보호하는 일을 하면서 그 대가를 받기도 했다.

인왕산 호랑이가 사라지다


금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투작 행위는 나날이 심해져 금산으로 지정된 한양의 내사산(內四山-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지역도 훼손되었다. 한양의 서쪽에 우뚝한 인왕산(仁王山)은 숲이 우거져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이 찍은 사진 속 인왕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었다. 숲이 없으니 자연히 들짐승 또한 살 수가 없다.

19세기에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1879년 1회뿐으로, 도성 안에도 수시로 출몰했던 18세기와는 크게 달라졌다. 조선 초기 크게 활약하던 호랑이 사냥꾼 착호갑사(捉虎甲士)는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필요가 없어졌다.

숲의 황폐화와 농업생산성의 저하

천연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높이가 5-7m 정도되는 1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벽에 자라고 있으며, 측백나무 외에도 소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주변의 숲은 사람들이 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서 황폐해졌지만 측백나무는 절벽의 바위틈에 자라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910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임야(林野) 가운데 어린 나무조차 없는 황폐한 지역의 비율이 무려 26%였다. 한반도 남부지역 ㏊당(當) 임목축적(林木蓄積)은 10㎥에 불과했다. 이는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과 경기, 남부지방 대부분의 산에 나무가 없음을 의미한다. 숲이 황폐화되면, 산의 흙과 모래가 계곡을 거쳐 하류로 운반되어 강폭이 넓어지고 강바닥이 높아지게 된다. 집중호우에 하천이 쉽게 범람하고 제방이 붕괴되며, 이는 곧 농경지에 피해를 준다. 또한 물의 저장과 공급을 조절하는 수리체계를 망가뜨리고, 산사태 등을 일으켜 농업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리게 된다. 결국 농업생산성의 저하는 농민의 생활을 어렵게 했다. 또한 농산물의 가격을 올려 도시인의 생활도 어렵게 했다. 이러한 경제적 파탄은 19세기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에서는 숲의 파괴로 인한 심각한 경제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특정 지역의 벌채를 금하는 정책에만 의존했을 뿐, 백성 스스로 숲을 조성하도록 만드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었다.

숲이 살아야 한다


1971년 우리나라의 임목축적량은 11㎥에 불과하여 1910년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가뭄과 홍수가 연례행사처럼 찾아들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산림녹화(山林綠化) 사업을 적극 추진한 이후, 2010년에는 평균 125.6㎥에 달할 만큼 숲이 되살아났다. 독일과 일본의 그것에는 못 미쳐도 미국 수준에는 도달한 셈이다.


하지만 숲은 언제든 인간의 욕심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그리고 숲 파괴의 결과는 언제나 참혹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전영우, [숲과 문화], 북스힐, 2005;존 펄린 저, 송명규 옮김, [숲의 서사시], 도서출판 따님, 2006;강판권, [세상을 바꾼 나무], 다른, 2011;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김영사, 2004; 최덕경, [중국고대 산림수택의 실태와 파괴요인], [부산사학] 28호, 1995;이우연, [18ㆍ19세기 산림황폐화와 농업생산성], [경제사학] 34호, 2003;신호철, [조선후기 화전의 확대에 대하여], [역사학보] 91집, 1981.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세상을 바꾼 수레],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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