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시집 '꽃의 소묘(素描)'(백자사·1959)에서
▶김춘수=1922년 경남 통영 출생, 2004년 별세.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과 통영문화협회 결성 본격적 문학 활동. 시집 '구름과 장미'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
짐승들이 탈출했다. 꽃향기 때문이다. 달려가는 꽃들을 추격하는 짐승들. 어둠이 되기 싫어 필사적으로 피어오르는 꽃 한 송이. 쾌락의 정원, 너의 보드라운 살갗에 날카로운 나의 이를 깊숙이 박는다. 이 사이로 뚝뚝 흐르는 어둠. 가지가 흔들리고 가지 끝에 매달린 이름들도 어둠이 되어버렸다. 바람난 "나의 신부여", 너의 향기가 그리워 눈물이 난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울었다. 아침이 밝아온다. 차량들의 경적소리, 지하철로 향하는 바쁜 발자국들. 흔들리는 건물, 혼돈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순간 기나긴 하품을 한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나의 금니 하나. 정익진·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