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2. 01:33
연예와 문화
[스크랩]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 - 아프간 소녀 샤르밧 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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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잡지와 책의 표지에서, 포스터에서, 옷깃 핀에서, 그리고 양탄자에서까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제, 17년 동안을 헤맨 끝에,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은 잊을 수 없는 초록색 눈을 지닌 그 '아프간 소녀'를 다시 찾아냈다. 꿰뚫듯이 바라보는 눈으로 아주 오랫동안 서방세계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신비스런 아프간 소녀는 샤르밧 굴라(Sharbat Gula)였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외딴 지역에서 남편과 세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1985년 내셔널지오그래픽誌의 표지에 샤르밧의 사진이 실린 뒤 거의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얼굴이 하나의 성상(聖像)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1984년에 그녀의 유명한 초상화를 찍었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계속적으로 여행하면서 다시 그녀를 찾으려고 애를 써왔다. 맥커리가 찍은 그녀의 사진은 최근에 발간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 100선집 (National Geographic 100 Best Pictures)의 표지로 선정되었다. 2002년 1월, 내셔널지오그래픽 조사팀은 그녀를 찾기 위해, 처음 맥커리가 샤르밧 굴라의 사진을 찍었던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 나시르 바그(Nasir Bagh)를 찾았다. 계속된 여러 경로의 접촉을 통해 그녀의 형제들과 남편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인터뷰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는 데에 동의했다. 샤르밧은 오직 두 차례 사진을 찍었는데, 한번은 1984년이었고, 또 한번은 올해 스티브 맥커리와 재회에서였다.내셔널지오그래픽 TV쇼 "익스플로러(EXPLORER)"의 진행자로서 이번에 함께 굴라를 만나게 된보이드 매트슨(Boyd Matson)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셔널지오그래픽 독자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진을 보았던 세상 누구라도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얼굴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알지만,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그 "아프간 소녀"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가 사라져 버리기 전에 그녀를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 캠프에서 시작하여, 여러 마을을 돌고 돈 뒤 마침내 끝에 보였고, 누군가 내셔널지오그래픽誌 표지에 있는 소녀를 알아보았다.그는 자기가 그녀의 남자형제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매트슨은, "그녀 남자 형제의 눈 색깔을 보자마자, 그녀의 가족을 만났다는 걸 알았습니다."고 말했다.샤르밧 굴라는 베일 뒤에서 전통적인 무슬림(Muslim)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이외의 남자를 만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셔널지오그래픽 팀은 여자 프로듀서를 보내 샤르밧을 만나고 그녀의 얼굴을 촬영하는 허락을 얻어냈다. 매트슨은 그녀의 사진과 그 소녀의 사진을 비교하고는 동일인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눈의 홍채, 그리고 얼굴에 난 얼룩과 자국 같은 것들은 모두 그녀가 우리가 찾던 사람임을 말해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익스플로러 팀은, 연방수사국(FBI)에서 사용되는 홍채 스캐닝 기술과 얼굴 인식 기술을 통해, 샤르밧 굴라가 17년 전의 사진 속의 소녀라는 확증을 얻었다.샤르밧 가족들은 그녀에게 17년 전에 그녀를 촬영했던 남자와의 만남을 허락했고, 맥커리는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지금도 여전히 그 때와 마찬가지로 매혹적이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제가 1984년에 사진을 찍을 때까지는 물론 그 이후로도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샤르밧 굴라는 한 어린이로써 사진 찍던 경험을 회상한다고 맥커리에게 말했는데,왜냐하면 그녀의 머리에 두른 천이 요리할 때 불에 그을려 얼마나 구멍 투성이였는지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맥커리는 샤르밧에게 그녀의 이미지가 아프간 사람들의 상징이 되어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저는 그녀가 그녀의 개인적인 명성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프간 사람들이 지닌 기품과 생명력의 상징이 되었다는 말을 우리가 전하자 그녀는 기뻐했습니다."고 맥커리는 말했다. 상(퓰리처상, 譯註)을 받은 그 사진작가는 그녀의 독특한 이미지가 그렇게 많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얼굴, 특히 그녀의 눈이 강렬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고통과 소생하는 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샤르밧이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 자신의 인생에서 두번째 사진을 찍기로 동의한 샤르밧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비밀스런 베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아는 세상 사람들이 그녀가 파키스탄에 있는 난민 캠프에서 생존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랬다. 그녀는 결혼하여 네 딸을 두었는데, 그 중 하나는 유아일 때 잃었다. 그녀는 그 문화와 종교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파쉬툰 족(Pashtun ethnic group)의 한 사람인 샤르밧은, 그녀가 느끼기에는, 소련과의 전쟁이라는 혼란과 공포를 벗어난 뒤, 그래도 안정을 유지해온 탈레반 치하에서 비교적 잘 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매트슨과 맥커리에 따르면, 샤르밧은 다시 무명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이 최근에 공개된 것 때문에 그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목을 끌게 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다른 대중매체와 인터뷰를 하지 않을 것이며, 접촉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고 매트슨은 말했다. 또한 그녀의 가족은 아프가니스탄 외딴 지역의 다른 마을로 이사했으며 그녀는 그 곳의 장막 뒤에서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만일 샤르밧이 그녀의 유명한 사진으로 경제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을지 묻자, 매트슨은 그녀가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히, 그녀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그녀와 같은 난민들이 처한 환경을 보여줄 때 사용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관해 물어왔습니다."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아프간 난민만이 아니라, 모든 난민들의 앞에 서 있습니다. 다른 문화, 다른 영역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우리의 임무에 그녀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간 여성들과 소녀들의 생활에 대한 관심을 일반 사람들에게 이끌어냄으로써, 그녀는 다시 한번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지요." 17년이 흐른 뒤.. 단순한 한장의 인물사진일 수 있지만 마냥 신비롭기만 했던 소녀때의 그녀의 눈빛과 17년후의 눈빛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한 메세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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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gm.nationalgeographic.com/ngm/0204/feature0/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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