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출렁이는 환영, 자작나무
인제군 남면 수산리 마을 들어가는 길은 깊다. 면 소재지를 지나 산 넘는 굽잇길에 접어들면 지나는 차 한 대 없이 고요하다. 그 고요의 풍경에 더해지는 건 상록수와 더불어 출렁이는 낙엽송, 그리고 소양호 끝자락이다. 낙엽송과 소양호는 시간 따라 다른 풍경을 선보인다. 낮에 출렁이는 낙엽송은 색의 환영처럼 햇살 받아 금빛으로 아른거리고, 소양호는 새벽이면 하얀 물안개를 피워 올린다. 낙엽송도 소양호도 길과 멀어질 무렵 표지판을 하나 만난다. '여기부터 수산리입니다.'
수산리란 단어는 자작나무 숲과 바꿔도 무방하다. 길을 깊숙이 파고들면 그 끝에 수산리가 있고, 마을을 감싼 응봉산이 있으며, 계곡마다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가 있다. 여기서 고요는 한 단계 더 침잠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수산리라는 마을의 위치가 오지에 가깝다. 한때 번듯한 초등학교를 갖췄던 마을은 1973년 소양강댐이 들어서며 규모가 급격히 줄었다. 연기 피워 올린 집들은 하나의 집이 개별의 마을이듯 제 간격을 갖추고 띄엄띄엄 서 있다.
응봉산은 그 집들을 모두 감싼다. 기슭마다 집을 품은 응봉산이 사방을 둘러, 수산리에서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진다. 그 짧은 시간, 새는 울며 날고 소는 여물을 뜯고 개는 외지인을 향해 짖는다. 인적 드문 응봉산에서 새와 소와 개가 내는 소리가 메아리치다 잦아든다.
응봉산이 품은 건 마을만이 아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자작나무가 기슭마다 흰빛으로 출렁인다. 전체 2000㏊의 조림지역 중 600㏊에서 자작나무 90만 그루가 자란다.
본래 자작나무는 북방의 나무다. 북위 45도 위에서 잘 자란다. 백두산이 북위 41도다. 그보다 아래인 한반도 남쪽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드물다. 다시 말해, 남방의 자작나무는 대개 심어 기른 나무다.
응봉산 자작나무도 사람이 길렀다. 1984년 응봉산 도유지를 동해펄프가 매입해 2년 뒤 기존의 나무를 베어내고 자작나무를 심었다. 펄프 재료로 쓰기 위해서다. 자작나무는 빨리 자라는 데다 고급 펄프의 원료로 쓰인다.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 자작나무는 밑동 지름 20㎝에 키는 20m에 이르게 성장했다.
응봉산 자작나무 숲을 제대로 보려면 임도(林道)에 올라야 한다. 흙길과 시멘트길이 번갈아 이어지는 임도에서 자작나무의 마력은 확연하다. 걸어서 자작나무 숲을 스쳐 지날 때 한데 모인 자작나무는 환영 같다. 빛과 어둠이 서로 스며 구별되지 않는 기슭에서 자작나무는 하얗게 제 존재를 알린다. 그 흰색은 주위의 소리를 빨아들여 적막하고, 스스로 적막함을 못 이겨 금방이라도 어둠에 묻힐 것만 같다. 이 느낌과 상관없이 자작나무는 끝내 하얗게 빛나, 자작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모순된 감정을 자꾸만 일깨운다.
응봉산의 임도는 가파르게 치고 오르다 8부 능선에서 수평으로 나아간다. 거기서 시야는 확 트여 대단위의 자작나무 숲이 낙엽송, 소나무와 함께 출렁인다. 흰색과 금빛, 녹색이 한데 어울린 풍경은 인제 응봉산의 백미다. 해의 방향 따라 색은 때로 등불처럼 환하거나 그림자처럼 아른거려, 풍경이 시시각각 변한다. 해서 응봉산의 풍경은 두 가지 선택안을 제시한다. 오래오래 머물거나, 다른 시간에 다시 찾거나
[출처: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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