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1. 07:41
역사와 유물
이화장 할머니, 프란체스카 여사
[조인스 블로그] 입력 2010-12-19![[편집]DSC06848.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68ed5620.jpg)
1945년 10월 16일, 거처도 돈도 없이 고국에 돌아 온 이박사 내외는 돈암장 1년
몇개월, 마포장 2개월을지낸후, 유지 33명이 사재를 모아 한옥의 이화장을
매입하여 기증했다고 한다.
![[편집]DSC06847.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696862bf.jpg)
1992년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계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맨 마지막 방은 그녀의
유품들로 가득하다. 한 나라의 영부인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한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보기로 하자.
![[편집]DSC06831.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c4c32a60.jpg)
1916년, 소녀시절의 프란체스카/ 그녀가 찍은 가족사진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6.1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생장했다. 중고시절 수학성적이 뛰어나서,‘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고 상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자격과 타자-속기자 자격을 취득하였다.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 현장
수업을 받아 행정과 사무의 능력을 고루 갖추었던 학식과 교양을 갖춘 부잣집
셋째 딸이었다.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파리 경유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엘 묵었을 때, 국제연맹 회의 참석차 들렀던 이박사와 좌석이 없어서 함석하게 된게 연애의 시작이었음은 유명하다.프란체스카가 다음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승만을 위해 스크랩해서 호텔 안내에 전하고 또 다른 신문에 난 기사도 잘라서 보내자 답례의 차대접으로 발전했다. 프란체스카 어머니는 여행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으나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계속했다.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일손과 돈이 한없이 필요한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을 지나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1934년, 뉴욕에서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편집]DSC06734.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c597847a.jpg)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전보를 두 번씩이나 쳤으나 이 박사는 아내와 같이 승선을 했다.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했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부두에는 뜻밖에도 수많은 동포들이 나와 마중을 했고 1천명이 넘는 하와이 동포들이 큰 잔치도 벌여주었다.

하와이 도착후 처음 입주했던 집
프란체스카 여사는 주부로 안주할 수가 없었다. 세 기관을 움직이는 남편을 따라 할 일이 많았고, 특히 한인기독학원의 실무를 지원했다.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아이들 머리도 감겨주고 식사도 준비했다. 김치 담그는 법도 배웠다.
이박사는 외국생활을 오래했지만 입맛은 철저히 한식이었다. 달걀도 후라이보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달걀찌개 맛을 평생 잊지못했다.
![[편집]DSC06832.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1633e95c.jpg)
이박사 내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워싱턴 D.C.로 옮겼다. 41년에 이 박사는 태평양 전쟁을 예언하는 영문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경고를 주었고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는 “무서운 예언서”라고 평가했다.
세 번의 타이핑에 프란체스카의 손끝은 무르고 터졌다. 베스트셀러가 되자 독립운동 자금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아내에게도 여윳돈을 주어서 이때 맞춘 검정 예복이 40년을 넘어 며느리 조혜자씨가 물려받아 입고 있다고 했다.
![[편집]DSC06821.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ebd5127a.jpg)
이 박사의 집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상은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사랑의 충만, 남편과 남편의 일에의 전력투구”를 꼽고 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생활은 내핍과 검약뿐이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이동할 때 프란체스카는 운전을 담당하였으며 무릎 담요는 온기 없는 차에서 남편을 기다릴 때의 필수 품목이었다.
![[편집]DSC06805.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c6ba9b76.jpg)
45년 해방되던 날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신문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날을 맞게 했다”고 하며 아내의 은공을 높이 치하하였다.
프란체스카는 처음 돈암장에 거주하고 다음해에 마포장으로 2개월간 이사했다가 10월에 이화장에 정착한다. 그녀는 한국이 독립하여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 꿈이어서 “돈암장의 안마당 청소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편집]DSC06823.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f124432d.jpg)
프란체스카여사가 손수 디자인하여 주한 외국부인들께 홍보할 목적으로 입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직실크 정장(미아리 양단공장 직조, 미화양장점 임복순 제작)
![[편집]DSC06822.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c9add7ee.jpg)
이화장의 기념관 끝쪽 방
해방 당시 훈련된 비서가 없었던 시절로 남편의 영문 구술에 따라 외교 문서를 타자기로 쳐서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요인 암살과 정치인에 대한 총격이 난무하던 이 시기에 70세의 이승만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총받이로 자처하며 붙어 다녔다.
![[편집]DSC06809.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c85ec027.jpg)
1948년 8.15일 대통령 취임으로 서양 영부인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녀는 꿋꿋했다.
![[편집]DSC06825.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f2e66368.jpg)
아무래도 기념관 건립이 필요한 것 같다. 가구와 의복, 무엇 하나 제대로 진열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편집]DSC06826.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f3c7dbe3.jpg)
![[편집]DSC06827.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f4915107.jpg)
프란체스카 여사는 내핍과 검약으로 경무대 안살림을 꾸렸고 ‘쪼끔,쪼끔 사모님’으로 별칭을 얻었다. 나이가 많은 대통령의 건강과 식사에 제일 많이 신경을 썼다. 일본 총독과 미군정 하지 준장이 살았던 경무대를 전혀 수리하지 않고 지냈으며 목욕통이 짧아서 다리를 펼수 있도록 구멍을 더 파는 것으로 만족했다. 미장원엔 가지를 않고 블라우스는 천을 끊어서 만들어 입고 옷, 양말은 기워 입었고 내외분의 내의와 양말은 직접 손으로 세탁하였다.
![[편집]DSC06742.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f54a5e91.jpg)
통일호나 될까? 비둘기호 쯤 되지 않을까? 1950년 대구지방 순시를 마치고 대구 시민들께 손흔드는 대통령 내외분...
![[편집]DSC06846.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04a6832f.jpg)
6.25가 발발하자, 무초대사가 영부인의 도쿄 피난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수원, 대전, 부산으로 임시 정부수도를 옮겨가는 누추하고 헐벗은 피난생활은 대통령 부부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은색으로 변해갔으나 그의 명랑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과 재빠른 언변은 남편을 늘 생기 있게 하였고, 남편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매일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편집][편집]DSC06837.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5e8f3f15.jpg)
어느하루는 대통령과 같이 밤새워 하와이와 미주에 있는 친지들에게 그리고 빈에 있는 친정가족에게 우리 부상병들을 위한 담요와 구호품을 보대달라고 37통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의 편지를 받은 우리 미주 동포들은 모두 울었다고 한다.
여사의 친정에서 제일 먼저 구호품을 보내왔고 하와이 미주에서도 속속 구호품이 도착했다. 전쟁 중에 미국사령관을 만나는 등 미국과의 관계도 내외가 함께 나서서 많이 풀어나갔다.
![[편집]DSC06838.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05595faf.jpg)
영부인은 6.25일부터 9월 5일까지 전쟁 비망록을 써놓았다. 9.28 수복을 앞두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희망과 기쁨을 김활란 박사와 나누기도 했다. 서울 환도 짐 속에 제일 먼저 타이프라이터를 챙기고 대통령의 낡은 스프링 코트을 접다가는 석달 전 한강철교를 건너 남하할 때 침통한 표정으로 자꾸 서울 쪽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라 프란체스카는눈물이 괴었다.
‘이제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가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가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편집]DSC06845.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01a23f8a.jpg)
이 사진 속의 양단 두루마기는 아직도 곱게 보관되어 있었다.
![[편집]DSC06840.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023c16e4.jpg)
![[편집]DSC06835.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1a5ad006.jpg)
![[편집]DSC06833.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1b76e09c.jpg)
![[편집]DSC06830.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6d54b94c.jpg)
![[편집]DSC06828.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2000fc74.jpg)
1960년 4.26 하야 성명을 내고 28일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다녀가라는 제의를 받고 한 달 후에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5월 29일 출발했다. 과도정부 수반이던 허정씨의 주선이었다.
하와이에서는 옛 친구들, 한인기독학원의 옛 제자들이 공경과 사랑으로 받들었으나 고국을 그리는 마음과 나라 걱정만 커져갔다.
![[편집]DSC06841.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afea21458.jpg)
![[편집]DSC06842.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508c25c7.jpg)
양자를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 문중에서 추진하여 17대 손 중에서 조카뻘 되는 청년 이인수씨를 입적시키고 12월 13일에 하와이에서 처음 대면했다.
이박사는 자나깨나 귀국만 생각하여 여비를 생각해서 이발비도 아꼈다. ‘내가 우리 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상기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남편을 보살피고 방문객을 맞고 감사한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일과였다.
주치의의 조언을 받고 62년 3월 17일 출발 준비를 마쳤는데 박정희 정부가 귀국을 만류한다는 전갈을 갖고 총영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후 이 박사는 다시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했다.
![[편집]DSC06844.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00284181.jpg)
65년 6월 말에 병세가 위독하여 인수씨가 다시 왔고 7월 19일 0시 35분에 임종했다. 조국의 품안에서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설움으로 남아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의식을 잃었다. 실의에 차고 병들기까지 한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본 프란체스카여사의 별명은 '베스트 와이프'(best wife)였다.
그녀는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며칠 후 모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여동생과 조카의 보살핌과 한국 유양수 대사 내외의 염려 속에회복이 되어갔다.
그녀는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며칠 후 모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여동생과 조카의 보살핌과 한국 유양수 대사 내외의 염려 속에회복이 되어갔다.
![[편집]DSC06860.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1efd271d.jpg)
아들 이인수씨는 68년에 조혜자씨와 결혼을 하고 70년에 첫 아들을 낳았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5월 16일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70회 생일을 맞이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70년 돌아와 1992년 이곳에서 92세로 여생을 마쳤다.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국제결혼으로 32년 같이 보낸 사랑하는 남편인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추방지 하와이에서 한스럽게 떠나보내고 마지막 귀착지 이화장의 22년간은 행복한 할머니로서의 생활이었다.
아들 이인수 씨와 며느리 조혜자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손자 병구와 병조를 1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가족의 기쁨을 맛보았다.
아들 이인수 씨와 며느리 조혜자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손자 병구와 병조를 1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가족의 기쁨을 맛보았다.
![[편집][편집]DSC06867.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012/re_4d0db72ec8e19.jpg)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국립묘지 공작봉을 매주 찾으며 날마다 남북통일과 집없는 사람을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빼지 않고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여인이 되어 한국을 사랑했다. 이화장 뜨락에 꽃이 만발할 때 많은 손님을 맞는 것을아주 좋아했다고 한다.형제 자매나 혈육하나 없는 이 땅에 돌아 온 프란체스카여사는 삶을 참 잘 마무리한 것 같다. 남편의 불명예를 대신 갚기라도 하는듯, 22년간 소문없이 현명하게 살다 가신 분이었다.
여성신문 : 대통령 부인들 (1)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여성사
여성동아 2006.10월호, 우남회보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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