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황조(宋家皇朝), 중국역사를 흔든 송씨가문 세자매 이야기.
여성 감독 장완정의 1997년 작품. ‘皇朝’로 불릴 만큼 권력을 지녔던 송씨 집안 이야기로 세 자매(송애령․경령․미령)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으로 점철된 혁명기 중국의 운명 등 중국 근현대사 전반을 이야기 한다. 1911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총통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건너가기까지 중국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출연 : 양자경, 장만옥, 오군매
중국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세 여성,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신교육을 받고 돌아와 당시 중국의 경제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세 자매가 있었다. 송아이링, 송칭링, 송메이링. 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옛 중국에 세 자매가 있었다. 한 명은 돈을 사랑했고, 한 명은 권력을 사랑했고, 다른 한 명은 중국을 사랑했다.” 라는 자막처럼, 각각 추구하는 가치는 달랐지만, 그들이 중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였다. 영화에서는 당시 중국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동시에, 세 자매의 러브스토리까지 비중 있게 다루었다.
중국 근현대사를 흔든 송씨집안의 세 자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그녀들의 일생만 보아도어렵지 않게 중국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송씨가문의 세 자매 대해 다뤄진 영화 <송가황조>를 소개한다
나에게는 세딸이있다.
한명은 돈을 사랑했고, 한명은 권력을 사랑했고, 다른 한명은 중국을 사랑했다.
(위) 실제 송씨 가문 세 자매의 모습. 왼쪽부터 첫째 송애령, 둘째 송경령,셋째 송미령
(아래) 영화 '송가황조'에서의 송씨 가문 세 자매의 모습.
이 작품은 신해혁명 이듬해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부터 타이완으로 철수하기까지의 약 40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 방식은 국민당 4대 가족의 하나인 송씨의 세 자매 중 둘째 경령과 셋째 미령의 회상과 독백이다.
회상의 첫 장면은 바로 경령과 미령이 베이징 천단에 있는 메아리 벽에서 말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메아리 벽은 한쪽 끝에서 말하면 다른 끝에서 들을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둘 사이의 이어지지 않는 대화는 양자의 소통 불가능을 암시하고 있다. 한창 개방의 물결과 의화단 운동(1900)으로 서구 물건을 배척하는 당시, 아버지의 압력에 밀려 자신들이 아끼는 인형을 불에 태운다. 세 자매의 각기 다른 태도-버리려 하지 않는 미령, 동생 인형까지 함께 불 속에 던지는 경령, 그리고 하나를 소매 속에 감추는 애령은 이후 이들의 삶의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각자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 청나라가 막을 내리고 근대 정치 시대가 열리려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때를 절호의 기회로 삼는 이도 있었다. 그는 바로 송가수로 흔히 찰리송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어린시절 미국에 가서 감리교단의 도움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결혼한 후 선교 일을 그만 둔 송가수는 인쇄 업에 손을 대어 주로 성경을 출판하며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데, 이 무렵 손문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썩어빠진 정책을 앞장서서 따르는 듯 서양문물을 배척했지만 안으로는 혁명가 손문의 친구로써 그의 혁명활동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만큼 생각이 남다르고 처세에 능했던 그는 자식교육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식들에게 일찍이 서양문물에 눈뜨도록 가르치고 어린 나이에 미국유학까지 보낸다.
손문은 송경령의 아버지의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국민당을 만들고 정치를 하였다. 1911년 10월에 우창(武昌)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1912년1월1일 중화민국(中华民国)이 건립되어 쑨원(孙文)이 초대 총통으로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후에 위엔스카이(袁世凯)에게 자리를 양보하고(191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다. (신해혁명(辛亥革命)1911年)
아버지의 전갈을 가지고 일본의 손문에게 갔던 둘 째 송경령은 일본에서 손문의 비서로 일하며 아주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려운 길을 자청해서 들어섰다. 손문의 꿈이 중국을 해방하고 새로운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면, 경령의 꿈은 여성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손문을 따라 그를 보좌해 나가던 경령은 아버지의 반대와 27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동지애를 넘어선 사랑을 싹 틔운다. 아무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친구를 도와왔다지만, 친구가 자신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당연지사. 딸을 방에다 감금시키다시피 하지만 경령은 창문으로 기어이 빠져나가고 만다.
야반도주하는 경령을 쫓아 할머니들이 전족을 한 불편한 발로 따라가는데, 신시대의 여성인 경령은 건강한 발로 힘차게 뛰어나간다. 그들의 발을 통해 억압받던 구시대의 여성이 자유를 누리는 신 여성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문과 경령은 원세개(袁世凯)가 죽자 1916년 3월 일본에서 상해로 돌아왔다. 쑨원은 1917년 8월 광동 국민정부의 국회비상회의에서 중화민국 군정부 대원수로 추대된다. 하지만 군벌과 정객의 배척으로 사임하고,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는 상해에서 저서에만 몰두한다. 1920년 11월 25일 송경령과 손문은 함께 상해에서 광동으로 돌아와 군사 정부에서 활동을 재개한다. 그리고 1921년 4월 손문은 광동에서 비상회의를 개최하여 중화민국 정식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고, 5월 5일 임시 대총통에 취임한다. 하지만 1922년 6월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 때 송경령은 몸을 던져 손문을 위험에서 구해냄으로써(황포 영풍함(永豊艦) 으로 대피함) 혁명사업에 대한 열정과 탁월한 헌신 정신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 때의 충격으로 경령은 평생 동안 애를 낳지 못하게 된다.
세 자매의 아버지 송가수는 1923년(54세) 결핵으로 사망하는데, 죽기 전에 둘째 송경령 부부를 용서하며 부부로 인정한다. 손문 군벌에 맞서기 위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1924년 1월 공산당과의 합작(제1차 국공합작)을 시도하고, 황포군관학교(1924년 3월)를 설립하게 되고 장개석을 교장으로 취임시킨다. 한국인 34명도 입학함. 장개석은 당시 37세1926년 국공합작의 국민혁명군은 북벌을 하여 군벌 세력을 무찌른다.
손문의 가장 촉망 받는 수하 장개석
나름대로 입신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도 부와 명성이 하늘에 닿을듯한 송씨 집안과 가장 긴밀한 고리를 이을 수 있는 방법으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지만 자신의 야심을 위해 미령과의 결혼을 추진하게 된다. 나름대로 눈썰미가 있었던 애령도 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을 적극지지해주지만 경령은 손문의 뜻과는 어긋나게 나가는 이 야심가 장개석을 반대한다. 미령도 이런 언니가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모두가 반대했던 손문과의 결혼을 지지했는데, 애령도 자신들의 막대한 부에 중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손문의 명성에 이젠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장개석을 한집안 사람으로 맞아들이는데 반대하는 경령을 이해할 수 없다.
1925년 3월 12일 손문이 기차로 북경으로 온 후 간염이 악화되어 서거한 후 송경령은 손문의 유지를 받들어 "러시아와의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견지한다. 1927년 비밀리에 소련을 거쳐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의 세계 사회주의 대국과 자본주의 대국을 순방한다. 이때 칭링은 마르크스사상을 연구하면서 유럽으로 망명한 중국혁명가들과 함께 중국혁명의 핵심 문제인 토지와 농민 문제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사상을 비약적으로 성숙시킨다.
어머니의 임종을 맞아 다시 경령은 돌아오지만 억압적인 정치가 장개석과는 도저히 뜻을 같이할 수 없었다. 편 공산당은 파업에 시위에 중국은 하루도 조용할 날 없고 반대파를 향한 테러가 밤낮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개석은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축출해나가고 경령은 거기에 반기를 들고 국민당을 탈당하고 장개석을 맹비난하고 나선다.
테러기도가 경령을 비껴가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이 자매의 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만든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못한 채 극과 극에서 대립한다.
일본은 지금 중국을 침략해서 점점 더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는데 장개석은 공산당 숙청에만 열 올리고 있고 이젠 모든 중국인들이 장개석에게 반기를 든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일본군이 저지른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곳 동북3성 군벌출신인 장학양(张学良)에 의해 장개석이 납치되는 일이 생긴다(*西安事变,1936年12月). 메이링은 남편 장개석을 구하기 위해, 그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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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령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 탁월한 재능과 뛰어난 미모와 배짱으로 남편 장개석을 서안에서 구출하고, 이 때 큰딸 애령은 미령과 장개석이 탄 비행기를 한 밤중에 남경 공항에 착륙시키려고 1백 여 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터를 긴급 동원하는 실화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서안사변 중 감금된 장개석의 목숨을 담보로, *제2차 국공합작(国共合作)이 이뤄지고 이를 계기로 경령과 미령은 잠깐 손을 잡고, 세 자매는 중일전쟁의 항전(抗战)에 매진한다.
미령은 직접 나서서 적들과의 협상은 물론 독불장군 장개석을 설득하고 그를 구출해 무사히 돌아온다. 이 사건은 미령은 막강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세 자매를 다시 협력해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하나가 된다.
중일전쟁 이후 세 자매는 서로의 상처, 사랑을 가슴에 묻어 둔 채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큰 딸 송애령(宋霭龄)은 홍콩(香港)으로, 둘째 딸 송경령(宋庆龄)은 대륙에 남고, 셋째 딸 송미령(宋美龄)은 대만(台湾)으로…
중국 최대의 재벌가인 송가의 2세들은 아름답고 용감한 사랑으로 막강한 재력과 권세를 휘두르는 “송가황조(宋家皇朝)”를 세운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 속에 빛나던 인생(人生)은 이제 중국의 신화(神化)로 남게 되었다.
송가황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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