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야 놀자
“옻칠은 내게 부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bluewaves
2010. 12. 17. 01:16
[향토자원이 세계명품]“옻칠은 내게 부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2010-12-02 오후 12:52:00 게재 |
일제가 남긴 유산으로 일본과 경쟁한다 나무부터 장인까지 집적화해 경쟁력 높여야 "일제때 중국 대만 한국 곳곳에 옻을 시험재배했는데 국산이 좋아서 집중적으로 길러 일본으로 공수해갔어요. 평북 태천하고 강원도 원성 옻을 최고로 쳤지." 당시 원성군이 바로 지금 원주시다. 박원동 강원도무형문화재 칠정제장은 "군청에 '옻계'가 있었다"며 "옻 내는 기술자는 징용도 면제해주었다"고 증언했다. 그만큼 원주 옻이 우수했다. 생산량도 많았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일사 김봉룡(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이 고향을 떠나 원주에 자리잡은 이유다. 양유전(60) 한남대 디자인학과 겸임교수를 비롯한 옻칠 장인 6명이 원주에 둥지를 튼 것도 질 좋은 옻때문이다. ◆밥벌이로 시작해 벌써 40년 = "한 40년 했나… 1967년부터니까…." 나전칠기가 성행하던 때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양유전 교수는 "밥 먹기 위해 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통영사람 1/3 가량이 나전칠기와 관련된 일로 먹고 살았고 규모가 큰 공방은 수십명씩 고용해 당시 가정에서 필수품처럼 여기던 자개장을 만들어냈다. "당시는 캐슈라고 옻칠하고 비슷한 걸 썼는데 김봉룡 선생만 유일하게 100% 옻칠을 했어요. 옻칠 얘기를 많이 들으니까 매력을 느꼈죠." 부모님은 7남매 가운데 막내인 그를 놓지 않으려 했지만 석달을 졸라 허락을 받아냈다. '3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굳게 약속도 했다. 그러곤칠에 빠져버렸다. 옻을 떨치지 못하던 첫 3년에는 후회도 많았다. 1년 가량 두문불출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옻이 올랐을 때였다. "선생님이 숙제를 주셨어요. 칠기의 원형으로 꼽히는 중국 한나라 칠기 '낙랑칠기'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내라는 얘기죠." 새로운 도전은 그를 다시 불타게 했다. 채화칠기 제작기법 즉 칠화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7년 제2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에서 첫 결과물로 '칠화벽화문쟁반'을 내놔 장려상을 받았다. 국내에서 처음 출품한 칠기 작품으로 기록돼있다. "한번 빠지고 나니 헤어날 길이 없다"는 말 그대로였다. 하루 네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매달렸다. 손가락 마디는 나무와 사포 등에 치여 생채기 투성이가 됐고 몸무게는 20㎏ 가까이 줄었다. 가을에 열리는 공예전 출품준비를 하느라 부모님 찾아뵙는 일도 뒷전이 됐다. 양 교수는 "1년에 한차례 어머니 생신에만 집을 방문했다"고 돌이켰다. 아버지 생신은 봄이라 출품준비에 여념이 없어 그냥 지나쳤고 공예전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명절에도 가지 못했다. 양 교수는 "10년 뒤 아버지, 15년 뒤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니 고향이라고 갈 데도 없어졌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매달려야 할 숙제 = 1980년 자신만의 공방을 내기는 했지만 스승이 내준 숙제는 여전히 그의 작업 중심에 있었다. 스승이 건네준 접시에 그려진 낙랑칠화를 베끼고 또 베꼈다. 스승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은 냉담했다. 낙랑칠기 재현은 모방일 뿐 창작도 아니요 전통의 계승도 아니라 인정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15년 전부터 직접 도안을 시작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재주가 없어서 미술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도 했다"며 "손이 퉁퉁 부어 작업을 못하게 될 때까지 계속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 그의 칠기에는 물고기부터 시작해 거북 사슴 학까지 등장한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을 주로 응용했다. 각종 공예대전 입선 십여차례, 2005년 일본 이시가와국제칠전 은상은 그 결실인 셈이다. 그는 "일본 칠은 세계 최고로 꼽히지만 내 상태는 일본을 넘어섰다"고 자신했다. 아직 충분치는 않다. 숙제를 마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고 말했다. 칠에 대한 이론서가 아닌 기술적 문제를 담은 책을 발간하겠다는 계획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4년 전부터 일기 형식으로 색을 만드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산 안료를 쓰더라도 우리 칠화에 맞는 색은 계량화해야겠다는 구상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다행히 도안 부분에서는 진전이 있다. 김봉룡 선생 유족들이 최근 보관하고 있던 도안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양 교수는 자신의 도안집 출간과 관련해서는 "도안이 아직 충분치도 않거니와 그 도안을 사용할지 말지는 뒷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함께 먹고 살 방법 고민 중 = 15년간 원주시청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결과 시장이 네 번 바뀌고 나서 옻이 지역특화산업으로 선정됐다. 10㏊에 달하는 재배단지에서는 일제가 심은 옻나무가 아닌 새로운 원주옻이 자라고 있고 옻을 내고 칠을 하는 장인들은 지난해 원주시 봉산동에 문을 연 옻문화센터에 모여 작업을 하며 냉·난방비 걱정을 덜게 됐다. 20여년 전부터 강원도무형문화재 지정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대신 어려운 환경에서 옻을 만지고 있는 후배와 지인 3명을 추천했다. 그가 받은 걸 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나도 숱한 사람들 돈을 떼먹었다"며 "빚 독촉도, 뒷말도 없이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함께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죠. 칠이 내게 준 교훈이기도 해요. 칠은 내게 부처님이자 하느님이에요." 요즘은 예전의 그처럼 옻칠을 배우겠다며 찾아오는 후학들이 제법 있다. 그는 "고맙고 다행"이라면서도 "작품 만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받아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적어도 먹이고 재우기는 해야죠. 도제수업을 해야 배울 수 있거든요. 수강료 받으면서 가르칠 게 아니에요. 시간이 좀 지나면 용돈도 줘야 하고. 그래야 선생 자격이 있죠." 그가 아직 중요무형문화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4수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 교수는 "장학금을 주면서 2명을 가르칠 수 있다"며 "생계유지비도 나오기 때문에 돈 벌겠다는 욕심이 없다면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칠기마을같은 게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옻나무를 기르는 사람부터 옻을 내고 정제하는 사람, 칠공예하는 사람이 각자 집 옆에 독립된 작업장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곳이요. 마을 입구에 전시장과 판매장까지 있다면 관광상품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