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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1. 21:01 살며 사랑하며
봉사와 나눔으로 사랑 실천하는 이근후 박사
자연에 순응한, 그 아름다운 일생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의미로,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항상 낮은 데로 임하는 물의 덕(德)을 일컫는 말이다.
이근후 박사를 인터뷰하며 내내 이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평생을 정신과 전문의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젊은 날 우연히 네팔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한 이래 30여 년을 한결같이 그들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광명 보육원 아이들의 대부로 원조가 아닌 감성의 아름다움을 키워주었다. 한쪽 눈이 실명에 이른 지금도 팔순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맑기만 하다.


히말라야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의 위령제 소식이 들려오던 날, 이근후(76) 박사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목숨을 담보로 히말라야에 오르는 산악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히말라야와 인연이 깊고, 히말 라야의 설산과 교감을 나눈이 박사의 회한은 깊을 수밖에 없다.
“히말라야는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꼭 가 봐야 할 곳이에요. 인간을 압도하면서도 맑은 영혼의 세계를 보여 줍니다. 영적인 교감이 들죠. 산은 정복할 대상이 아닙니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어머니의 품에 잠시 안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이 품어줘야 등정 또한 가능하죠. 산에서 건강을 얻기 전에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게 더 큰 의미가 되겠지요.” 이 박사는 한국 산악회의 전설적인 산악인들에게 전문 등반을 배웠고, 경북대 의대 시절에 대학생 최초로 경북 학생 산악연맹 창립에 깊이 관여한 원로 산악인이다.
“고등학생때 새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이 훈시를 하시며 ‘힐러리’라는 사람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최고봉에 올랐는데, 너희도 그런 기개를 배우라 하시더군요.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가슴에 남았지요. 그분이 제게 산을 심어준 첫 어른인 셈이죠.”
1982년, 뜻하지 않게 히말라야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학술 원정 대원으로 마칼루 원정 참가 제의를 받은 것이다. 히말라야에 관한 논문을 세 편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6개월간 네팔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쿰중에서 우연히 힐러리 경을 만났다.

“인연의 힘이 놀라왔어요. 학생 시절내 마음에 남았던 그를 한국인 최초로 만났지요. 사비를 털어 오지 주민을 위한 학교와 병원을 짓고, 네팔 산림의 황폐화를 막는 자연보호운동에도 앞장서는 그 에게서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주머니에 있던 100달러중 50달러를 후원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기쁘더군요. 힐러리경과 만남은 이후 제 인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네팔에 심은 사랑의 실천


네팔은 산악인이나 여행가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곳이다. 신령스러운 설산이 무수히 솟아 있고, 세계적인 극빈국이지만 자연에 순응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네팔인의 원초적인 순수함에 매료된다. 이 박사는 당시 네팔 주민이 어려운 병도 아닌데 약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무척 가슴이 아팠다. 귀국 후 한국간질 협회 (장미회)의 도움을 받아 1984년부터 해마다 환자들이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약품을 보냈다. 네팔에서 이화여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제자와 인연으로 무의촌이던 산골오지 돌카에 병원을 지었고, 1989년부터는 당시 몸담고 있던 이화여대 부속병원 의사와 이대생으로 구성된 네팔이 화의료봉사단을 결성해 매년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렇게 네팔에 첫발을 디딘 이후 30여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네팔을 방문해왔다. 찬드라 구릉이라는 네팔 여성을 면담해 구출한것 도 그다. 코리언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왔다가 6년 동안 정신병자로 오인되어 갇혀 지낸 찬드라의 사정을 밝히고 귀국을 도왔다. 그를 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네팔인의 영원한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혹 네팔에 가려거든 초라하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네들의 눈높이로 모든 걸 바라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럼 더 많은 걸 보고 얻을 수 있습니다.”

정년퇴직으로 의료봉사가 어려워지자 네팔 포카라에 ‘네팔·이화 우정의 집’을 지어 명상센터와 환자 보호소로 쓰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사는 집에(사)가족 아카데미아를 발족해 네팔 문화를 소개하는 ‘예띠의 집’을 마련하고, 네팔과 문화교류를 시도했다. 네팔 시를 번역해 시집 <새들의 노래>를 내고, 네팔 화가들의 그림을 한국의 문화 소외 지역을 찾아다니며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올해는 춘천의 퇴골 마을에서 전시중이다. 특별히 후원해주는 곳도 없어서 초청한 네팔화가의 숙식도 이 박사의 집에서 해결한다. 네팔화가를 위해 사무실 한쪽에 마련한 침상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전생에 네팔리가 아니었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해에는 네팔 대통령에게서 감사의 상을 받기도 했다.
무하 문화사랑방, 묻지 말고 사랑하기
이 박사의 봉사 정신은 네팔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머리 속에는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심어졌다. “우리집 방 한 칸에 부모와 다섯 형제가 세들어 살았는데, 그 중 둘째가 저와 초등학교 동기였어요. 달라는 소리도 안 하는데 쌀도 퍼다 주고 밀가루도 퍼다 주면서 이 친구는 내가 끝까지 도와줘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 만났을 때도 친구가 제법 성공했지만 식사 값은 늘 내가 냈지요. 추억의 위계질서랄까. 하하. 늘 주어야 마음이 편해졌어요.”

외동아들로 자랐지만 어머니는 적십자 활동을 하는 신여성으로, 엄격하고 독립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키우셨다. 중학생 시절 대구집 근처로 한국전쟁 피란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사는 광명 보육원이 이사온 것은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보육원에 드나들며 밤낮없이 아이들을 돌보셨고, 자신도 스스럼없이 그곳 아이들과 어울려 자랐다. 막연히 어른이 되면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돌봐야겠다 는 마음이 싹튼 것이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1967년 군의관으로 있던 서울 창동 부근에 어린시절 인연을 맺은 광명 보육원이 있음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이후 토요일마다 보육원을 찾아 진료 봉사를 이어왔다. 그 인연의 끈이 40년간 이어져 그는 정년퇴직하면서 경기도 장흥의 광명 보육원에 3층짜리 건물을 기증하고 무하 문화사랑방을 열었다.

무하(無何)는 환자를 진료할 때 따지지 말라는 뜻을 담은 그의 호다. 그는 이호처럼 살아왔다. “무하 문화사랑방은 보육원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었어요. 연말이면 시설에 찾아오는 분들이 대부분 라면이나 과자 등을 가져오는데, 주는 건 고맙지만 아이 들에게 매일 라면만 먹일 수는 없지요. 아이들은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거든요. 요즘은 부모가 있어도 자식을 보육원에 버리는 일이 많아서 아이들의 상처가 더 깊어요. 보육원 아이들이 마음의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감성을 키워주기 위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었지요.” 그는 예술을 하는 지인들을 사랑방 손님으로 초대했다. 매년 백일장을 열어 소설가 박완서 씨가 시상을 했는데, 한 아이는 학교에서 박완서 선생님이 와서 상을 줬다는 얘기를 했다가 거짓말 한다고 교사에게 꿀밤을 맞았 다는 일화도 있다. 유명 화가의 전시회도 열린다.

“작품을 창고에 보관하지 말고 보육원에 한 달만 걸어달라”는 이 박사의 권유에 모두 진품을 내건다. 사물놀이 전문가를 초청해 매주 토요일 원생들에게 교육하는가 하면, 전문 산악인이 원생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북한산에 오르는 등 무하 문화사랑방에서 펼쳐지는 문화활동은 고품격. 이 박사가 보육원에 도입한 문화 효과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인사도 하지 않던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보육원생임을 감추고 문제를 일으키던 아이들이 이제는 보육원을 자랑스러워하며 학교 친구들까지 데려와요. 발표력이 생기고 감성도 뛰어나 경기도 내백일장 상은 우리 원생들이 휩쓸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그동안 낸 시집이 열권도 넘지요.” 이 박사는 아이들의 성장을 문화예술의 힘으로 돌리지만, 그 뿌리에는 이 박사의 사랑과 정성이 알알이 맺혀 있음이 보이는 듯 했다.

무하 문화사랑방은 모든 것이 자율적이다. ‘자연과 예술, 문화와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이 모임에 참석해 보육원봉사 활동도 하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이런 모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퍼진다면 결국 우리 사회가 밝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학교에서 다투고 오면 집에 와서 다시 벌을 받았어요. 다툼은 둘 다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또 여동생과 사과를 반쪽 씩 주시는데 오빠를 조금 더 안 준다고 불평하면 그 반쪽을 다시 반으로 가르셨죠. 억울해서 울면 다시 반쪽으로…하하하, 참 대단한 분이에요.”
왜 사는가,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
훤칠한 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 박사는 맑은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배어 있다.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나눔과 봉사로 살아온 이가 누릴 수 있는 표정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2003년 의료봉사를 마치고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망막이 터져 귀국 후 병원을 찾았으나 끝내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 원망이나 후회를 할 법한데도 그는 실명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최고의 가르침은 말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일 터. 이 박사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하고 최선을 생각하는, 생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품위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서울시민에게 행복한가 하고 물으면 몇 사람이 행복하다고 답할까요. 세상은 갈수록 편리해지고 문명은 발달하지만, 사람들은 불안함과 불행을 더 많이 느낍니다. 네팔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하다고 답합니다. 3천~4천명 혈압을 쟀는데 혈압이 높은 사람이 없어요. 자연에 순응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해답일거예요.” 서울 세검정에서 이 박사 내외와 2남2녀의 부부, 손자들까지 3대가 함께 사는 ‘예띠 의 집’ 헌장(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나누면서 항상 이웃과 함께 이를 봉사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합니다)이 그의 삶을 요약한다. “봉사로 일관된 삶은 내가 작정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하게 됐지요. 나는 그동안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습니다. 또 내 자 질보다 많은 인정을 받았어요. 내 삶에 무엇이 작용했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삶이 이끄는 대로 살아 왔지요. 분명한 것은 내 힘만으로 살아온 게 아니라는 점이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묵직한 생의 선물을 받은 듯 가슴이 차오른다. 무성하게 푸르던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 제 잎을 고요히 떨구는 자연의 순리를 보며, 꼭 그만큼 깊어져야 할 우리네 삶을 반추했다.

“눈을 수술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받다가 심장에 이상이 생긴 걸 발견했고, 서둘러 심장 수술을 해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으로 세상을 보니 불편하지만, 그래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에요.”
취재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사진 박찬웅
INTERVIEW (2011년 11월545호) ⓒ www.miznaeil.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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