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유물

조선 마지막 황태자의 일생

bluewaves 2011. 10. 30. 10:53

조선 마지막 황태자의 일생

영친왕의 일생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순헌 귀비는 영월 엄씨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철종 5년 갑인년(1854년)에 태어나셨습니다. 친정은 서울 서소문 안에 있었으며 철종 10년 기미년(1859년)에 아기 내인(內人, 흔히 나인이라고 발음하나 내인이 옳다고 함)으로 입궁하셨죠. 이후 고종(광무황제)의 정실이신 중전민비(명성황후)를 측근에서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기도 하였습니다. 만 32세 (1896년)에 승은(承恩)을 하였으며 이를 안 중전민비(명성황후)가 죽이려 하였으나 고종(광무황제)이 중전민비에게 사정하여 죽지않고 궁 밖으로 내 쫓깁니다.

영친왕 일가


을미년(1895년) 음력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흉계로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후 명성황후가 시해된지 닷새 만에 고종(광무황제)은 엄상궁을 궁으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 후 1897년에 영친왕이 태어나게 됩니다.

영친왕은 이름은 은(垠)으로 고종에겐 일곱째 아들이 되며, 융희황제(순종)의 이복동생이신 것입니다. 1900년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립되었으며 그 해 12월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온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하여 11세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1907년 황태제(弟)로 책봉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 유학이라는 명목아래 인질이 되어 일본에 끌려갑니다.

일본으로 끌려갈 당시의 영친왕과 이토 히로부미

인질이 되어 끌려간지 4년째인 1911년 여름에 일본인들이 영친왕이 지내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찍어서 고종에게 보냈는데 그 필름에는 영친왕이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주먹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엄비는 극심한 충격을 받아 급체를 일으켜서 이틀뒤에 별세하시게 되고요.

고종이 죽은 1919년 1월은 일제가 전 세계에 한일병합을 조선과 일본의 ‘행복한 결합’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노미야의 맏딸인 마사코(方子)와 정략 결혼하게 된다.

영친왕이 일본 왕녀 마사코와 결혼한 직후 찍은 사진



1910년 국권피탈로 융희황제가 폐위되자 왕세제로 불렸고.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이왕(李王)이라 하였습니다.명목상 이왕이었지 귀국하지 못하였고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장에 이릅니다.

8 ·15광복 후 한국으로 귀국하려 하였으나 한국정부로부터 귀국을 허가 받지 못하였으며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왕족신분에서 평민으로 강등당했으며 재일한국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 후 계속하여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1963년 11월 정통성을 인정받기위한 군사정권의 배려로 56년 만에 환국을 하시게 됩니다. 그는 장애인 재활단체인 '자행회''명휘원'등을 세우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환국후에는 이미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는 병이 깊은 상태로써 7여년에 걸친 병상생활을 하다가 1970년 74세를 일기로 한많은 생을 마치시게 됩니다.

직접 설립한 명혜학교 앞에서 포즈를 취한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



그의 미망인 방자(方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면서 명휘원을 경영하였으며 영왕기념사업회, 자혜학교, 명혜학교 등을 건립하여 영친왕의 유업을 계승하였습니다.1989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안치 되었습니다.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에게는 진과 구 두 아들을 두었으나.진은 일찍이 죽고 1979년 일본으로 떠난 뒤 1982년 이혼 한뒤 홀로 지내다 2005년 자신이 태어났던 舊프린스호텔 옆 신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한 많은 일생을 마칩니다.

참고로 마지막왕손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광무(고종)황제폐하께서 황제로 칭하고서 대한제국이 생겼습니다.그리고 황제법에 따라서 황제의 10촌까지만이 황족으로 인정받습니다. 한마디로 전주이씨라고 다 황족이 아니라는 거죠.
광무(고종)황제폐하의 첫째인 융희(순종)황제폐하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나머지로 의친왕과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있습니다.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에게는 진과 구 두 아들을 두었으나. 진은 일찍이 죽고 구는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82년 이혼 한뒤 2005년 자신이 태어났던 구 프린스호텔 구관 옆에서 쓸쓸히 생을 마갑합니다.

고종의 손자인 이석 씨가 부친 의친왕을 소재로 한 소설 '의친왕 이강'의 출간에 맞춰 운현궁에서 기자들과 만나 의친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009.3


그럼 의친왕의 자손을 살펴보면 의친왕께서 워낙 활달하고, 게다가 둘째라는 이유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지 않았죠.미국으로 유학까지 가셔서 외국인과 낳은 자손까지 있습니다.
여기서 그래도 알려진 인물만 본다면 이구공이라고 계시는데 일본에 볼모로 계셨다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돌아가셨고, 이우공이라고 계시는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끌려와 원폭때 돌아가셨습니다.그외 아주 많은데 넘어가고 현존 하시는 분을 살펴보면 <비둘기 집> 노래를 부르신 이석공이 있고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책을 쓰신 분이 계시는데. 1960년 그룹 비둘기집 멤버로 활동하여 1967년 2집 앨범 비둘기 집,두마음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
20년째 전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씨는 현재 황실문화재단을 세워 전국을 돌며 역사 강의를 펼치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전주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를 맡고 있다. 슬하에 이홍, 이진 2딸이 있다.
올해 초에는 1967년 큰 인기를 끌었던 노래 '비둘기 집' 이후 42년 만에 세 번째 음반을 내고 불 탄 숭례문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 '아! 숭례문' 속에 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