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정몽주
[스크랩] 포은정몽주
. 생애
1) 출신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 경북 영천에서 정운관(鄭云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의종(毅宗)대에 추밀원지주사로 인종(仁宗)의 유지를 받들어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 간신들의 비방을 받고 자결한 정습명(鄭襲明)이다.
정몽주의 초명(初名)은 몽란(夢蘭)과 몽룡(夢龍)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에 놀라 깨어나 그를 낳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또 정몽주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낮에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로 올라
가는 꿈을 꾸다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배나무에 그가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몽룡이라고
고쳤으며, 그가 성인이 된 뒤 다시 몽주(夢周)로 고쳤다.
정몽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남달랐고,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이 일곱 개나
있었다고 한다.
夢 꿈
世人多夢寐 세인다몽매 세상사람들 꿈을 자주 꾸나니
夢罷旋成空 몽파선성공 깨어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自是因思慮 자시인사려 스스로 그로 인하여 깊은 생각하나니
何能有感通 하능유감통 어떻게 해야 감통을 얻으리오
殷家得傅說 은가득부열 은나라 고종은 부열을 얻었고
孔氏見周公 공씨견주공 공자는 꿈 속에서 주공을 뵈었다
此理人如問 차리인여문 사람에게 이 이치 적용을 묻는다면
當求至靜中 당구지정중 먼저 정신을 고요함에 이르게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정몽주는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이숭인
(李崇仁),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수학하여 1362년에는 예문관이 수찬,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딛었고, 1364년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삼선(三善)·삼개(三介) 형제의 여진족
(女眞族)을 화주에서 토벌할 때에 그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瞻星臺 첨성대 첨성대
瞻星臺兀月城中 첨성대올월성중 첨성대는 반월성에 우뚝 솟아있고
玉笛聲含萬古風 옥적성함만고풍 옥피리는 만고의 풍여를 머금엇도다
文物隨時羅代異 문물수시라대이 문물은 시대에 따라 신라와 다르나
嗚呼山水古今同 오호산수고금동 아, 산과 물은 옛날과 지금이 한가지로다
이후 정몽주는 여러 관직을 거쳐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올랐다. 이때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
를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상제(喪祭)가 문란하고 해이해져 사대부들마저도
100일이 지나면 탈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몽주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상례를 극진히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 그의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워 이를
표창하였다.
冬至吟 1 동지를 노래함 1
乾道未嘗息 건도미상식 하늘의 도는 일찍이 쉼이 없는 것이고
坤爻純是陰 곤효순시음 땅의 효는 순전히 음의 기운이라네
一陽初動處 일양초동처 일양이 처음 움직인 곳에서
可以見天心 가이견천심 하늘의 마음을 살필 수 있다
1367년, 정몽주는 예조정랑으로서 성균관 박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밖에 없었는데, 정몽주는 성균관 박사로서 유교 경전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였으며 이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그러나 정몽주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해석을 듣게 되자 그의 학문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온 사서통(四書通)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이 일치하자 사람들은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하며 오해를 풀었다.
동지음 2 동지를 노래함 2
造化無偏氣 조화무편기 조화는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어
聖人猶抑陰 성인유억음 성인은 여전히 음기를 억제한거네
一陽初動處 일양초동처 일양이 처음 움직인 곳에서
可以驗吾心 가이험오심 내 참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네
이색은 "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면서 그를
'동방 이학의 시조', 즉 우리 나라 성리학의 원조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색으로부터 이와 같은 극찬을 받을 정도로 정몽주는
성리학에 통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 성균관 사예가 되었고 1371년에는 잠시 태상
소경으로 옮겼다가 곧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1375년에는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제수
되었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贈僧 증승 스님에게
松風江月接沖虛 송풍강월접충허 솔바람 강에 비친 달이 텅 빈 공중에 닿으면
正是山僧入定初 정시산승입정초 이 때가 곧 산속 스님 선정에 드는 처음이로다
可吲紛紛學道者 가신분분학도자 가소롭도다 어지러이 도를 배운다는 자들이
聲色之外覓眞如 성색지외멱진여 성색의 밖에서 진여의 진리를 찾는다고 하는구나
2) 위기를 기회로 바꾼 뛰어난 외교관
정몽주는 처음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들과의 교류를 주장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철저히 원나라를 배척하고 개혁을 통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공민왕(恭愍王)의 뜻과 일치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다.
渤海懷古 발해회고
唐室勞師定海東 당실노사정해동 당 나라 군사들이 힘들여 해동을 평정했으나
大郞隨起作王宮 대랑수기작왕궁 대조영이 바로 따라 일어나 왕궁을 지었다
請君莫說官邊策 청군막설관변책 청컨대 그대여 변방의 정책을 말하지 말라
自古伊誰保始終 자고이수보시종 자고로 그 누가 처음과 끝을 보장하리오
정몽주가 배원친명주의(排元親明主義)를 내세운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따른
선택이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세우자 원나라는 북쪽으로 좇겨가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리학을 연구한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원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를 중국의 정통적인 주인으로 인식했다.
또한 권문세족에 맞서 고려 조정을 개혁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이
의지하고 있는 기존의 원나라보다는 신흥국인 명나라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蓬萊閣 봉래각
採藥未還滄海深 채약미환창해심 불사약 캐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푸른 바다 깊고
秦皇東望此登臨 진황동망차등림 진시황은 동쪽 바라보며 여기서 누대에 올랐어라
徐生詐計非難吾 서생사계비난오 서시의 거짓 계교를 깨닫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自是君王有欲心 자신군왕유욕심 여기에서 군왕에게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민왕이 환관 홍윤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외교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민왕이 살해된 뒤 친원파인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고려 고정에서는 명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사신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정몽주는 대의를 내세워 "요사이의 변고는 마땅히 국왕께 자세히 아뢰어 명나라로
하여금 의혹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 먼저 의심하여 백성들에게 화를 짓게 하겠는가?"
라고 주장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김의의 사건을 해명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명나라로서도 아직
원나라의 잔존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의 배후에 있는 고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몽주가 학문뿐 아니라 국제 정세 또한 정확하게 궤뚫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湖中觀魚1 호중관어1 호수에 물고기를 보다 1
潛在深淵或躍如 잠재심연혹약여 깊은 못에 잠긴 듯 혹은 뛰어오르는 듯
子思何取著又書 자사하취저우서 자사는 무엇을 취해서 책에 적었을까
但將眼孔分明見 단장안공분명견 장차 눈동자로 분명히 봐야 하는 것은
物物眞成潑潑魚 물물진성발발어 산물마다 활발한 물고기가 되게 하는 것
이때 명나라의 세력에 밀려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 즉 북원(北元)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그러자 권신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나가 사신을 맞이하려 했다.
당시 고려의 지배층인 권문세족들은 원나라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이용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개혁과 중흥을 위해서는 원나라보다는 명나라
를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확신하고 있던 정몽주로서는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곧 문신 10여명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난번 원나라가 북방으로 쫓겨가고 명이 일어나 사해를 영유하자 공민왕께서는 분명히
천명을 알고 표문을 받아들여 신하라 일컬었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왕에
책봉하였고, 주는 것과 바치는 것이 서로 연속하여 이제 6년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전하께서 영단을 내려 원의 사신을 잡고 원나라의 조서를 거두며 오계남과 장자온 및 김의가
데리고 갔던 자들을 모두 결박하여 명나라로 보내면 애써 변명하지 않아도 사실이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 다음 정요위와 약속하여 군사를 양성한 뒤 북쪽으로 향한다고 성명하면
원의 남은 무리들이 멀리 도망하여 나라의 복이 무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소로 인해 정몽주는 정치적으로 첫 시련을 맞게 된다. 친원파인 지윤과 이인임에
의해 언양으로 유배된 것이다. 정몽주는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채 곧바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여기에는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친원파 권신들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다.
湖中觀魚2 호중관어2 호수에 물고기를 보다 2
魚應非我我非魚 어응비아아비어 물고기는 당연히 내 아니고 나는 물고기 아니니
物理參差本不齊 물리참차본부제 사물의 이치는 제 각기여서 본래 같지가 않네
一券壯生濠上論 일권장생호상론 한권 장자의 호수 다리 위에서의 논변으로
只今千載使人迷 지금천재사인미 지금까지 천년 동안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구나
당시 왜구의 잦은 약탈과 방화로 해안가 마을 대부분이 텅 비기에 이르자, 고려
조정은 1375년 나흥유(羅興儒)를 일본 패가대에 보내 화친을 꾀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나흥유를 첩자라 하여 잡아 가두고는 굶겨 죽이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10월에야 겨우 풀어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지윤과
이인임은 왜구가 계속해서 창궐하자 1377년 정몽주를 패가대에 사신으로 파견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패가대의 주장을
만나 뛰어난 말솜씨로 고금의 교린하는 예를 이해시켰다. 정몽주의 인품과 학식에 탄복한
패가대 주장은 그를 공경하며 후하게 대접했다. 또한 정몽주는 시를 써줌으로써 많은
승려들의 공경을 받았는데, 그들은 날마다 정몽주에게 경치 좋은 곳으로 구경가기를 청할
정도였다.
夜客 야객 밤 손님
客夜人誰問 객야인수문 나그네를 밤에 누가 찾으리
沈吟欲二更 침음욕이경 조용히 읊조리니 이경이 되려 한다
詩從枕上得 시종침상득 시는 베개머리쫓아 얻고
燈在壁間明 등재벽간명 등잔불은 벽 사이에 있어 밝구나
默默思前事 묵묵사전사 묵묵히 지난 일을 생각하며
遙遙計去程 요요계거정 곰곰이 앞으로 갈 길을 헤아려 본다
俄然睡一覺 아연수일각 깜박 졸다가 깨어보니
童僕報鷄聲 동복보계성 아이놈이 닭이 운다 알려 주노라
정몽주는 그 해 7월 귀국하면서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윤명과 안우세 등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그를 죽이고자 했던 지윤과 이인임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주는 오히려 이 공로로 승진하게 되었다. 정몽주는 일본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378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된 데 이어 전공, 예의, 전법, 판도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했으며 1380년에는 이성계와 더불어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시키고 돌아와 밀직
제학으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정몽주는 참서밀직시시에 올랐다가 다시 정당문학
(政堂文學)으로 승진하였다.
石鼎煎茶 석정전다 돌솥에 차를 다리며
報國無效老書生 보국무효노서생 나라의 은혜를 갚지 못하는 늙은 서생이
喫茶成僻無世情 끽다성벽무세정 차 마시며 세상피하니 세상 마음 없도다
幽齊獨臥風雪夜 유제독와풍설야 눈보라치는 밤에 그윽한 재실에 홀로 누워
愛聽石鼎松風聲 애청석정송풍성 돌솥에 들려오는 솔바람소리 즐겨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