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여 년 전인 1779년 11월. 스위스 여행길에 나선 이립(而立·30세)의 젊은 괴테는 알프스의 웅장한 빙하 앞에서 호흡을 멈춘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거대한 빙하계곡의 위용에 충격을 받는 괴테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멋진 풍경”이라며 찬사를 쏟아냈다. 이듬해 이 빙하를 찾았던 독일 시인 빌헬름 하인제도 “지구 어디에서도 이처럼 훌륭한 풍경을 발견할 수 없다”고 회고했다. 18세기의 대문호들을 감탄하게 한 그 빙하는 스위스 발레 주의 동쪽 끝에 위치한 론 빙하로 푸르카 고개와 그리무젤 고개 사이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괴테와 하인제를 태우고 달리던 우편마차 대신 스위스 산악지대 곳곳을 누비는 노란색 우편버스가 푸르카 고갯길을 힘들게 오른다. 차창 밖으로 증기기관차와 빙하특급이 달리던 톱니바퀴 철도와 험준한 산허리를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는 도로가 달력 그림처럼 펼쳐진다.
겨울철 폭설 때문에 6∼10월에만 문을 여는 벨베레데 호텔은 론 빙하 하이킹의 출발점. 해발 2435m 높이의 푸르카 고갯길에 위치한 호텔에서 빙하까지는 1㎞ 남짓. 형형색색의 야생화로 단장한 천상의 꽃길은 기념품점 앞 전망대에서 아찔한 절벽을 만난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오베르발트 마을과 유럽의 지붕으로 불리는 알프스의 고봉준령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푸른 초원으로 바뀌었지만 20세기 초까지 빙하는 오베르발트 일대를 뒤덮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빙하는 1년에 60∼80m씩 녹아 없어졌다.
1830년에 오베르발트에 마을이 들어서고 20세기에는 빙하가 사라진 정상 부근에 벨베레데 호텔이 문을 열었다.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인 삼각형 모양의 봉우리는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위치한 마테호른 산(4478m).
론 빙하 하이킹의 하이라이트는 수억년 세월을 간직한 100m 길이의 얼음터널. 거대한 빙하에 닳고 닳아 반들반들해진 암석지대를 내려가 나무다리를 건너자 찬바람을 토해내는 빙하가 푸른 입을 벌리고 있다. 얼음터널은 1870년 이래 해마다 조금씩 뚫어 만든 관광용이다.
한여름에도 섭씨 2∼3도가 유지되는 얼음터널 속으로 들어가자 빙하의 속살이 드러난다. 태고의 푸른빛을 간직한 얼음터널에서는 빙하가 녹아 빗방울처럼 떨어진다. 얼음터널 벽에는 수억년 전에 빙하에 갇힌 온갖 이물질들이 박제가 되어 반긴다. 빙하 속에서 숙성한 와인 한 모금은 얼음터널 여행객을 위한 특별 이벤트다.
프랑스 론 강의 발원지인 빙하는 지금도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 빙하가 사라진 자리에서 호수가 나날이 면적을 넓혀가고 폭포수로 변한 우윳빛 물은 오베르발트 마을을 향해 수백 미터를 곤두박질친다. 빙하의 균열로 생긴 옥색 크레바스 너머로 작은 트레일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지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배낭을 둘러맨 하이킹 족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걷기 여행의 천국인 스위스의 트레일은 모두 6만㎞. 이중 론 빙하가 위치한 150㎞ 길이의 곰스 계곡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2∼3시간을 달려 만나는 발레 주의 주도인 시온은 스위스의 대표적 전원도시로 와인루트의 중심지이다. 발레 주는 스위스의 26개 주 중에서 세 번째로 큰 주.
포도밭을 가로지르는 발레의 와인루트는 도보길 66㎞, 자전거길 83㎞ 등. 스위스 와인의 40%를 생산하는 포도 산지답게 수확을 앞둔 청포도와 적포도가 알알이 영근 와인루트에서 몇 차례 와인테스팅을 경험해보면 누구나 소믈리에가 된다.
발레의 와인루트 중 시온의 포도밭 수로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났다. 수오넨으로 불리는 수로는 논에 물을 대는 한국의 봇도랑과 비슷한 급수 시스템. 빙하 녹은 물을 끌어와 덥고 건조한 지역의 포도밭에 공급하는 수오넨의 길이는 무려 1800㎞. 발레 주는 수오넨을 정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9㎞ 길이의 작업로에 노란색 다이아몬드 표지판을 설치해 와인루트로 활용하고 있다.
시온의 와인루트는 경사가 급한 표고 150m의 산허리를 지나는 오솔길이라 자칫 천길만길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엄습한다. 하지만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론 강을 비롯해 철도, 도로, 건물 등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져 서너 시간을 걸어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시온 인근의 한적한 시골마을인 살리온에는 ‘파리네의 트레일’로 불리는 마을길이 있다. ‘알프스의 로빈후드’로 불리는 파리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트레일로 전형적인 스위스 시골마을의 한적함이 골목마다 묻어난다. 150여년 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파리네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위조 동전을 제작해 나눠줬던 전설적인 인물.
이탈리아 경찰의 눈을 피해 살리온으로 숨어 든 파리네는 이곳에서도 위조 동전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양국 경찰에 쫓기던 파리네는 35살에 요절했지만 가난한 사람을 도운 그의 자선정신은 살리온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전해져왔다.
살리온 마을 주민들은 파리네의 자선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그가 숨어살던 마을 언덕에 트레일을 만들고 그의 삶을 상징하는 21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조각품을 세웠다. 파리네의 삶이 알려지자 달라이 라마와 모로코의 캐롤라인 공주는 물론 축구선수 지단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이 마을을 찾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중세풍의 마을을 벗어난 ‘파리네의 트레일’은 포도밭 사이를 걸어 세계에서 가장 작은 포도밭이 위치한 언덕을 오른다. 세 그루의 키 작은 포도나무가 자라는 포도밭의 넓이는 1.618㎡. 이 포도밭은 마을 주민이 살리온을 방문한 달라이 라마에게 기증한 땅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7데시리터의 와인과 마을에서 생산한 와인을 섞어 매년 1000병을 경매로 판매한다. 주민들은 25년 동안 와인 경매로 조성한 100만 프랑의 기금을 자선단체 등에 기부했다.
걷는 것이 곧 자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파리네의 트레일. 포도 향기 상큼한 스위스 시골마을에는 오늘도 살리온 주민들의 자선사업에 동참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발레(스위스)=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