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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역사가 숨쉬는 하피첩(霞帔帖)

bluewaves 2010. 10. 22. 01:47

로맨틱한 역사가 숨쉬는 하피첩(帖)

하피첩(霞帖)은 1810년 가을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귀양지인 강진에서 마산 본가에 있던 부인 풍산 홍씨에게 보내 온 한 벌의 치마를 재단하여 3개의 서첩을 만들어 두 아들인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1786~1855)에게 써준 가계첩(家誡帖)이다.

다산 정약용


세서첩 중 첫 번째 첩 첫머리에 이 서첩을 만들게된 동기를 적은 서문(序文)이 실려있고(이 서문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14권에 제하피첩(題霞帖)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음) 두 번 째 첩과, 세번째 첩 첫머리에 오언시로 서문과 비슷한 내용을 시로 표현하여 실려있다. 한 첩에는 반듯한 해서로, 또 한첩에는 전서로 쓰여있다. 이 시는 문집에 실려 있지않다. 이 세 첩에 실린 글은 18칙(則)의 글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 제 1집 제18권에 '가계(家誡 :집안의 가르침)' 란 제목 하에 약간이 자구 출입이 있을 뿐 그대로 실려 있다.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저술을 정리한 문집.154권 76책. 활자본. 1934~38년 신조선사에서 발행되었다.

'매화도(梅花圖)


세 번째 첩에는 치마가 아닌 종이가 몇 장 끼어 있다. 아마도 치마로 만든 것이 모자라 종이로 채워 쓴 것 같다. 고려대에 소장된 딸에게 준 '매화도(梅花圖)' 에 실린 발문 내용으로 보면 이 첩이 네첩으로 만들어 졌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다산이 3년이 지나서 기억의 착각으로 생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치마 쪽이 모자라 종이로 채운 것이나 1830년대에 여유당전서를 편집 할 때에 문집에 실려 있는 글을 상고해 보면 이 첩은 처음부터 세 개의 첩으로 이루어져 큰 아들에게 한 개, 작은 아들에게 한 개, 손자에게 한 개씩 나누어 준 것 같다. 세 번째 첩만 끝에 손자에게 준다는 글이 적혀 있다. 세 첩 끝에는 1810년 가을 다산동암(茶山東菴)에서 썼다는 관지가 붙어있다.

정약용의 인장'다산(茶山:정약용의 호)'

또 이 첩과 같이 치마를 재단하여 딸에게 준 1813년의 제기(題記)가 있는 서화 한 폭이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이 서첩이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가를 함께 알 수 있다.

하피첩만큼 로맨틱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다산 정약용이라는 인물 자체도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굴곡이 심하였지만, 이 하피첩 또한 그의 인생 역정과 얽혀서 한편의 단편소설을 연상케 한다.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전서체로 쓰인 이 글은 ‘’(병처기폐군·병든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내 왔다)로시작해 글을 쓴 동기를 보여 준다.

하피첩의 하피란사전적인 해석은 당송(唐宋)때 혼례 시 신부가 입은 예복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피란다산의 부인인 풍산 홍씨가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색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산은 1789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나가 정조 임금의 지우를 입으면서 앞길이 창창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장기로 유배, 곧 황사영(黃嗣永) 백서(白書)사건으로 유배지가 옮겨 져 1818년 해배(解配)될 때까지 19년이란 긴 세월동안 강진(康津) 특히 백련산 기슭에서 보냈다. 이 유배기간 동안 두 아들은 수시로 강진의 배소를 찾아 다녔지만, 외동딸과 부인은 한 번도 강진 땅에 간 것 같지는 않다.

**백서(白書)사건: 황사영이 조선천주교 박해를 막아달라고 나라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려다가 발각돼 처형된 사건

부인 홍씨가 두 아들을 통해 다산의 강진 소식을 두고 알고 있겠지만, 밑반찬이나 옷가지를 싸서 보내는 것으로는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남편을 향한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다른 옷가지를 싸 보내면서 시집 올 때 입고 온 지금은 많이 낡은 명주 치마 한 벌을 보냈다. 다산이 이 치마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또 다산은 왜 아내가 보낸 치마에 '가계'를 남겼을까? 당시 사대부가 아내의 치마에 글을 남기는 것은 유례가 드문 일로서다산은 이 6폭으로 짠 치마를 헤진 것은 놔두고 성한쪽을 가로 세로 잘 마름질하여 세 개의 서첩을 꾸몄다. 다산은 아내가 '부부의 정'을 기억해달라고 보내온 치마에 기록한 내용은 두 아들과 손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다산의 심정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했다.(이상 출처: 낙동문화원발행 낙동강사람들 19호)

다산이 남긴 문집에는 부인이 치마를 강진에 있던 남편에게 보내고, 다산이 이를 잘라 하피첩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하피첩이 지금까지 어떻게 전해졌는지 남은 기록이 없다. 기록에만 있을 뿐 찾지못했던 하피첩을 2006년에 찾아냄으로써다산의 여러 가지 필체를 골고루 볼 수 있다는 점과다산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내력이 담긴 하피첩은 약 200년만인 2006년 4월2일 KBS-1TV 진품명품 프로에 처음 소개되어 1억원의 평가를 받는 등 화제가 되었으며, 하피첩의 소유자인 개인사업가 이강석씨가 평소 알고 지내던 고물상 할머니로부터2년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이에따라기록만으로 존재해왔던하피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어떤 과정으로 약 200년 세월동안지내왔는지의 사연은 하피첩만이 알고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