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 유두문중 재실
[낙동강하류의 문중재실] 39 - 김녕김씨 유두문중 재실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은 옛날 낙동강 하구에 삼각주가 발달한 곳으로 섬들이 많았다. 토사가 퇴적되어 기름진 땅이였으나 사람이 살지 않았던때인유두(柳頭)시절 조선중엽 김녕김씨(金寧金氏)들이 이 섬을 개간하여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다. 이어서 의춘방씨(宜春房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등이 살았다. 조선시대 유두지역을 대표했던 김녕김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옛 낙동강 하구유역의 유도(柳島) 유두리(柳頭里, 오늘날 삼락동)에 김녕김씨 집안이 집성촌을 일찍부터 이루고 살았다.
옛 양산군지(梁山郡誌)와 모라동 뒷산 기슭에 있는 김준옥(金俊玉) 공(公)의 묘비명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 김녕김씨 김영필(金永弼) 공(公)이 충청도 영동에서 낙동강 하구 유역의 유도로 옮겨와 정착하여 삼대를 내려오면서 이 섬을 개간하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이 섬을 개척한 집안이다. 파조(派祖)이신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선생이 단종 병자년에 사육신(死六臣)으로 화(禍)를 당하고 영조 신해년에 복관(復官)되고 정조 무술년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을 때에도 후손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김녕김씨 유두(柳頭)문중의 입향조(入鄕祖)인 김영필 공은 어떤 인물일까? 유학자이고, 명종17년(1562년) 태생이며, 유도(삼락동) 출신이다. 자(字)는 운재(運載), 호(號)는 유헌(柳軒)이며 김녕 김씨로 사육신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으로 고손(高孫)관계이다. 타고난 성품이 현명하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며 박학수행(博學修行)하여 경서(經書)와 역서(歷史)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단종의 복위가 실패하면서 백촌 김문기 부자(父子)가 참형을 당하자 일족들은 합천쪽으로 피신하였고 이 와중에 김영필은 낙동강 하류로 갈대가 우거진 유두리 강변에 정착하엿던 것이다.
1914년 이 섬이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서 동래군 사상면 삼락리가되고 뒤이어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어 섬이 육지가 되고 일부가 수몰되어 후손들은 양산, 구포, 모라,삼락, 괘법동 등지에 흩어지게 되고 후손들은 15대를 이어 오면서 20년전에 모라동 뒷산(사상구 모라3동 산 115)에 입향조 호(號)를 따라 유헌재(柳軒齋)를 건립하여 입향조 이하 조상의 향제를 거행하고 있다. 전 양산군수 유인목(柳寅睦) 공(公)이 찬문한 김준옥(金峻玉) 공의 묘비명에 보면 유도(柳島)는 낙동강 하구 강 가운데 있으면서 섬사람들은 해마다 홍수의 피해가 많아서 큰 걱정으로 여겼다.
공(公)은 섬 주위에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정자나무 덕택으로 사람들이 이 나무를 활인정(活人亭), 활인수(活人樹)라 했다고 양산읍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한 김석량(金碩浪) 공이 무과에 급제하여 숙종조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을 하였으며 또한 두 분의 효자(孝子)가 나와 김영우(金英禹) 공과 손자 김응권(金應權)공이다.세인들이 이르기를 효자 밑에 효손이 있도다 하여 사림(士林)이 이를 밝히고 책을 만들고 이어 비각(碑閣)을 세워서 길이 전하였다. 이 가문에서 조선조 후기에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고 근세에 독립유공자인 동산(東山) 김형기(金泂璣) 선생이 이 집안 출신이다.
김녕김씨 화수회 김덕규(74)회장은 김형기 선생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아쉬워하였다.경성의전 4학년 재학중인 1919년 삼일운동 때 경성의전 학생대표로 각학교대표들과 규합,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탑골공원에서 선언문낭독 사건으로 1년간 징역형을 살았다고한다. 해방후 부산에서 동산의원을 개원하고, 대중신문을창간하면서 양심적이고 민족주의적 길을 추구했던 행적이 이념대립의 와중에 좌파인물로몰려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한다. 비록 1990년대 후손들이 의의를 제기하여 무협의로 판결받았으니 서울과 부산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부분을 밝히는일에 매진 할 것이라며 이부분을 강조하였다.
이곳의 부지는 경내면적 약 2,500평이며 경모사,돈화문,단비,회관, 관리사,정원으로 구성되어있다.
모라 주공 4단지 아파트 뒤편길로 모라산림공원으로 가면 오른쪽편에
재실이 보인다.
김녕김씨 유두문중의 재실정문
문이 닫겨져 인터폰으로 방문목적을 말하자 문을 열어 주었다.
김녕김씨 유두문중의 재실을 가르키는 정문옆에 세워져있는 표지석
정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길이 나눠지고 중간 잔디밭이 있다.
왼쪽방향으로 보면 재실과 관리건물및 화수회 건물이 있다.
입향조 유헌처사 김영필 공의 단비
재실의 왼쪽에 모셔져있다.
재실의입구문인 돈효문(敦孝門)
밖에서 본 재실 유헌재
유헌재의 건물(경모사敬慕祠라고 부름)
입향조를 비롯하여 7대 16위의 조상을 모시고 있다.
유헌재의 현판
현판아래 좌우에는 용머리 형상이 현판을지키는 듯하다.
입구문인 돈효문을재실 안쪽에서본 모습
재실 입구문과 돌 담장
재실의 오른쪽 담장
관리 건물로 오가는 문이 있다.
재실의 오른쪽 돌담과 기와
김녕김씨 유두문중의 화수회관 건물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총 466평방미터
독립유공자인 김형기 선생을 기리는 비
광복회에서 건립한 비석임
뒷면에는 김형기 선생의 활동내력이 적혀있다.
집안의 으뜸 정신을나타내는 충과 효를 나타낸 비
유두문중 김형수 선생의 공적비
모과향이 그윽한 잘 익은 모과나무가 달려있고
잔디위에도 떨어진채 그대로 있다.
오른쪽 편으로 소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서있고
그 아래 활짝 핀 벌개미취와 붉게 물든 단풍의 조화가
계절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시제 준비에 바쁜 11월을 맞이하여 유헌재의 정원과 입구 언덕주위에는
가을이 한층 무르익고 있었다.
<참고사진>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제관들이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묘사를 지내는 모습이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 간 것 같다.













[출처] 김녕김씨 유두문중 묘사|작성자 hiddenfl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