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와 문화

합창과 관현악

bluewaves 2010. 12. 31. 17:33

합창과 관현악

이 세상에 사람의 목소리만큼 뛰어난 악기가 있을까요? 비록 바이올린처럼 고음을 낼 수 없다 해도, 피아노처럼 화음을 낼 수 없다 해도, 인간의 목소리만큼 인간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악기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교향곡에 합창이 더해지면 그 감동은 몇 배 더 커지나 봅니다. 연말이면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나 헨델의 [메시아]가 즐겨 연주되는 것도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장대한 음향이 큰 감동을 전해주는 까닭이겠지요.

사실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오래된 악기입니다. 또한 가장 귀한 악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교회에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오로지 인간의 목소리뿐이었습니다.

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목소리야말로 신을 찬양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이며 인간의 하찮은 창조물인 악기는 신성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중세의 음악관도 성악곡을 우월한 장르로 인식시키는 데 한 몫 했습니다. 그래서 오르간을 제외한 다른 악기 연주자들은 교회 성악곡에 참여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교회에서 악기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과는 달리, 오케스트라 음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의 악기 역할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8세기에 근대 오케스트라의 체계가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향곡과 같은 순수 관현악 장르에서도 목소리는 훌륭한 악기로서 오케스트라와 어울리며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웅장한 합창은 오케스트라 작품과 만나 극적인 표현을 이끌어낸다.
<출처 : NGD>

기악과 성악의 화합을 시도한 [합창 교향곡]

1824년에 완성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은 순수 기악 장르에 성악이 들어간 거의 최초의 작품입니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와 성악이 어우러지면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교향곡이지요. 본래 ‘교향곡’이란 음악은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으로부터 발전되어온 음악이며 목소리가 아닌 악기로 연주하는 순수 기악곡에 속하지만 베토벤은 여기에 인간의 음성을 넣어 교향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매년 연말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합창으로 인류애와 화합을 담은 [합창 교향곡]의 4악장을 들을 때마다 베토벤이 이 곡에서 ‘전 인류의 화합’의 메시지뿐 아니라 ‘기악과 성악의 화합’을 노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더욱 놀라운 점은 오케스트라의 악기들도 마치 노래하는 목소리처럼 처리해 지극히 ‘성악적인 기악’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합창이 나오는 [합창 교향곡]의 4악장에서 먼저 오케스트라만으로 연주하는 첫 부분만 들어봐도 그렇습니다. 연주가 시작되면 오케스트라의 팀파니가 마구 두들겨대고 관악기들이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데, 이때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끼어들면서 마치 “그런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고 좀 더 좋은 음악을 연주해보지 그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악기로만 연주하고 있지만 마치 오페라에서 말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와 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입니다.

합창단, 독창자,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연주하는 웅장한 장면 <출처 : NGD>

이때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계속 오케스트라의 시끄러운 소리에 대개 강하게 저항하는 듯한 선율을 연주하면 오케스트라는 1, 2, 3악장의 단편을 차례로 연주합니다. 하지만 첼로와 더블베이스는 그것도 계속 못마땅해 합니다. 그러자 오케스트라가 드디어 유명한 ‘환희의 송가’의 단편을 연주합니다. 그때서야 첼로와 더블베이스는 “바로 그거야! 그런 음악을 연주해봐!”라고 말하듯 확신에 찬 어조로 화답합니다.

no아티스트/연주
1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4악장 기악 도입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4듣기
2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4악장 성악 도입듣기
3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4악장 ‘환희의 송가’ 합창듣기

[합창 교향곡] 4악장의 후반부에 성악이 등장하기 직전에도 4악장 앞부분과 같은 상황이 똑같이 재현됩니다. 오케스트라가 다시 4악장 도입부에서 연주했던 시끄러운 소리를 연주하면 베이스 독창자가 일어나서 첼로와 베이스가 연주했던 바로 멜로디에 맞춰 “오 친구이여! 이 소리가 아닙니다.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릅시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는 ‘환희의 송가’ 멜로디를 노래하지요. ‘환희의 송가’는 처음엔 조용히 노래되지만, 나중에는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크고 웅장한 소리로 환희의 송가를 멋지게 노래하며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킵니다.

합창의 효과를 멋지게 사용한 [파우스트 교향곡]

합창의 효과를 알고 있었던 작곡가는 비단 베토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리스트도 그의 [파우스트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 합창을 넣어 멋진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라 불릴 정도로 피아노의 비르투오소로 알려져 있지만, 관현악 분야에서는 ‘교향곡’과 ‘시’를 합친 ‘교향시’라는 새로운 관현악곡을 창시해 주목 받았습니다.

교향곡이 대개 여러 악장으로 된 데 비해 리스트가 창안한 교향시는 대개 단악장의 작품으로 시적인 내용이나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은 ‘교향곡’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만큼 단 악장이 아닌 3악장으로 이루어졌지만, 전통적인 교향곡과는 달리 세 곡의 교향시를 합쳐 놓은 듯한 교향곡입니다. 리스트는 이 곡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의 주요 등장인물인 파우스트와, 그를 사랑하는 그레트헨, 그리고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은 메피스토펠레스를 각기 1, 2, 3악장으로 묘사하면서 세 사람의 초상을 음악적으로 그려냈거든요.


1악장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 파우스트의 마음이 난해한 선율로 나타납니다. 그는 결국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 젊음을 얻게 되고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 그레트헨을 만나게 됩니다. 순수한 그레트헨의 모습은 2악장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곡에서 오보에의 솔로와 비올라의 반주로 연주되는 그레트헨의 주제는 단순하고 순진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그레트헨의 순진무구한 선율은 3악장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마침내 파우스트를 구원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3악장이 시작되면 메피스토펠레스의 음침하고 기괴한 음악이 연주되지만 3악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오케스트라가 조용히 ‘그레트헨의 테마’를 연주하면 성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면서 파우스트의 구원이 암시됩니다.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하는 내용은 합창을 통해 그 효과가 배가된다. <출처 : wikipedia>

no아티스트/연주
1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2악장 '그레트헨의 테마' / 야샤 호렌슈타인, BBC 북부 심포니, 1972듣기
2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3악장 '그레트헨 테마와 신비의 합창' / 야샤 호렌슈타인, BBC 북부 심포니, 1972듣기

그리고 테너 독창자가 그레트헨의 선율에 맞춰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라고 노래하면 남성합창단은 조용히 “우리를 이끄시도다”라고 화답하지요. 괴테 [파우스트]의 가장 핵심적인 이 구절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파우스트의 남성성은 결국 그레트헨으로 대변되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의해 완전해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리스트는 테너가 부르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라는 가사에 2악장 그레트헨의 테마를 넣어서 파우스트의 영혼은 그레트헨의 순수한 여성성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음악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테너 독창과 남성합창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케스트라가 60여분의 긴 시간 동안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메피스토펠레스의 음악을 아무리 열심히 연주해도 마지막 5분 동안 테너 독창과 남성합창이 잘 해주지 않는다면 [파우스트 교향곡]의 의미가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테너 독창자와 남성합창단이 노래하는 ‘신비의 합창’이야말로 이 교향곡의 핵심이자 결론이니까요. 리스트가 처음 [파우스트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만 해도 그는 이 교향곡을 오케스트라의 연주만으로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이 교향곡을 남성합창으로 마무리하도록 개정했는데, 이는 아마도 리스트가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대단한 연주효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리스트가 마음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음악 역사상 가장 멋진 남성합창을 들을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웅장한 합창이 이루는 큰 스케일 – 말러의 교향곡


말러 역시 인간의 목소리를 사랑했던 작곡가입니다. 그가 남긴 11곡의 교향곡들 중 무려 5곡(2번, 3번, 4번, 8번, ‘
대지의 노래’)에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순수 기악 교향곡이라 할지라도 ‘레치타티보’와 같은 성악적인 양식이 자주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작곡한 가곡 선율들이 교향곡의 주제에 녹아들고 있어서 말러의 교향곡은 거의 대부분 교향곡과 가곡이 하나로 결합된 ‘노래하는 교향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no아티스트/연주
1말러 [교향곡 3번] 5악장 도입 / 헤르만 쉐르헨, 라이프치히 방송 심포니, 1960듣기
2말러 [천인 교향곡] 1악장 도입 / 야샤 호렌슈타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59듣기

말러의 [교향곡 제3번]의 경우 5악장 도입부에서 천국의 종소리를 닮은 발랄한 어린이 합창과 기쁨에 찬 여성합창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린이 합창단이 종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빔, 밤, 빔, 밤’을 노래하면 실제 종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여성합창단과 어린이 합창단이 천국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맑은 음색의 글로켄슈필의 울림이 더해져 다른 교향곡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을 전해줍니다.

말러의 성악 교향곡 양식의 정점은 [교향곡 제8번]에서 이루어집니다. 1910년 초연 당시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어 ‘천인 교향곡’이라는 별명을 얻은 말러의 [교향곡 제8번]은 우주의 소리를 연상시키는 놀라운 음향으로 교향곡의 정의를 넘어선 전무후무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천인 교향곡]에선 오케스트라와 인간의 목소리가 완전하게 결합해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됩니다.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의 4악장에서만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결합을 시도했던 것에 비해 더 한층 과감한 시도라 할 수 있지요. 게다가 [천인 교향곡] 제1부의 가사는 라틴어로 된 성가이고 제2부는 독일어로 된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장면으로, 결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말러는 이 두 가지 텍스트를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해석해 ‘사랑’과 ‘구원’이라는 키워드로 그의 음악 속에서 종합해냈습니다. “오소서 창조의 성령이여!”라 노래하는 제1부 도입부에서부터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울림과 더불어 터져 나오는 합창과 관현악의 막강한 파워는 우리를 엄습해옵니다. 그 웅장하고 어마어마한 소리는 마치 ‘음악의 성령’과도 같습니다.


말러는 천국과 우주의 느낌을 합창으로 표현했다. <출처 : wikipedia>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웅장한 명곡들을 들으며 새해를 맞이해보는 건 어떨까요?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성악 교향곡들을 듣다보면 지난 한 해 즐거웠던 순간은 더 큰 환희로 다가오고 마음에 남았던 좋지 않은 기억들은 통쾌한 음악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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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규 / 음악 평론가,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부천필,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발행일
2010.12.31

음원 제공 소니 뮤직

[출처: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