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유물

이토 히로부미의 옛 집을 찾다

bluewaves 2011. 2. 6. 10:43

이토 히로부미의 옛 집을 찾다

하기(萩) 시에서 다시 보는 메이지의 족적

옛 지도가 쓰이는 도시

나는 요사이 우리 옛 도시, 거리 만들기 일에 매달려 있다. 우선 충남 강경읍의 도시, 건

축 100년사 복원에 머리를 짜내고 있다. 여기에도 그 동안 보거나 가봤던 것만큼 도움이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외국의 사례를 뒤적이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유

럽과 미국은 그런 점에서 모델에 해당한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의 경우 대도시

보다 오히려 소도시의 경우가 더 흥미롭다. 그 중 한 도시가 야마구치 켄(山口縣)에 있는

하기(萩) 시였다.

하기 시는 우리 나라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곳은 도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읍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어떤 면에서 하기는 모델로 충분한 도시였다. 자연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도시 이미지는 ‘정원도시’였다. 하기 쇼카마치(城下町)가 있는 남고추지구(南古萩地區)는 역사적 경관지구로 설정되어 있다. 일본 최초의 거리 보존(町竝)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그들은 지금도 100년 전의 지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도시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날 하기 시에 들어섰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하기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하기는 야마구치 켄 북부에 있고 시모노세키(下關)와 가깝다. 우리 동해바다에 면하고 있다. 나는 야마구치 시를 경유해 갔다. 하기는 추(萩)라 쓰는데 ‘가래나무’즉, 싸리를 말한다. 하나후다(花札) 즉 우리의 화투의 ‘7끗 패’홍싸리에 해당한다. 읽기는 ‘항이’에 가깝다.

도공들의 땅
일본 역사상의 한 인물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가 1604년부터 1608년까지 4년간 걸쳐 하기 성을 쌓고 하기 번(藩)의 성주가 되었다. 하기의 성은 1874년 해체되었다. 역시 옛 것을 버리는 시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 이곳은 해안의 한 한촌(寒村)에 불과했다. 이곳을 죠슈 번(長州藩)이라고도 불렀다. 번(藩)과 유사한 의미로 벌(閥)이 있다. 벌 중의 대표적인 것이 사쓰마 벌(薩摩閥)과 죠슈 벌(長州閥)이었다. 메이지 유신 시대를 주름잡던 지배층이었다. 그래서 사쓰마 벌의 대표 도시인 가고시마와 죠슈 벌의 대표적인 도시 하기를 그들은 ‘유신의 땅’이라고 자랑한다. 하기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지금까지 4명의 총리 대신이 나왔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顯有朋, 1838-1922),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가쓰라 타로우(桂太郞, 1847-1913) 그리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1929) 등이다. 한결같이 조선을 능욕한 자들이었다.

모리 데루모토는 임진왜란(1592-93) 때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와 한 사람의 도공을 끌고 돌아갔다. 그 이름은 이작광(李勺光)이었다. 그는 하기 시의 동쪽 교외 마쓰모토(松本)에 요를 만들고 하기 야키(萩燒)의 시조가 되었다. 하기 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작광은 그 후 동생 이경(李敬)을 이곳으로 끌어 들여 함께 하기 야키를 열었다고 되어 있다. 이경은 그 후 번주의 명에 의해 판조팔(坂助八)과 판고려좌위문(坂高麗左衛門)이란 이름을 받았다. 실제로 이작광이 이경을 불려들였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하기 야키의 별칭 마쓰모토 야키(松本燒)는 그들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다. 현재 100여 개의 가마에서 도자기가 만들어져 나오고 있다.


한편 이작광의 아들은 이름이 야마무라(山村) 씨로 바뀌어 산촌광정(山村光政)이라 했다. 산촌광정은 후카와(深川)로 옮겨 후카와 야키(深川燒)를 열고 그 시조가 되었다. 후카와(深川)는 오늘의 장문(長門) 시이다. 하기 시에서 가깝다. 우리는 지금 그들을 잊고 있다. 기껏해야 심수관과 이삼평뿐이다. 1443년 세종은 신숙주(申叔舟, 1417-75)를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무역협정을 맺게 했다. 성종 때 영의정이었던 신숙주는 왕명에 의해 1471년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를 찬(撰)한다. 이 기록이 우리 나라에서 일본 연구의 대표적 서적이 되었다. 이 기록에 이곳과 우리와의 연관성이 적혀 있다.

“대내현(大內縣) 야마구치(山口) 등 우리 나라와 가까운 지역의 일본인들은 백제왕 온조의 후예로서 일본에 들어 와 애초에 주방(周防) 주의 다다량포(多多良浦)에 배를 대놓고 머물렀기에 이로서 다다량 씨로 삼았는데 지금은 800년이 되었다… 이후 대내씨로 바꾸고 그들의 계통이 백제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와는 가장 친하였다.” 즉,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개척한 땅이었고 그만큼 우리와의 관계도 깊은 곳이었다.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 간 사람들을 일본인들은 귀화인(歸化人)이라고 불렀다. 그 후 도래인(渡來人)으로 다시 바꿔 부르고 있다. 도래인은 중국, 몽골, 조선 등에서 바다를 건너 간 사람들의 통칭이다. ‘도(渡)’는 바다를 건넜다는 말이다. 그들은 우리 나라와 가까운 곳에 본거지를 펴고 메이지 유신기 전후 군, 정치, 사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선 침략 3인방의 본거지
하기 시는 우리 근대사와도 관련이 깊다. 그때는 13대 모리(毛利敬親, 1819-73)가 성주로 있을 때였다. 한일 근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핏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59), 기토 다카요시(木戶孝允, 1833-72), 야마가타 리토모, 다카스기(高杉晉作, 1839-67)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등이 이곳 출신들이었다. 기라성(綺羅星)이란 말이 있다. 일본인들이 ‘기라성같은 도시’라고 말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은 침략자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자랑스런 메이지 시대의 스타, 즉 원훈(元勳)들이었다. 이 도시에는 그들의 생가와 족적 그리고 에피소드가 가득했다.


요시다 쇼인과 기토 다카요시는 조선멸시론, 정한론을 최초로 주창한 자였고 이의 실천자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들은 조선 침략의 3인방 쯤 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본거지가 하기 시였고 마쓰시타 무라 숙(松下村塾)이었다. 마쓰시타 무라 숙은 하기의 교외에 있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이름 쇼인(松陰)에서 마쓰(松) 자를 따고 그의 아래에 모여 공부하는 집이란 의미를 갖는 학교였다. 우리로 치면 서당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막부를 쓰러트린 왕정복고파의 정신적 우두머리였다. 그 마쓰시타 무라 숙의 실내에는 조선침략자들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었다. 느낌이 참으로 묘했다. 물론 그의 제자 중 우리의 눈에 가장 익은 자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요시다 쇼인의 도시
이제 이토 히로부미의 옛집을 찾아가 보자. 하기 역에서 히가시 하기 역(東萩驛) 쪽으로 가는 코스를 가기로 했다. 거리는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어 무더운 여름날이었건만 상쾌하게 느껴졌다. 자전거 여행객이 유난히 많았다. 역 앞에는 자전거 대여점이 있었다. 나도 자전거를 빌렸다. 이 도시는 관광도시가 된 1960년대 중반부터 자전거 임대업과 민박이 유명한 곳이 되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하시모토 바시(橋本橋)를 건넜다. 다리 이름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기 시의 집들은 모두 낮게 깔려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작은 키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골목길들은 참으로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시민들의 애향심이 전통건축물 보존정신과 맞닿아 있었다. 거리에 붙어 있는 관광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오른쪽으로 마쓰모토 가와(松本川)를 따라 달렸다. 이어 마쓰모토 바시(松本橋)가 나왔다. 이곳이 이토 히로부미의 집과 마쓰시타 무라 숙이 있는 곳이다. 심호흡을 했다.
자전차 도로를 따라 5분 쯤 가니 마쓰시타 무라 숙이 나타났다. 온통 요시다 쇼인으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었다. 요시다 쇼인 역사관, 마쓰온(松陰) 유묵 전시관, 마쓰 온(松陰) 신사 등이 널려 있었다. 전에 수상을 했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1901-75)가 ‘명치유신 태동지지(明治維新, 胎動之地)’라고 쓴 큰 돌판이 눈 앞을 막는다.


배가 고파 식당에 들렀는데 그 식당에서 파는 우동 이름도 ‘마쓰 온 우동’, ‘유신 우동’이었다. 어느 것을 먹을까 망설였다. 이곳에 왔으니 둘 중 하나를 먹어야만 했다.
과연 일본인들에 존경받고 있는 근대사 인물 1호 요시다 쇼인이었다. 그 뒤를 이토 히로부미가 따르고 있지만-.

이토 히로부미 옛집
그 곳에서 큰 길을 건너 골목길을 한참 따라 가자 이토 히로부미 구택(伊藤博文舊宅)이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大字椿東字新道 1510). 이토는 이 도시 부근 한촌(周防國 熊毛郡 束荷村, 현재의 大和町)에서 1841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야시 주죠(林十藏)였다. 그는 하야시(林) 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다.


해안이 눈에 보이는 시골 마을이었다. 그는 아주 벽촌에서 태어난 셈이다. 도쿄는 아직 에도일 때였다. 태어나자 그의 이름은 하야시 도시수케(林利助)로 지어졌다. 하야시 주죠는 하야시 도시수케가 9살 때 하기 시로 이사해 왔다. 하기 성의 하급 사무라이가 되었다.


하야시 도시수케는 14살 때 족경(足經) 직에 있던 이토(伊藤直右衛門)의 집에 양자로 보내졌다. 이때 성과 이름이 이토 쥰부(伊藤俊輔)라 했다. 양자로 보내질 때는 이미 부인도 있었다. 조혼했던 것이다. 이토는 마스시타 무라 숙에 입학했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선생과의 나이 차는 열한 살이었다. 이토는 그 밑에서 공부하며 정치에 뛰어 들어 천황파가 됐다.


1863년 6월 27일 이토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1835-1915) 등 하기의 번사 5인과 함께 요코하마에서 영국으로 비밀리에 출항했다.
1863년 7월 16일 미군함 와이오밍 함이 하기 번의 포대를 포격한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급히 고향으로 돌아온다. 막부 토벌에 승리한 그는 효고 켄(兵庫縣) 지사가 되어 승승장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효고 켄은 현재의 고베(神戶) 일대이다. 1867년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며 그는 날개를 단 듯했다.


여기 춘동(椿東)에 있는 이토의 옛 집은 그가 1854년부터 67년까지 약 15년간 살던 곳이다. 출세가 열릴 때까지 산 곳이다. 건평 27평의 단층 초가집이다. 전형적인 하급 무사의 집이다. 193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4년 해체하여 수리 복원된 것이다. 이토의 집 이 구석 저 구석을 돌아보며 나는 여러가지 상념에 잠겼다. 이 한 인간이 어찌하여 우리 나라를 그토록 휘둘렀는가 하는 점이었다. 집은 여염집에 다름없고 인간 됨됨이도 그리 남다르지 않았는데 그에게 무슨 힘이 그렇게 미쳤었는가. 집 마당 한가운데 동상이 되어 서 있는 이토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근대사현장 / 월간아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