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동조궁’에 버려진 조선의 문화재들
인조 임금이 하사한 글씨, 조선종 그리고 삼구족
▲ 조선종이 종각 안에 매달려 있다
필자의 부친은 1930년대 초 일본에 잠시 가실 일이 있으셨을 때 니코 구경을 한 적이 있으셨다. 그 니코 여행 얘기는 아주 오래 전 부친이 필자에게 훈계를 하는 도중에 나온 말씀이셨다.
도쿠가와와 원숭이가 있는 곳
필자가 부친에게서 들었던 얘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원숭이에 관한 얘기, 그리고 조선종, 개성인삼 얘기 등 다양했다.
물론 훈계의 골자는 ‘말조심하고 진중히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부친은 그 비유를 동조궁의 원숭이 일화에서 비유하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중 10여년 전인가 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그 니코시에 가 볼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사전 자료를 다시 조사하던 중 궁금증이 하나 더 붙었다.
그 자료에는 그곳에 우리 조선조 인조(仁祖) 임금님의 편액(扁額)과 공예품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어디서도 더 이상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필자는 도쿄 아사쿠사역(淺草驛)에서 토부 니코선(東武日光線) 특급을 탔다. 2시간 정도 가니 니코역이 나왔다. 역에서 걸으면서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찾아 든 곳이 바로 그 원숭이가 있는 동조궁이었다.
지금 동조궁의 죽은 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제 평화의 사도로 위장되어 일본인을 짓누르고 있다. 조선을 침략하려던 자가 그것도 일본 평화의 상징으로-. 그 상징성이 부여 된 곳이 바로 니코의 동조궁이었던 것이다.
동조궁에는 하루에 약 8천여명, 연중 약 250만명이 찾는다고 했다. 일본의 효자 상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간 날도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곳이 조선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지금 우리 조선통신사의 흔적은 그곳에서 울고만 있을지도 모른다.
1643년 조선통신사가 이곳을 방문하여 전달한 조선의 동종 |
외국인에 의해 되살아나
니코(Nikko, 일광, 日光)시는 도쿄의 진북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니코 즉 일광(日光)이란 이름은 그 자체에서 태양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원향(原鄕) 중의 하나인 곳이기도 하다. 이 니코의 중심에 도우죠우 궁(동조궁, 東照宮)이 있는 것이다.
1870년 한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헤븐이 니코와 동조궁을 찾았다. 메이지 시대가 되며 잊혀졌던 동조궁은 이때부터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 그곳은 외국인들의 여름 피서지가 되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금녀지역이기도 했는데 1872년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그것도 외국인들 때문이었다.
1867년 일본정부는 ‘외인유보(遊步)규정’을 제정, 이를 강력 시행하고 있었다. 일본인도 지방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국내여행 때 숙박 장소에는 경찰의 감시가 따랐다. 일본의 귀신(貴紳; 귀족과 신사)계급에 해당하는 자도 궁내성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1899년 7월에야 이 규정은 폐지되었다(졸저, 「일본을 걷는다」, 254~255, 한양출판사).
그런데 그 이전에도 외교관 특권을 갖는 공사, 총영사들의 여행은 그런대로 허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반 외국인은 엄히 제한되었다. 그들은 거류지로부터 10리 사방, 즉 당일치기 여행 정도에 한해 허용되고 있었다.
1874년 ‘내지(內地)여행규칙’이란 것이 만들어졌다. 병가 휴양, 학술 조사에 한해 예외규정을 두었다. 1878년 6월 이사벨라 버드 여사가 니코를 10여일 간 여행할 수 있었다. 이는 그 예외규정에 따라 성사된 것이다.
버드는 그 여행 후 「일본오지기행(日本奧地紀行, Unbeaten Tracks in Japan)」이란 책을 냈는데 그 책속에 니코를 다뤄 이때부터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녀는 그후 우리 나라도 여행하고 「한국오지기행(1897)」이란 책도 냈다. 우리 나라에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동조궁은 궁이 아니다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유행한 바 있는 모모야마(도산, 桃山) 건축은 성곽 건축을 대표로 하는 것인데 이 양식의 특징은 건축물을 화려, 현란하게 치장하는 것이었다.
성곽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그들은 사사(社寺)를 새로 짓기 시작했다. 사사는 이 세상에 생존했거나 생존시 지배자였던 봉건 영주에게 바치는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절이 이즈음부터 신사(神社)로 바뀌어 나간 것이었다.
동조궁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궁(宮)이 아니다. 모모야마 건축 양식 중의 하나인 사사건물이었던 것이다. 동조궁은 그 중 영묘(靈廟)건축에 해당되는데 이를 곤겐스구리(권현조, 權現造) 형식이라고 한다. 여기서 권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에게 바쳐진 건축 양식인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6년 죽자 그의 아들인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덕천수충, 德川秀忠, 1579~1632)는 도우도우 다카도우(등당고호, 藤堂高虎, 1556~1630)를 동조궁의 조영봉행(造營奉行)에 임명했다. 건축 토목 일을 전담시킨 것이다. 도우도우는 성곽 건축 전문가였다(졸고, 아리랑, 1997. 11).
당시 일본의 정권은 다섯의 다이로(대로, 大老)와 그 아래 다섯의 부교(봉행, 奉行)가 통치해 왔다. 따라서 당시 무덤과 신사를 만들기 위해 봉행을 임명한 것은 그 의미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 알 수 있다.
동조궁은 1617년에 창건되어 1636년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이제 약 3백 80여년이 지나간 일이다.
경내의 건축물은 무려 55동에 이르는데 대부분 일본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조각품, 예술품이 즐비해 관계자들의 관심이 쏠려 있기도 하다.
원숭이 이야기
그 중 원숭이 조각이 가장 유명하다. 정문이나 마찬가지인 호화찬란한 유우메이몬(양명문, 陽明門)을 올라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친이 오래 전 이미 보셨던 그 3마리의 원숭이 조각물이었다.
지금도 일반인들에게 전매특허처럼 얘기되는 것이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말라’는 경구인데 그 표현을 그 3마리의 원숭이 조각을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장군, 사무라이 정치가 얼마나 무서웠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 원숭이 얘기의 원류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1923년 스페인의 한 작가,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Vicente Blasco Ibanez, 1867-1928)는 그 자신이 쓴 기행문 ‘우수(憂愁)의 왕국, -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에서 일본과 원숭이를 다음과 같이 비유해 쓰고 있다(민용태 역, ‘우수(憂愁)의 왕국, -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문학사상, 1980. 11, 327~328쪽과 박철, ‘한 소설가의 세계일주, 교수신문, 1997. 7. 21).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의 이런 점을 들어 그들의 모방능력, 즉 원숭이적인 대단한 작업 능력이 있다고만 보아왔다. 사실상 일본인들은 오늘날까지 한 일이라고는 모방이었을 뿐, 진짜로 창조적인 어떤 것을 생각해 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원숭이를 닮은 데가 분명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원숭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모방과 창조가 같은 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남 흉볼 일만도 아니리라.
조선통신사가 가져다 준 선물
이곳에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나의 눈을 끈 것은 조선의 동종(銅鐘)이었다. 왜 여기 조선의 종이 와 있을까. 동조궁 측의 설명을 요약해 보면,
‘이 종은 조선 국왕이 헌납(獻納)한 것으로 1642년 만들어진 동종이다.’
라고 되어 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시 헌납이라 하고 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또한 그렇게 천대하고 있는가.
니코의 산중에서 울리는 저 종소리는 누구를 위해 울리는 것일까.
조선통신사는 그들이 처음 맞은 외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臣秀吉, 1537~1598)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가 1598년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德川家康, 1542~1616)는 1590년 지금 도쿄로 본거지를 옮기고, 소위 세키가 하라(관원전,關原戰)라는 내전을 벌여 승리한다.
이 내전은 조선과 또다시 전쟁을 하자는 주전파인 도쿠가와와 조선과 화평하자는 화평촉진파간의 싸움이었다. 도쿠가와는 이 내전에서 이기자 반대파 장군들을 죽인다. 이어 풍신수길의 집안도 멸문된다.
그리고 1603년 도쿠가와는 에도에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란 이름으로 에도막부(강호막부, 江戶幕府, 1603~1867)를 개설, 이후 조선과의 친선외교 쪽으로 돌아선다.
1607년에는 우리 나라와 정식으로 국교가 회복되고 그해 첫 조선통신사가 일본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조선통신사는 그후 12회에 걸쳐 일본에 가게 된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장군 교체기마다 가게된다.
그 중 3회를 이곳 니코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것은,
U1636년(인조 14년), 정사;
U임광(任橙), 총인원; 475명
U1643년(인조 21년), 정사;
U윤순지(尹順之), 총인원; 462명
U1655년(효종 6년), 정사;
U조형(趙珩), 총인원; 488명
이었다. 이는 에도막부 정권이 니코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조선통신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동조궁을 화려하고 현란하게 장식했던 것이다. 1711년 이후에야 조선통신사에 대한 대우를 간소화하자는 논의가 일 정도였다.
조선통신사가 당시 하야(下野)의 일광까지 가는 코스는 ‘오가도(五街道)’ 중의 하나를 가는 것인데 그 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강호(江戶)-월곡(越谷)-조벽(糟壁)-율교(栗橋)-소산(小山)-우도궁(宇都宮)-덕차랑(德次郞)-대택(大澤)-금시(今市)-일광(日光)
이 코스를 ‘니코 코스(일광도중,日光道中)’라 했다.
강호 즉 오늘의 도쿄에서 니코까지 3백명 이상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간 것이다. 기차로도 두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1655년에 들른 조선통신사 일행은 무려 300여명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신사들은 1636년 12월 18일 도쿠가와 이에미츠(덕천가광, 德川家光, 1604~1651)의 초대로 이 동조궁을 찾게 된다. 우리 사신들은 또 당시 쓰시마(대마도, 對馬島) 주(主) 종의성(宗義成)의 간청도 있고 해서 이곳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우리측에게는 일종의 ‘유람’이었다. 우리 조선통신사들은 당시 이 궁을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들이었다.
이에미츠는 이에야스의 손자로 제 3대 장군(將軍)이 되어 있었다. 그는 쇄국정책을 폈고 기독교를 탄압한 자였다.
통신사들이 방문했을 때 그곳은 일광묘(日光廟)였다. 일본에는 따로 종묘(宗廟)가 없었기에 이곳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곳에서 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신들은 그 신전(神前)에 향도 피워 주었다. 우리 통신사들이 발을 끊은 후 그들은 도죠우곤겐뵤(동조권현묘, 東照權現廟)라는 궁호(宮)로 그 묘를 개칭해 부르기 시작했다. 이를 줄여 동조궁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 통신사들은 1643년에는 일광산치제(日光山致祭)에도 참석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1643년 방문 시 우리 통신사는 인조 임금의 글씨 액자(서액, 書額) 그리고 동종, 동으로 만들은 삼구족(三具足) 등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록은,
‘인조 20년(1640) 2월, 일본 일광산에 사당(祠堂)이 이룩됨으로써 편액(扁額)과 종을 보냈다.’
라고 되어 있다.
우리 인조 임금은 니코의 동조궁이란 것이 1640년 준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643년 7월 우리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는 길에 친필 글씨와 종을 선물로 보내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외에도 불기(佛器)도 보내준 것을 기록하고 있다. 불기는 종, 삼구족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17세기 중엽에 쓰여진 「조선왕래본집(朝鮮往來本集)」에도 그 기록은 있다. 이 책에는 이조참판 이식(李植)이 찬(撰)한 「일광산종명병서(日光山鐘銘幷序)」도 들어 있다.(한국사학회, 조선후기 통신사와 한일교류사료전, -대마도 종가자료, 105~108쪽, 1991)
또한 1740년 11월 14일 니코에서 재배된 조선 인삼이 동조궁에 봉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도 이때 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더 이상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개성 인삼의 흔적이라도 찾아보았으면 좋으련만-.
인조의 글씨
▲ 인조 임금이 하사한 친필 편액
에도막부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묘를 만들며 그 기념으로 조선 임금의 글씨를 받고 싶어했다. 그 희망에 의해 인조 임금은 직접 쓴 글씨를 내리고 액자에 담아 조선통신사 편에 그에게 하사(下賜)했다.
그 글씨는 ,
일광정계(日光淨界)
창효도장(彰孝道場)
이라고 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일광을 효를 중시하는 곳으로 하라’는 말씀이셨다. 임오(壬午) 즉 1642년 봄에 쓰신 글이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지금 그 글씨를 보내준 것을 오히려 헌상(獻上)받았다고 쓰고 있다. 우리 임금이 무슨 이유로 그들에게 그 귀한 글을 내렸겠는가.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그 편액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상하게도 동조궁 측에 주었는데 그곳에는 걸려 있지 않다. 도쿄도에 사는 구로이타(흑판창부,黑板昌夫)라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기록만 있다(中村榮孝, <일본과 조선>, 至文堂, 1971, 227~229쪽). 그 소장자는 동경대 교수로 고문서 연구의 1인자로 이름을 날렸던 구로이타 가쓰미(흑판승미, 黑板勝美, 1874~1946)의 친족으로 보여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인 어보탑과 삼구족
어보탑의 앞쪽에 삼구족가 놓여있다.
무덤 앞의 우리 공예품
동조궁 제일 높은 곳 그리고 제일 뒤편에 오쿠샤(오사, 奧社)가 있다. 그 안에 오쿠샤호우도우(오사보탑, 奧社寶塔)란 것이 있다. 보탑은 어보탑(御寶塔)이라 하는데 이에야스의 시신을 묻어 둔 곳에 탑을 세워 그를 존칭해서 붙인 말이다. 그의 시신은 이듬해인 1617년 4월 8일 즉 석가모니 탄신일을 잡아 이곳에 이장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날을 동조궁 창건일로 친다.
그 묘 앞에 조선국에서 하사한 삼구족(三具足)이 있다. 삼구족이란 불(佛)에 공양(供養)하는 공양구(供養具)로 일본에서는 주로 사묘(寺廟)나 가묘(家廟)에 두었다. 삼구족은 향로(香爐), 촛대(촉대, 燭臺), 화병(花甁)을 한 세트로 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고려시대의 동제품들이었다. 이것이 지금 그의 무덤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촛대에는 학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들이 노천에서 비를 맞고 있다. 물론 이에 관한 설명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지금도 그것을 그 묘 앞에 두고 있는가.
조선통신사 기간 중 우리 왕실에서는 대마도주에게도 삼구족을 하사하고 있다. 지금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를 제사하는 반쇼오원(만송원, 萬松院)에도 삼구족 한 벌이 소장되어 있다(金義煥, <조선통신사의 발자취>, 77~78쪽, 1985, 正音文化社).
지금까지 소개한 것 외에도 중요문화재 즉 중문(重文)으로 되어 있는 혼천의(渾天儀) 1기(基)도 혹시 우리의 것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그들이 모든 것을 숨기기 때문이다.
되살아나는 에도시대
▲1636년 에도에 입성하는 조선통신사사 행렬, 정사가 지나가고 있다. 일본인들이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 <자료; 조선시대통신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분)>
에도막부는 15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덕천경희, 德川慶喜, 1837~1913)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1868년 새로운 왕권을 확립한 메이지 정부는 에도막부 즉 도쿠가와 막부를 부정하고 멸시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는 신불(神佛)분리 정책을 썼던 것이다.(高藤晴俊, <東照宮 再發見>, 日光東照宮, 1991)
메이지 정부는 그 이전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그 기존 세력들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정권 교체기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에도막부 시대의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되살아 나는 에도시대의 상징물이 동조궁이었던 것이다.
1946년 美 극동군 총 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친히 황송하게도’ 니코와 동조궁을 방문했다. 이것은 일본인에게도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뉴스였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사령관과 함께 일본인에게는 무척 두려운 존재였기에 이것은 감지덕지로 받아들여졌다. 그 미군들 역시 무서운 ‘장군’이었던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이 느끼는 감정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리에게는 「대망(大望)」, 「장군(將軍)」등의 소설과 영화로 알려졌다.
「대망」이란 것은 야마오카 소하치(산강장팔, 山岡莊八)의 소설로 원제목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일본 전후 최대의 베스트 셀러가 된 신문연재소설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70년대 초 번역되어 나와 베스트 셀러가 된 바 있고 지금도 가끔 읽는 사람이 있다.
「장군」은 제임스 클라벨(James Clavell)의 소설 「쇼군(SHOGUN)」이 원제목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이름을 서양인들에게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이것은 1980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 내용은 3류 영화에 불과했지만 ‘냉엄한 사무라이들의 세계’를 선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어쨌든 그 영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니코의 동조궁은 우리 관광객들에게도 다시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버려져 있다시피 한 우리 문화재는 잘 모르고 있다. 이제 이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앞으로 우리 관광객이 그곳에 갈 기회가 있다면 원숭이 구경만 하고 오지 말고 우리 문화재도 자세히 보고 오기를 바란다.
<근대사현장> 글, 그림 /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전문위원)
▲동조궁 배치도, 그중 도쿠와 이에야스의 무덤은 제일 높은 곳 제일 뒤에 있다. 그곳을 오쿠샤(오사, 奧社)라 한다. 그 안에 우리 문화재 삼구족이 있다.
월간 아리랑 1998-01-25 (72 호)
arirang21@arirang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