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스토리

아카데미상과 인연이 없는 명배우 이야기

bluewaves 2011. 4. 9. 00:24

아카데미상과 인연이 없는 명배우 이야기


-오스카상의 시작과 1930년대 이모저모

제 1회 오스카상 (1929년), 1929년에 개최된 오스카상은 미국 영화인들의 모임인 아카데미 회원들이 발족한 첫 시상식이었다. 그해에는 전년도에만 국한하지않고 1927년 이후의 모든 작품에 한해서 제량권이 주어졌다. 무성영화 시대, 활극전문배우로 명성을 떨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전설적인 감독인 세실 데밀의 형인, 연출가 윌리엄 데밀이 공동으로 사회를 본 가운데 파라마운트의 전쟁 드라마인 [날개]가 최우수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첫 오스카상 남우주연상의 영예는 2개의 작품에서 연거푸 후보에 오른 리처드 바텔메스를 물리치고 독일 출신의 에밀 야닝스가 <최후의 명령>으로 수상하자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다. 여우주연상은 <7번째 천국>으로 <새디 톰슨>에서 열연을 펼친 '헐리웃의 제녀' 글로리아 스완슨을 근소한 차로 누르고 자넷 게이너가 가져갔다. 제2회 오스카상 (1929~30년) 터프가이들의 각축장이었다. 일찌감치 최우수작품상을 예견했던 <올드 애리조나> 팀은 의외의 복병, <브로드웨이 멜로디>에게 일격을 맞고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폴 무니, 조지 밴크로프트, 체스터 모리스, 그리고 워너 박스터 등, 최고의 근육질 남성스타들이 득세를 하던 이해, 워너 박스터는 작품상의 한을 풀어주듯 <올드 애리조나>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여우주연상은 '무성영화시대의 멕 라이언'인 메리 픽포드가 진 이글스, 코린 그리피스, 베티 캄슨과 같은 요부형 배우들을 밀쳐내고 <코케트>로 첫 영광을 안았다. 제3회 오스카상 (1931년) 이해의 작품상은지금까지도 전쟁영화의 걸작으로 남아있는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루이스 울하임, 루 아이레스가 공연한 <서부전선 이상없다>에게 돌아갔다. 남우주연상을 놓고 프랑스 출신의 댄서이며 가수인 모리스 슈발리에와 미남배우 로널드 콜만은 2개의 작품으로 경합을 펼쳤지만 엉뚱하게도 '벤자민 디즈렐리'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디즈렐리>의 조지 알리스가 어부지리로 챙겨가고 말았다. 여우주연상 또한 2개의 작품으로 후보에 오른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와 노마 쉬러의 대결로 좁혀졌지만 평소, 제작자들과 원만치 못했던 가르보가 <이혼녀>에서 열연한 노마 쉬러에게 고배를 들고 말았다. 특히 그레타 가르보는 자신 생애의 3번의 기회중 그 첫번째 단추를 잘못 끼는 바람에 영영 후보로만 머물러야했다.

제4회 오스카상 (1932년) 로스엔젤레스, 빌트모어 호텔에서 개최된 4번째 시상식의 최우수작품상은 서부극 영화인 <시마론>이 가져갔고 불과 9살의 어린 나이에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재키 쿠퍼의 수상 가능성에 촛점이 맞추어졌다. 하지만 백전노장, 라이오넬 배리모어가 <자유로운 영혼>의 열연으로 작품상 덕을 보려했던 미남배우, 리처드 딕스를 물리쳤다. 여우주연상은 당대 최고의 미녀배우들인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앤 하딩, 노마 쉬러, 아이린 듄을 밀쳐내고 무려 예순 여섯의 할머니인 마리 드레슬러가 <민과 빌>로 수상자가 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후 3년후, 마리 드레슬러는 암으로 타계했다.

1933년(제5회), 작품상은 MGM 스튜디오의 사활이 걸린 초호화 캐스팅 작 <그랜드 호텔>이 차지했다. <챔프>의 월라스 비어리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프레드릭 마치는 오스카상 최초로 공동 주연상을 수상하였고 가냘프고 연약한 여인, 헬렌 헤이즈는 <마델란 클로데의 대죄>로 2년연속 후보에 올라 축배를 들려고 했던 마리 드레슬러를 꺾고 첫 감격을 누렸다.

1934년(제6회)는 로스엔젤레스 시내의 앰버서더 호텔에서 서부극 스타, 윌 로져스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20세기 폭스사의 <카발케이드>에게 작품상을 수상한후 위원회는 어쩐지 영국 영화인들에게 죄짓는 기분이 들었는지, 주저없이 영국출신의 성격파 배우, 찰스 로튼이 열연을 펼친<헨리 8세의 사생활>에 남우주연상을 건네주었다. 여우주연상은 별다른 경쟁자가 눈에 띄지 않았던 이해, 캐서린 햅번은 <모닝 글로리>로 자신의 4번째 여우주연상으로 가는 첫 트로피를 감싸안았다. 하지만 그녀의 수상 의미보다는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정신적 사랑'에 모든 미디어들은 관심이 더 많은 한 해이기도 했다.

1935년(제7회)의 시상식은 프랭크 카프라가 연출한 스크루볼 코메디인 <어느날 밤에 생긴 일>의 독무대였다.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 극본상, 그리고 시상식의 꽃이라고 할수있는 남,녀 주연상을 휩쓸어 버렸다. 매력적인 콧수염의 미남스타, 클라크 게이블이 남우주연상을, 아직 영어발음이 신통치 않았던 프랑스 출신의 클로데트 콜버트가 여우주연상을 함께 수상하였다.

1936년(제8회)은 훌륭한 작품들의 출품으로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했던 한 해였다. 호스트를 맡은 감독, 프랭크 카프라는 '올해야 말로 진정한 가치를 느끼는 작품'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작품상은 <레미제라블>, <밀고자>, <한 여름밤의 꿈>등, 쟁쟁한 작품들을 물리치고 재난영화인 <바운티호의 반란>에게 돌아갔다. 특히 이 영화는 클라크 게이블과 찰스 로튼의 대립관계를 반란이 일어난 선상에서 보여주며 극적인 재미를 더했다. 그러나 그러한 배우들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해 <바운티호의 반란>에 출연한 3명의 주연배우들이 동시에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늘 그러듯 엉뚱하게도 <밀고자>에 출연했던 '제 3자' 빅터 맥라글렌이 슬며시 챙겨가고 말았다. 여우주연상은 차가운 분위기를 바탕으로 여성 심리극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왕눈이' 베티 데이비스가 <데인저러스>로 감격을 누렸다.

1938년(제10회)은 세번씩이나 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번번히 낙마를 당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폴 무니가 또다시 스펜서 트레이시에게 트로피를 넘겨주고 땅을 쳐야만했다. 펄 벅 여사의 중국근대사를 다룬, <대지>에서의 이방인을 연기한 루이제 레이너는 짧은 코멘트로 감사를 전했다. 빌트모어 호텔에서 재개된

1939년(제11회)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프랭크 카프라는 자신이 연출한 <당신은 그것을 가져갈 수가 없어>가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여 기분이 더욱 업되었고 2년연속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스펜서 트레이시는 푸근한 미소만큼이나 <보이스 타운>으로 최고 대접을 받았다. 혹시 '갱스터가 아닐까?' 하고 착각이 들만큼 잔인한 커리어를 연기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는 자신에게 닥칠 미래의 불운을아직 알지 못했다. 여우주연상은 <지저벨>의 무방한 눈물연기로 베티 데이비스는 3년만에 자신의 두번째 오스카상을 거머쥐었다.


-1940년대의 오스카상 이모저모

1940년(제12회)는 천재적인 언변가인 코메디언 밥 호프의 진행으로 앰버서더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최우수작품상을 놓고 요즘 흔히 말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전쟁터였다. 결국, 10개부문을 휩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쳐 두더라도 이 해에는 <바람과...>에 못지않은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치코메디인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존 포드와 존 웨인 콤비의 서부극, <역마차>, 뮤지컬 영화의 진정성을 널리 알린,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폭풍의 언덕>이 바로 그런 작품들이었다. <바람과...>의 독식에 제동을 건 인물은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부드러운 선생님으로 출연한 영국신사, 로버트 도나트였다. 여우주연상은 베티 데이비스의 연패를 끊으며 비비안 리가 처음 시상대에 올라섰고 그레타 가르보는 뉴욕비평가협회의 절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지막 기회였던 그해, 결국 오스카로부터 영원히 외면 당했다. 지난해 앰버서더에 이어 다시 빌트모어로 옮겨온

1941년(제13회) 시상식은, 거물 제작자, 월터 와그너가 지휘하였다.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축하 메세지를 전하는 진풍경이 일어났다. 작품상은 데이빗 셀즈닉과 알프레드 히치콕이 파트너쉽을 체결하여 완성한 스릴러 영화 <레베카>에게 돌아갔다. 남우주연상은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넘어갔고 '영원한 소년'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은 <위대한 독재자>로 처음, 오스카상 본 무대에 후보로서 발을 밟았다. 여우주연상은 3년연속 후보에 오른 베티 데이비스와 <레베카>로 후한 점수를 받았던 조안 폰테인을 물리치고 <키티 포일>의 로맨스를 잘 보여준 진저 로저스가 차지하였다.

1942년(제14회)의 작품상은 존 포드가 자신의 주특기인 서부극을 잠시 미뤄두고 연출한 <나의 계곡은 얼마나 푸르렀나>로 20세기폭스사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게리 쿠퍼는 1937년, 처음 후보에 오른후, 마흔살의 늦은 나이에 <요크상사>로 첫 감격을 누렸다. 그해 오손 웰즈는 '저주받은 걸작' <시민케인>을 아카데미에 올려봤지만 좁쌀만한 간덩이를 가진 늙은 위원들은 후한이 두려워 철저히 외면하고 말았다. 여우주연상은 지난 해에 이어 2년연속 히치콕의 스릴러 영화 <의혹>의 타이틀 롤을 맡았던 조안 폰테인이 함께 후보에 오른 언니, 올리비아 디 해빌랜드를 물리치고 오스카를 가져갔다. 감독이며 배우인 로버트 몽고메리는 1938년에 이어 또다시 <조단씨 오다>로 남우주연상에 도전했지만 끝내 탈락의 수모를 겪어야했다. 엔터테이너, 밥 호프의 사회로 진행된

1943년(제15회)의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은 MGM이 내놓은 드라마 <미니버 부인>에게 돌아갔다. 더군다나 <미니버 부인>는 오스카의 꽃이랄 수있는 주요 부문인 감독상(윌리엄 와일러), 여우주연상(그리어 가슨), 여우조연상(테레사 라이트)를 독식해버려 이 해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그리어 가슨은 한 시간이 넘는 긴 수상소감을 털어놓는 바람에 방청객과 동료배우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1939년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로 후보에 지명되었던 제임스 캐그니는 <양키 두들 댄디>로 5년만에 자신의 불운을 털어냈다.

1944년(제16회)의 시상식은 코메디언, 잭 베니의 사회로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그로만 중국극장에서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이해에는 다양한 쟝르의 영화들이 두루 포진했다. 전쟁과 로맨스, 그리고 느와르 풍의 분위기를 잘 조합한 <카사블랑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휴먼 코메디>, <라인의 감시>, 그리고 <옥스바우 사건>과 같은 리얼리즘 영화들을 제치고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생전 처음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폴 루카스는 <라인의 감시>로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소감을 밝혔고 여우주연상 또한 처음 후보에 오른 제니퍼 존스가 <버나데트의 성가>로 남편인 로버트 워커의 뜨거운 키스 세례를 답례로 받았다. 오히려 강력한 수상자로 내정되었던 그리어 가슨은 지난해의 마라톤 소감때문에 아카데미 회원들로부터 외면받았고 스웨덴 출신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큰 눈망울을 글썽이며 '키스를 하면 코가 부딪치지 않나요?' 해봤지만 선배인 그레타 가르보의 불운을 떠올리게만 했다. 정통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배우들에게 인색한 보수성 강한 위원회는 여우조연상을 그리스 출신의 '강한' 여자인 카티나 팍시누에게 수여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강한 레지스탕스를 연기했다.

2년연속 같은 장소에서 밥 호프와 감독, 존 크롬웰의 사회로 진행된 1945년(제17회) 시상식은 파라마운트사의 잔치였다. <나의 길을 가련다>로 오스카 작품상을 차지한 그들은 가수이며 배우인 '스탠더드 팝의 왕자' 빙 크로스비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자 늘 2인자였던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한발 앞서 나가는 감격을 맛보았다. 젠티한 미남배우, 캐리 그란트(Cary Grant)는 2년전 <페니 세레나데>에 이어 다시한번 <외로운 마음>으로 도전했지만 쓴맛을 보았고 두번다시 오스카 무대에 오르지 못한 마지막 해가 되었다. 여우주연상은 2년연속 후보에 올라 <가스등>에서 샤를르 보와이에에게 시달리는 병약한 여인을 연기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차지했다. 로버트 테일러의 피앙새인 '느와르의 여왕' 바바라 스탠윅은 3번째 후보에 올라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 남우조연상은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리 피츠제랄드가 차지하였고 여우조연상은 '배리모어 가문'의 연극배우인 에델 배리모어가 <외로운 마음>으로 영화계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밥 호프의 진행으로 거행된 1946년(제18회)의 아카데미 시상식은알코올 중독자의 삶을 그린걸린 <잃어버린 주말>에게 돌아갔다. 그 작품의 주연배우였던 레이 밀란드는 칸느영화제의 여세를 몰아 오스카마져 거머쥐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런반면 제작자이자 배우이며 춤꾼이자 연출가였던 팔방미인 진 켈리는 <닻을 내려라>로 혼신의 연기를 펼쳤지만 불운의 오스카로부터 여전히 푸대접을 받았다. 여우주연상은 예측이 불가능한 한해였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성메리의 종>, 제니퍼 존스는 셀즈닉의 강력한 천거로, 그리어 가슨은 <결단의 계곡>으로 후보에 올라 선전했지만 <밀드레드 피어스>의 조안 크로포드가 오스카 트로피에 입맞춤을 했다. <브룩클린의 자라는 나무>의 제임스 듄이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고 늘 지고지순한 여인상을 보여준 앤 리비어가 <내셔널 벨벳>으로 이브 아덴, 안젤라 랜스버리와 같은 배우들을 물리치고 여우조연상을 가져갔다.

오랜만에 다시 코메디언 잭 베니의 사회로슈라인 시민 오디토리엄에서 거행된 1947년(제19회)의 아카데미는 시상식이 열리기전부터 <우리 생애 최고의 해>가 과연 몇개나 트로피를 가져갈지 최고의 관심사였다. 예상대로 저작품상과 윌리엄 와일러는 자신의 두번째 감독상을 차지했다. 프레드릭 마치는 1932년에 이어 생애 두번째 주연상을 <우리 생애 최고의 해>의 열연으로 보상받았다. 같은 해만 아니라면 충분히 수상자가 되었을 <위대한 생애>의 제임스 스튜어트와 <헨리왕>의 로렌스 올리비에는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 디 해빌랜드는 제니퍼 존스, 셀리아 존슨, 그리고 로잘린드 럿셀과 같은 기라성같은 배우들을 물리치고 <그들에겐 각자의 몫이 있다>로 동생에 이어 자매가 오스카상을 차지한 첫 선례를 만들었다. 남우조연상은 실제로 장애인인 배우, 해롤드 럿셀이 <우리 생애 최고의 해>로 차지했지만 그후 세월이 흐른후, 아내의 눈수술비를 마련하기위해 자신의 트로피를 경매에 내놓은 불행을 겪기도했다. D.W.그리피스가 애지중지하는 릴리안 기쉬(Lillian Gish)는 자신에게 유일한 수상기회였던 이해 <정오의 결투>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면도칼날>에서 열연한 앤 박스터에게 패하고 말았다.

1949년(제21회)의 진행은 로버트 몽고메리가 추천되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으로 늘 남우주연상에서 푸대접을 받던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는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차지하여 그간의 수고를 보상받았다. 지식층의 대변인인 '몬티'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추격자>로 후보에 올랐지만 헛물만 들이마셨다. 여우주연상은 <자니 벨린다>에서의 벙어리 역을 잘 소화한 제인 와이먼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해, 남편인 로널드 레이건을 버리고 루 아이레스와 바람을 피워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남우조연상은 아들인 존 휴스턴이 연출한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에서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인간상을 사실감있게 연기한 아버지, 월터 휴스턴이 차지했다. 여우조연상은 또다른 존 휴스턴의 느와르 영화인 <키 라르고>의 클레어 트레버에게 돌아갔고 <시에라..>를 연출한 존 휴스턴은 <햄릿>의 독식을 잠재우며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1950년대의 오스카상 이모저모

RKO 빈티지 극장에서 거행된 1950년(제22회) 시상식은 배우, 폴 더글러스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야망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시대극인 <모두가 왕의 신하들>이 작품상을 거머쥔 이해, 그 영화에서 열연을 펼친 브로데릭 크로포드가 영예의 남우주연상마져 가져갔다. <챔피온>에서 혼신의 연기를 보여준 커크 더글러스는 후보로 만족해야했고 늘 서부극에서 탁월한 영역을 구축한 존 웨인은 전쟁극인 <이오지마의 모래>로 처음 후보에 올랐다. 여우주연상은 <상속녀>의 올리비아 디 해빌랜드가 4년만에 다시한번 오스카상을 수상하여 동생보다 나은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타계할때까지 평생 후보에만 오른 데보라 커(Deborah Kerr)는 <내 아들 에드워드>로 처음 시상식에 올라 자신에게 지워진 불행의 첫 단추가 어떻게 꿰맞추어졌는지 알지를 못했다. 역시 전쟁물인 <12시 정각>의 딘 재거가 남우조연상을 가져갔고 <모두가..>의 메레세데스 맥캠브리지는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감독상은 <세 아내로부터 온 편지>의 조셉 L.맨케비치에게 돌아가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탭댄서의 달인'인 프레드 아스테어의 사회로 거행된 1951년(제23회) 시상식은 독기에 가득찬 베티 데이비스의 열연이 돋보인 <이브의 모든 것>이 작품상, 남우조연상(조지 샌더스), 감독상(조셉 L.맨케비치)등 주요 부문을 가져가며 무려 14개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여우주연상을 놓고 같은 영화에 출연한 앤 박스터와 경쟁하리라고 예상했던 결과는 <본 예스터데이>의 주디 홀리데이가 가로채 버렸다. 남우주연상은 <시라노 베제락>의 호세 페러에게 돌아갔고 여우조연상은 <이브의 모든 것>의 셀레스티 홈, 델마 리터 같은 화려한 배역진을 누르고 <하비>의 조세핀 헐이 차지했다. 무성영화의 전설적인 배우인 글로리아 스완슨은 <선셋 대로>의 명멸이 교차한 노배우 역을 열정적으로 연기하고도 끝내 상과는 영원히 인연을 끊고 말았다. 1952년(제2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코메디언 대니 케이는 <파리의 미국인>이 작품상을 수상하자 트로피를 감독, 빈센트 미넬리에게 건네주며 '나에게 한번 춤출수 있는 기회를 주시죠?' 라며 훈훈한 농담을 건넸다. 전매 특허인 '느와르' 쟝르에서 단한번도 수상을 하지못했던 52살의 중늙은이, 'Boggie' 험프리 보거트는 캐서린 햅번과 공연한 <아프리카 여왕>으로 첫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그는 5년후, 타계했다. 여우주연상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제부인 말론 브란도에게 시달리는 '블랑쉬' 역의 비비안 리가 암투병중에도 열연을 펼쳐 생애 두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건네받고 다른 수상자들보다 기쁨이 배가되었다. 3년만에 다시 <젊은이의 양지>로 오스카에 도전한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또다시 쓴맛만 보았던 이해, 오스카상 남우조연상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강직한 신부역을 연기한 성격파배우, 칼 말덴이 가져갔다. 그리고 함께 그 영화에 출연했던 킴 헌터는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지만 거액을 들인 성서사극, <쿼바디스>는 한 명의 수상자도 낳지못하는 불행한 걸작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로스엔젤레스 RKO 빈티지 극장에서 밥 호프와 미남배우, 콘라드 네이겔의 공동사회로 진행된 1953년(제25회)의 작품상은 미디어 종사자들조차도 예측하기 힘든 말그대로 종이 한장차의 고만고만한 작품들로 포진하였다. 하지만 70살에 가까운 노병, 세실 B.데밀이 연출한 <지상 최대의 쇼>가 <하이눈>, <물랭루즈>와 같은 대작들을 밀어내고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하이눈>의 용기있는 보안관 역을 맡은 게리 쿠퍼는 꼬박 11년을 기다린 끝에 자신의 생애 두번째 오스카상 남우주연상을 쟁취하였지만 <미녀와 야수>의 커크 더글러스(Kirk Douglas)와 <비바 자파타!>의 말론 브란도는 혼신을 다한 열연에도 불구하고 상은 결코 두명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리틀 시바여, 돌아오라>의 셜리 부스는 <결혼식 맴버>의 줄리 해리스, <내 마음의 노래>의 수잔 헤이워드처럼 말랑말랑한 작품에서 돋보였던 미녀 배우들을 물리치고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엘리아 카잔의 <비바 자파타!>에서 에우젬피오 역으로 분한 멕시코 출신의 안소니 퀸이 남우조연상을 가져갔지만 여우조연상은 <리틀 시바여, 돌아오라>에서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며 수상이 유력시 대던테리 무어 대신, <미녀와 야수>의 글로리아 그래함이 차지해서 이변 아닌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존 포드, 존 웨인 콤비의 <조용한 사내>는 많은 노미네이션에도 불구하고 감독상에 만족해야만 했다. 존 포드는 유일하게 감독상을 4번 수상한 연출가가 되었다.

뉴욕의 NBC 센트리 극장과 로스엔젤레스의 RKO 빈티지 극장에서 이원중계된 1954년(제26회) 수상결과는 군병정에서 일어나는 비리와 암투의 일상을 다룬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다부문 수상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이해 유난히 <지상에서..>에서 좌웅을 다툴 작품들은<로마의 휴일>, <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서부극 <셰인>과 같은 각 분야의 최고 영화들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지상에서...>는 작품상을 비롯하여 남,녀 조연상(프랭크 시나트라, 도나 리드)과 프레드 진네만에게는 감독상을 주는 등, 주요 부문을 챙겨갔다.한편 남우조연상의 프랭크 시나트라는 가수로서의 경력이 한물 갈때쯤, 출연한 이 영화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Monty' 몽고메리 클리프트(Montgomey Clift)는 작품상의 레임덕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수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지난 해, <내 사촌 레이첼>로 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리처드 버튼은 <로브>로 주연상 후보에 오른 걸로 만족을 했다. 남우주연상은 <제17 포로수용소>의 윌리엄 홀덴에게 돌아갔고 여우주연상은 일탈을 꿈꾸지만 자신의 신분을 잊지않는 아름다운 공주역의 오드리 햅번이 <로마의 휴일>로 첫 수상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기마련, 데보라 커는 <지상에서...>의 바람난 장교 부인역으로 숱하게 지탄을 받고도 5년만에 다시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지난 해에 이어 1955년(제27회)에도 L.A와 뉴욕에서 동시에 진행된 오스카 시상식은 '맥카시' 열풍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엘리아 카잔이 연출한 <워터프론트>가 작품상의 영예를 누렸다. 더군다나 자신의 애제자인 말론 브란도가 같은 작품으로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게되자 한창 쪼그라들었던 가슴을 펼수가 있었다. 여우주연상은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덴과 같은 혁혁한 배우들 틈에 끼어 학대받는 여인 역을 진솔하게 표현한 <갈채,County Girl>의 그레이스 켈리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수상의 영광을 누릴 틈도없이 다음해, 모나코의 레니에 공이 내민 다이아 반지를 거부하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뛰어들었다. 가장 혼전의 양성이 되리라고 예상되었던 남우조연상은 칼 말덴, 리 J.콥, 로드 스타이거 삼각편대가 포진한 <워터프론트> 맴버들을 물리치고 어부지리 격으로 <맨발의 콘데사>의 에드먼드 오브라이언에게 돌아갔다. 여우조연상은 <부러진 창>의 캐티 주라도를 꺾고 <워터프론트> 군단의 에바 마리 세인트가 차지했다. 1956년(제28회)은 코메디언 제리 루이스, 배우 클로데트 콜버트, 감독, 조셉 L.맨케비치가 진행을 도모했다. 요즘처럼 일단 얼굴이 대세인 세상에서 착한 심성으로 살아남으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마티>는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어네스트 보그나인), 감독상(델버트 만) 등 알짜배기부문을 거머쥐고 환호성을 불렀다. <에덴의 동쪽>으로 사후에 후보에 올랐던 제임스 딘은 어쩐지 아카데미 회원들의 '예의'처럼 비쳐졌고여우주연상은 <내일 울련다>의 수잔 헤이워드, <섬머타임>의 캐서린 햅번과 같은 쟁쟁한 라이벌들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출신의 배우로는 사상 처음 안나 마그냐니가 <장미문신>으로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미스터 로버츠>의 잭 레먼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가운데, 제임스 딘의 '여인들'이 포진한 여우조연상은 나탈리 우드, 마리사 파반 등을 제치고 <에덴의 동쪽>에서 제임스 딘의 어머니 역을 연기한 조 반 플리트에게 돌아갔다. 지난 해, 쇼호스트로 능력을 인정받은 제리 루이스가 다시 진행 마이크를 잡은 가운데 거행된 1957년(제29회) 오스카는 전 세계를 누비며 촬영하여 막대한 흥행성적만큼이나 제작비를 쏟아부은 <80일간의 세계일주>에게 돌아가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남우주연상은 고지식한 왕을 연기한 뮤지컬 영화 <왕과 나>의 대머리 스타, 율 브리너가 사후에 2년연속 후보에 오른 제임스 딘, <삶의 욕망>의 커크 더글러스와 같은 만년 후보들을 물리쳤다. 여우주연상은 감독, 로베르토 롯셀리니와 불륜을 저질러 한때 헐리웃으로부터 매장당했던 <아나스타샤>의 잉그리드 버그만이 차지했고 그녀는 단상위에서 지난 5년간의 유구한 세월을 회상하듯 눈물을 펑펑 흘렸다. 데보라 커는 세번째 도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2인자로 만족해야만했다. <삶의 욕망>에서 '고갱' 역을 연기한 안소니 퀸은 4년만에 자신의 두번째 남우조연상을 차지했지만 단 8분간 출연하고도수상의 기쁨을 누렸고로맨스 드라마인 <바람결에 쓰다>에서 록 허드슨과 알콩달콩한 밀어를 나눈 도로시 말론은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대작, <80일간...>을 물리치고 <쟈이언트>로 감독상을 수상한 조지 스티븐스는 <셰인>에서 버림받은 불쾌감을 어느정도 치유했다. 제임스 스튜어트, 데이빗 니븐, 잭 레먼, 로잘린드 럿셀, 그리고 밥 호프 등 초호화 호스트들이 일사분란하게 진행한 1958년(제30회) 시상식의 꽃인 작품상은 샘 스피겔이 제작한 전쟁물, <콰이강의 다리>에게 돌아갔다. 영국의 저명한 연극배우 출신인 알렉 기네스는 <콰이강의 다리>로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았고 29살의 아이돌 스타인 안소니 프란시오사는 <모자하나 가득한 빗물>로 지명된 자체만으로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여우주연상은 만년 후보, 데보라 커, <페이톤 플레이스>의 라나 터너, <애정이 꽃피는 나무>의 리즈 테일러를 물리치고 <이브의 세 얼굴>에서 개성강한 연기를 선보인 조안 우드워드에게 돌아갔다. 특히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계인들이 시청하는 오스카 무대에 처음 얼굴을 내밀고 만방에 자신의 미모를 뽐낸 한 해이기도 했다. <사요나라>의 레드 버튼은 남우조연상을 차지했고 같은 작품에서 공연한 우메키 미요시는 동양인으로서는 사상 처음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사례를 만들었다. 그해, 데이빗 린 감독은 본업인 감독상을 포함하여 무려 7개의 트로피를 가져간 <콰이강의 다리>로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보통 3월달에 열리던 오스카상 시상식이 4월 초로 연기되어 거행된 1959년(제31회)의 작품상은 뮤지컬 영화인 <지지>에게 돌아갔다. <뜨거운 양철 지붕위의 고양이>에서 매마른 부부상을 보여주며 열연을 펼친 폴 뉴만의 오스카 도전사가 시작되었다. 2년전, <80일간의 세계일주>로 후보에조차 지명받지 못했던 데이빗 니븐은 <세퍼레이트 테이블>로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았지만 함께 공연했던 데보라 커는 5번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싶다>의 수잔 헤이워드에게 감격스런 순간을 넘겨주어야만 했다. 그녀와 더불어 또 한명의 불행한 여배우인 로잘린드 럿셀(Rosalind Russell)은 <안티 맘>으로 생애 4번째 도전을 했지만 더이상 같은 기회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부개척사를 다룬 <빅 컨트리>로 남우조연상은 벌 아이브스에게 돌아갔지만 액터즈 스튜디오의 전수자인 리. J 콥은<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후보에 오르는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여우조연상에 지명된 웬디 힐러는 <세퍼레이트 테이블>에서 함께 공연한 데보라 커에게 대신 축하를 보내는 우정을 과시했고 1952년 <파리의 미국인>으로 처음 지명된 빈센트 미넬리는 <지지>를 통해 뮤지컬의 진수를 보여주며 감독상을 처음으로 수상하였다.


-1960년대의 오스카상 도전사

'새로운 출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롭게 시작된 1960년(제32회) 오스카상 작품상은 <벤허>, 단 한편을 위한 축제의 자리였다.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기록한 10개부문 수상기록을 무려 20년만에 11개부문으로 갈아버린 이 작품은 성서에 바탕을 둔, 두 인간상을 중심으로 박진감 넘치는 마차씬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될만큼 그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대작 영화였다. 예상대로 남우주연상은 <벤허>에서 유다 역으로 분한 찰톤 헤스턴에게 돌아갔다. 그는 그 작품의 강한 커리어때문에 이후 많은 자신의 경력을 종교영화에서 대부문 허비하듯 보내야했다. 여우주연상은 마릴린 먼로에게 눈이 멀어 자신은 물론 가정을 등한시하는 남편, 이브 몽탕의 탈선에도 불구하고 <산장의 방>에서 돋보이는 연기를 펼친 시몬느 시뇨레에게 돌아갔다.독일출신의 배우로 첫 수상 기록이었다. 그런반면 <지난 여름갑자기> 팀과 <살인의 해부학> 팀은 철저히 외면받은 한해였다. 성격파 배우, 휴 그리피스는 <벤허>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샐리 윈터스는 <삶의 모방>의 수잔 코너, 후아니타 무어를 가까스로 물리치고 <안네 프랑크의 일기>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1937년 <도즈워스>로 첫 지명된 이래, <미니버 부인,1943>,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7>에 이어 생애 3번째 감독상을 수상하여 최다감독상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61년(제33회), 산타모니카의 시민 오디토리엄에서 명 사회자, 밥 호프의 사회로 진행된 그해 오스카 작품상은 빌리 와일더가 연출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가 차지하였다. 1954년 <지상에서 영원으로>로 후보에 올랐던 버트 랭카스터는 <엘머 갠트리>로 2수끝에 남우주연상의 감격을 누렸지만 직장내의 인사문제와 성희롱 문제를 다뤄 큰 화제를 몰고온 <아파트 열쇠를...>의 잭 레먼은 아깝게 수상기회를 다음으로 미뤄야만 했다. 여우주연상은 <아파트 열쇠를...>의 셜리 맥클레인이나 <선다우너스>의 데보카 커 중에 한 명이 유력시 되었지만 남편인 제작자, 마이클 토드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던 <버터필드 8>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돌아가 파문이 일기도 했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여되고 배우인, 커크 더글러스가 제작에 대부문 투자한 <스팔타커스>는 피터 유스티노프가 남우조연상을 가져가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스릴러 영화의 전형적인 틀을 탈피한 <싸이코>의 자네트 리를 제치고 <엘머 갠트리>의 셜리 존스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이해, 감독상은 <아파트 열쇠를...>의 빌리 와일더에게 돌아갔다. 1962년(제34회) 시상식은 밥 호프가 3년연속 진행을 한 가운데, 로버트 와이즈가 제작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차지했다. 뮤지컬 영화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남,녀 조연 후보에 오른 조지 차키리스와 리타 모레노에게 수상의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물론 무려 10개부문의 트로피를 받기위해 분주하게 무대로 오르락내리락 해야만했다. 남우주연상은 무려 4번째 도전에 나선 <파니>의 샤를르 보와이에(Charles Boyer), 같은 작품에서 공연한 스펜서 트레이시를 물리치고 <뉘렘베르크의 재판>의 맥시밀리언 쉘이 차지했다. 여우주연상은 전쟁중의 이탈리아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두 모녀의 일상을 담은 <두 여인>의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에게 돌아갔다. 영화보다 자신의 관능미를 더욱 부각시켜 그녀는 오스카의 많은 남성 관객들로부터 박수세례를 받았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또다시 남우조연상에 지명되었지만 바보처럼 방청석에 앉아 조지 차키리스의 수상소감을 들어야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가수이며 배우인 엔터테이너, 프랭크 시나트라의 사회로 진행된 1963년(제35회)은 샘 스피겔에게 또다시 돈다발을 안겨준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메인상인 작품상을 비롯하여 감독상(데이빗 린,1958년에 이어 두번째) 등 모두 7개부문에서 트로피를안겨준최고의 해였다. 그러나 정작 잔뜩 기대를 모았던 남우주연상은 <앵무새 죽이기>에서 진실을 파헤치려고 고군분투하는 변호사 역으로 분한 그레고리 펙에게 돌아갔고 처음 후보에 오른 피터 오툴은 자신이 노미네이트된 8번의남우주연상 후보 추천중에, 그 첫번째 신고식을 치렀다. 여우주연상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남편을 구하려는 <술과 장미의 나날>의 리 레믹과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에서 명연을 펼친 베티 데이비스를 밀어내고<미러컬 워커>의 앤 밴크로프트가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남우조연상은 <스윗버드 오브 유스>의 에드 버글리가 환갑의 나이에 감격에 겨운 소감을 밝혔고 여우조연상은 <앵무새 죽이기>의 메리 배드햄, <맨츄리언 캔디데이트>의 안젤라 랜스버리, <알카트래츠의 조류연구가>의 델마 리터를 제치고 <미러컬 워커>의 아역배우인 패티 듀크가 열여섯의 어린나이에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지난 해, <술과 장미의 나날>에서 불세출의 연기를 펼쳤던 잭 레먼의 사회로 진행된 1964년(제36회) 오스카 작품상은 토니 리처드슨이 제작과 연출을 겸한 <톰 존스>가 감독상을 포함하여 4개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무려 3,500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투여된 <클레오파트라>는 비록 4개부문의 오스카상을 거머쥐긴 했지만 단지 렉스 해리슨의 연기력만 아까울뿐, 화려한 의상이나 리즈 테일러의 드러난 가슴밖에 없는 졸작으로 폄하되었다. 남우주연상은 <들백합>의 시드니 포이티에가 수상하였는데, 흑인배우로서는 사상 첫 주연상을 가져감으로써 드디어 유색인 배우들도 주류영화에 진입했다는 뜻깊은 의미를 부여했다.(흑인 최초의 수상은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해리 맥다니엘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바있다). 여우주연상은 의 레슬리 캐론과 3번째 도전에 나선, <적절한 이방인과의 사랑>에 출연한 나탈리 우드와 경합을 벌인끝에 <허드>의 패트리샤 닐이 수상자가 됨으로써 게리 쿠퍼에게 버림받았던 실연의 아픔을 어느정도 보상받았다. 남우조연상은 역시 환갑이 넘은 고전 배우, 멜빈 더글러스가 <허드>로 늦은 나이에 감격을 누렸고 그해 무려 71살의 마가렛 루서포드는 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여 1989년 제시카 탠디가 80세의 나이로 수상할때까지 최고령 기록으로 남기도했다. 다시 오스카 무대로 돌아온 밥 호프의 진행은 1965년(제37회)를 더욱 활기차게 했다. 잭 워너가 제작한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는 작품상을 비롯하여 8개부문을 독식해 버렸고 렉스 해리슨이 <마이 페어 레이디>로 남우주연상을, 줄리 앤드류스가 <메리 포핀스>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이해에는 뮤지컬 쟝르가 대세인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2년연속 후보에 오른 <베케트>의 피터 오툴과 벌써 세번째 후보에 지명된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은 또다시 헛걸음질을 해야했다. 더군다나 남편을 위해 종횡무진 로비를 펼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리처드 버튼은 방청객에 앉아 덤덤한 표정으로 영국신사의 절제를 보여주었다. 남우조연상은 역사극에 특히 빛을 발하는 피터 유스티노프가 <톱카피>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고 러시아 무대배우출신의 릴라 케드로바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여우조연상을 눈발이 흩날리는 상테 페테스부르크까지 가져갔다. 산타모니카의 시빅 오티토리엄에서 거행된 1966년(제38회)의 오스카상 작품상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수많은 사운드 트랙의 인기로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사운드 오브 뮤직>에게 돌아가면서 지난 해에 이어 2년연속 뮤지컬 쟝르가 작품상을 쟁취하였다. 늘 악역이나 개성강한 성격파배우로 좋은 연기를 펼쳐온 리 마빈은 <캣 발로우>로 첫 수상의 기쁨을 누렸고 2년연속 후보에 오른 리처드 버튼은 또다시 고배를 들었다. 그리고 1949년 <햄릿>이후, 17년만에 다시 도전에 나섰던 '세익스피어 전문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경은 <오델로>의 망령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흥행대작 <닥터 지바고>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줄리 크리스티는 <달링>으로 <콜렉터>에서 공포에 찌든 인간애를 표현한 사만다 에거를 제치고 연인인 워렌 비티의 열렬한 키스세례를 받았다. 남우조연상은 만년 조역배우인 마틴 발삼이 <천명의 어릿광대>로 첫 지명에 첫 수상을 기록하였고 여우조연상은 <오델로>의 막강한 라인업인 조이스 레드만과 매기 스미스를 따돌리고 <푸른 천조각>의 샐리 윈터스가 1960년에 이어 생애 두번째 수상의 기쁨을 설파하였다. 로버트 와이즈에게 감독상을 수여한 <사운드 오브 뮤직>은 이해 5개의 트로피를 가져갔고 비록 본상에서는 운이 없었지만 데이빗 린의 <닥터 지바고>도 5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같은 장소, 같은 사회자로 진행된 1967년(제39회)의 작품상은 무려 6개부문에서 수상자를 배출한 <사계절의 사나이>에게 돌아갔다. 7~8년에 한번, 연극무대에서 영화계로 돌아오곤 하던 폴 스코필드는 <사계절의 사나이>에서 호연, 브로드웨이에서의 명성을 이어가며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또 한명의 '오스카 이단아'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은 지난 해에 이어 2년연속 <샌드 페블스>로 후보에 올랐지만 너무 레이싱에 몰두한 탓에 에너지를 과소비한 후였다. 자신 생애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었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얼굴뿐만 아니라 '연기파' 배우라는 뜻밖의 소식도 함께 전해 들으며 생애 2번째 오스카를 남편, 리처드 버튼의 뜨거운 포옹속에서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지만 '레드그레이브 가문'의 두 자매, 바네사(<모간>)와 린(<조지걸>)은 동시에 후보에 오른 것으로 만족해야만했다. 그리고 프랑스식 로맨스의 전형을 보여준 <남과 여>의 아누크 에메는 파리지엔느의 품위라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사실로 큰 축복을 받았다. 잭 레먼의 평생지기인 월터 매튜는 <포츈 쿠키>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고 <알피>의 비비안 머찬드 대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의 샌디 데니스는 여우조연상을 가져갔다. 감독상은 <사계절의 사나이>를 연출한 프레드 진네만이 1954년 <지상에서 영원으로>이후, 13년만에 두번째로 수상했지만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또한 5개의 트로피를 챙겼다. 흑백 논쟁을 불러 일으킨 시드니 포이티에와 로드 스타이거가 공연한 <밤의 열기속으로>가 작품상을 비롯 5개부문을수상한 1968년(제40회) 아카데미는 <밤의 열기속으로>에서 매력적인 악역을 연기한 로드 스타이거에게 돌아가면서 그간의 불운을 떨쳐냈다. 불과 서른 살의 플레이보이, 워렌 비티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주었고 벌써 4번씩이나 후보에 오른 <쿨 앤 루크>의 폴 뉴먼은 씁쓸히 발길을 돌려놓아야했다. 자신에게는 첫 주류영화나 다름없는 <졸업>으로 등장한 더스틴 호프만은 해맑은 미소로 어리숙한 숫총각이 아님을 입증해 주었다. 가장 치열한 경합이 예상되었던 여우주연상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페이 더너웨이, <졸업>의 음탕한 여인, 앤 밴크로프트, <어둠을 기다리며>의 오드리 햅번을 따돌리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캐서린 햅번이 무려 34년만에 자신의 두번째 오스카를 감싸안았다. <쿨 앤 루크>의 조지 케네디가 생애 첫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막나가던 주부, 에스텔 파슨스가 여우조연상을 가져갔다. <졸업>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마이크 니콜스는 7개부문에 자신의 작품을 올리고도 2개만을 수상하자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고 8개부문에 지명되고도 역시 2개밖에 차지하지 못한 <우리에게 내일...>의 아서 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로스엔젤레스 뮤직 카운티에서 거행된 1969년(제41회) 아카데미 작품상은 뮤지컬 영화 <올리버!>가 총 5개의 트로피를 가져가며 영광을 누렸다. 연출가로 겸업을 선언한 폴 뉴먼은 <레이첼, 레이첼>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탈락의 쓴맛을 보았고 <찰리>의 클리프 로버트슨은 삼세판이라는 속설을 뒤집기라도 하려는 듯 <겨울의 라이언>에서 출중한 연기력을 어김없이 보여준 피터 오툴(Peter O'Toole)에게 또다시 패배의 잔을 들게했다. 여우주연상은 <화니걸>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겨울의 사자>의 캐서린 햅번이 1932년 월라스 비어리와 프레드릭 마치가 공동으로 수상한 이래 두 번째 선례를 남겼고 캐서린 햅번은 2년연속 수상이자 오스카상 최초로 3번째 여우주연상을 기록하는 겹경사를 맞이했다. <장미의 주제>의 잭 앨버트슨은 동료배우인 패트리샤 닐이 고배를 든 것을 위로라도 받으려는 듯 남우조연상을 얻었고 72세의토키 초창기배우인 루스 고든은 <로즈마리 베이비>로 훈훈한 말년 선물을 받았다.


-1970년대의 오스카상 이모저모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뮤직센터에서 진행된 1970년(제42회) 시상식의 피날레는 로드무비에 바탕을 둔60년대 뉴욕 뒷골목의 씁쓸한 이야기인<미드나잇 카우보이>가 작품상을 차지하여 선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제임스 레오 헐리의 파격적인 소설을 원작으로한 이 작품은 그무렵 보기드문 동성애를 문제를 다뤄 큰 파문을 몰고왔다. 소재가 어떻든 연출가, 존 슐레진저는 이 작품으로 3개부문의 오스카를 가져갔고 주연배우인 존 보이트와 더스틴 호프만이 경합하는 사이, <진정한 용기>에서수줍음많고술을 좋아하는 미군장교역으로 분한 62살의 존 웨인이 3수끝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4년 <정복자>를 촬영할 당시, '징키스칸의 저주' 라는 명명된 병에 걸려 타계하던 1979년까지 심한 고통속에 지내다 타계했다. 이해, 리처드 버튼은 <천일의 앤>, 피터 오툴은 <굿바이 미스터 칩스>로 재도전을 했지만 역시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여우주연상은 연예계 2세들의 각축장이었다. 헨리 폰다의 딸, 제인 폰다는 <그들이 말을 쏘았다>로, 빈센트 미넬리와 주디 갈란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자 미넬리는 <푸키>로 각각 후보에 올랐지만 <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의 매기 스미스의 연기력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50년대의 지성미를 대변했던 진 시몬즈(Jean Simmons)는 <해피 엔딩>으로 이름만 올렸을뿐 더이상 오스카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남우조연상은 <그들이 말을 쏘았다>의 지그 영에게 돌아갔지만 <이지라이더>의 주연배우인 데니스 호퍼나 피터 폰다보다 주류 초년병이었던 잭 니콜슨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전 미국 대통령인 닉슨으로부터 '미국인의 요정'이라는 애칭을 들었던 골디 혼이 브로드웨이의 희곡을 영화화한 <선인장 꽃>으로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뛰어난 스토리와 훌륭한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밥, 캐롤, 테드 그리고 앨리스>는 후보지명만 4회에 그치고 말았고 <천일의앤>은 무려 11개부문에 지명을 받고도 단 한개의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한 신기록아닌 진기록을 수립하였다.1971년(제43회) 오스카상 작품상은 2차대전의 영웅의 한명이었던 조지 스미스 패튼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패튼 대전차군단>에게 돌아갔다. <패튼>은 작품,감독,남우주연상을 포함하여 7개부문에서 최고작으로 지명되어 최다 수상작이 되었지만 남우주연상을 수상해야할 조지 C.스코트의 평소의 곧은 성격처럼 오스카상 수상을 거부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흥행력과 인기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를 물리치고 <우먼 인 러브>의 글렌다 잭슨은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연극배우 출신의 존 밀즈 경(Sir)은 62살의 초로한 나이에 바보로 출연한 <라이언의 딸>로 남우조연상을 받는 감격을 맛보았고 무성영화시대부터 성실한 활동을 보여준 <에어포트>의 헬렌 헤이스는 근 40년만에 두번째 오스카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도널드 서덜랜드, 엘리엇 굴드 등 개성파배우들이 포진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던 <매쉬,M.A.S.H>는 극본상 하나만 달랑 받아들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코스타 가브리스가 연출한 <제트>는 최초의 작품상 후보에 오른 외국영화가 되었다. 지난 해, 오스카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헬렌 헤이스는 가수이며 코메디언인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1972년(제44회) 시상식의 진행을 시작하였다. 마약밀매단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 싸우는 경찰들의 이면을 다룬 <프렌치 커넥션>은 작품상을 비롯하여 5개부문을 가져갔다. 주연배우인 진 해크만은 보기 불편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단점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해소시켰다. 한 남자의 실종사건을 추적하면서 일어나는 알란 J.파큘라의 문제작인 <콜걸:클루트>의 창녀역으로 분했던 제인 폰다는 아버지보다 먼저 주연상을 거머졌다. 글렌다 잭슨은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로 재차 도전했고 연극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문을 두드렸지만 또다시 좌절의 아픔을 맛보았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실험작인 <라스트 픽쳐 쇼>의 벤 존슨과 클로리스 리치먼은 여타 동료배우들을 제치고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라스트 픽쳐 쇼>는 6개부문 후보에 지명되어 고작 2개부문의 조연상만 챙겨갔다. 윌리엄 프리드킨은 <프렌치 커넥션>으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찰톤 헤스턴, 마이클 케인, 그리고 오스카 무대에 마지막으로 오른 미남배우, 록 허드슨의 공동진행으로 개최된 1973년(제45회) 오스카상 작품상의 영예는 마리오 푸조 원작의 소설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연출한 미국내 이탈리아 마피아를 심층있게 다룬 <대부>에게 돌아갔다. <대부>의 주인공인 비토 역을 연기하기위해 온갖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메소드 연기의 표본'인 말론 브란도는 미국정부의 인디언 박해를 문제삼아 조지 C.스코트에 이어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피터 오툴은 <룰링 클래스>로 자신의 생애 다섯번째 오스카에 지명되는 수모(?)를 겪었다. <카바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라이자 미넬리는 어머니인 주디 갈란드가 그토록 원하던 무관의 아픔을 대신 갚아주었다. 팝그룹, '슈프림스'를 이끌고 있던 다이아나 로스는 가수로 지명을 받았고 <이민자>의 리브 울만은 그레타 가르보, 잉그리드 버그먼에 이어 스웨덴 여배우로는 사상 3번째 지명받는 배우로 만족하였다. 남우조연상은 막강한 <대부>의 라인업인, 로버트 듀발, 알 파치노, 제임스 칸 트리오의 공세를 견뎌내고 <카바레>의 조엘 그레이가 차지했다. <나비의 외출>의 에일린 헤카트는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고 제작자이며 안무가, 그리고 연출가이기도 한 밥 포시는 <카바레>로 감독상을 포함하여 8개부문의 트로피를 차지하는 최고의 해를 보냈다. 원로배우들인 존 휴스턴과 데이빗 니븐, 그리고 가수인 다이애나 로스가 진행을 맡은 가운데 열린 1974년(제46회) 작품상은 뛰어난 두뇌플레이로 사기극을 벌이는 두 남자의 위트와 모험이 빛난 <스팅>에게 돌아갔다. 더구나 조지 로이 힐 감독은 감독상을 포함하여 7개의 오스카를 독식해버렸지만 정작 기대를 모았던 로버트 레드포드의 남우주연상 소식은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후보에 만족해야했고 <세이브 더 타이거>의 잭 레먼이 1956년 조연상을 수상한 이해 18년만에 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여우주연상은 가수로서 다이아나 로스에 이어 <추억>으로 지명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엑소시스트>의 엘렌 버스틴을 물리치고 <터치 오브 클래스>의 글렌다 잭슨이 칸느영화상은 물론 1971년에 이어 두번째 여우주연상을 받는 복많은 여배우로 등록하였다. 남우조연상은 오손 웰즈의 머큐리 극단의 오랜 지기인 존 하우스만이 <페이퍼 체이스>의 연기력을 인정받아 71살의 늦은 나이에 첫 감격을 누렸다. 여우조연상은 아버지인 라이언 오닐과 촬영장에 놀러갔다가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눈에 띄어 <페이퍼 문>에 출연한 테이텀 오닐이 불과 열 살의 나이로 오스카상을 수상함으로써 특별상을 수상했던 1934년의 셜리 탬플을 제외하고 가장 어린나이에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엑소시스트>에 출연했던 14살의 린다 블레어는 그후 '악령'의 나날을 보냈고 시상식 도중 뛰어든 남자 스트리퍼때문에 웃지못할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랫팩'의 일원이기도 했던 프랭크 시나트라,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는 오랜만에 1975년(제47회), 오스카 무대에서 만났다. 프란시스 F.코폴라는 자신이 연출한 2개의 작품인 <대부>와 <도청>을 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지만 결과는 2년전 전편인 <대부>에 이어 속편으로 또다시 <대부2>가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시리즈가 연속적으로 작품상을 수상하는 첫 기록을 세웠다. <해리와 톤토>의 아트 카니는 알 파치노,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과 같은 젊은 기수들을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다들 페이 더너웨이의 <차이나 타운>이 강력한 여우주연상 수상자라는 예견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앨리스는 더이상 여기 살지않는다>의 엘렌 버스틴이 세번의 도전끝에 후보의 딱지를 끊었다. <대부2>에서 알 파치노의 젊은 시절 아버지 역인 비토 역으로 살신의 연기를 펼친 로버트 드니로는 첫 지명만에 오스카상 남우조연상을 쟁취하였지만 평생동안 각종 뮤지컬 영화에서 발군의 '탭댄싱'을 보여준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는 75살의 나이에 처음이자 마지막 지명을 받고 쓸쓸히 무대를 내려갔다. 오랜 세월동안 헐리웃을 벗어나있다가 돌아온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57년에 이어 자신에게는 3번째 오스카상이자 첫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무려 10개부문의 지명을 받고도 단 한개만의 오스카를 가져간 로만 폴란스키는 아내인 샤론 테이트의 비극적인 죽음후, 두문분출하다가 들고나온 재기작<차이나 타운>은 가장 불행한 걸작이 되었고 11개부문에 지명된 <대부2>는 6개의 알짜배기 부문을 싹쓸이하여 묘한 대조를 보였다. 70년의 오스카상 여우조연상 수상자인 골디 혼과 뮤지컬 영화의 산증인인 진 켈리 등 많은 호스트들이 진행을 맡은 1976년(제48회)의 작품상은 배우, 마이클 더글러스가 제작에 참여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그해 최고의 흥행작 중의 한 작품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공상해양 스릴러인 <죠스>를 가까스로 제치고 차지하였다. 정신병동에 갇힌 범죄자가 감옥보다는 차라리 정신병원이 자유롭지 않을까 하는 착각속에서 병원의 시스템과 마찰을 일으키며 큰 이슈를 불러왔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은 아웃사이더에서 벗어나 진정한 연기파배우로 거듭나며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시드니 루멧의 사회드라마, <뜨거운 오후>의 위력적인 연기에도 불구하고 알 파치노는 '혹시' 피터 오툴의 전철을 밟지않을까 하는 우려를 느끼게했다. <선샤인 보이>의 코믹한 배우, 월터 매튜는 2번째 남우주연상을 지명받았지만 결코 수상 세레모니를 하지 못했다. <뻐꾸기 둥지 위로...>의 악랄하고 매정한 간호사로 분한 루이스 플레처는 단 한번의 지명끝에 오스카 베테랑인 글렌다 잭슨을 물리치고 자신의 유일한 여우주연상을 쟁취하였다. 프랑스 출신의 이자벨 아자니(Isabelle Adjanni)는 칸느, 세자르의 여세를 몰아 오스카에서도 <아델 H의 이야기>로 분전했지만 자신의 늙지않을 외모를 과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1930년 극영화에 데뷔한 80세의 조지 번스는 <선샤인 보이>로 남자배우로는 최고령 오스카상 남우조연상의 진기록을 작성하며 수상자가 되었고 유난히 개성강한 배우들이 즐비한 여우조연상의 수상자는 <샴푸>의 리 그랜트가 실비아 마일즈, 브렌다 바카로, <내쉬빌>의 릴리 톰린을 밀쳐내고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밀로스 포만은 감독상을 비롯하여 5개부문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지만 뉴욕비평가협회의 작품상, 감독상 수상작인 로버트 알트만의 <내쉬빌>은 오리지날 음악상, 하나만 얻는데 그쳤다. 작품상, 감독상 등 메인 후보에서 철저히 외면받은 <죠스>는 3개의 오스카를 가져갔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이후에도 오랫동안 오스카로부터 냉대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때 연인사이였던 워렌 비티와 제인 폰다가 진행을 맡은 1977년(제49회) 오스카의 화두는 단연 어느 무명배우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흔히 '이탈리아 종마'라고 알려진 실베스터 스탤론은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 <록키>가 작품상을 수상하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거물 제작자들을 향해 비소를 날렸다. 그의 비소는 <네트워크>나 <택시 드라이버>의 제작진들에게도 치명타였다. 그러나 정작 남우주연상은 1972년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에 이어 두번째 도전에 나선, <네트워크>의 피터 핀치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피터 핀치는 이 영화 촬영후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여 사후에 오스카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함께 후보에 오른로버트 드니로, 실베스터 스탤론, 윌리엄 홀덴은 오히려 고인의 죽음을 위로해야만 했다. 텔레비젼 방송국의 비리를 파헤친 <네트워크>에서 프로듀서 역을 맡은 페이 더너웨이는 3번째 지명끝에 첫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남우조연상은 '역전의 용사'들인70세의 중늙은이인 <마라톤 맨>의 로렌스올리비에와 <록키>의 버제스 베레디스를 따돌리고 <모두가 대통령의 부하들>에서 열연한 제이슨 로바즈에게 돌아갔다. 여우조연상은 14살의 어린나이에 창녀역을 맡아 크게 파문을 일으킨 <택시 드라이버>의 조디 포스터, 2년연속 수상을 노리던 <저주받은 항해>의 리 그랜트를 제치고 <네트워크>의 베아트리스 스트레이트가 차지하였다. 존 애빌드슨은 <록키>로 감독상 등 3개부문의 오스카를 가져갔고 <네트워크>는 4개부문, 4개부문의 후보에 지명되었던 <택시 드라이버>는 단 한개의 오스카도 품지못한 채 돌아갔다. 로버트 레드포드, 더스틴 호프만이 출연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모두가 대통령의 부하들>은 4개의 오스카로 작품상을 받지못한 알란 J.파큘라의 우울감을 어느정도 달래주었다. 밥 호프의 단독진행으로 로스엔젤레스 뮤직 센터에서 거행된 1978년(제50회)의 오스카 작품상은 '뉴요커' 우디 알렌의 <애니홀>에게 돌아갔다. 비록 본상은 놓쳤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오랜 친구이며 동료인 조지 루카스는 새로운 문화코드인 우주전쟁을 소재로 한 <스타워즈>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별히 매력적인 곳이라고는 전혀없는 리처드 드레이퓨스는 <굿바이 걸>로 생애 마지막 도전이자 7수에 나선 <에쿠스>의 리처드 버튼을 머쓱하게 만들며 남우주연상을 받아들였다. 60~70년대 이탈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Marcello Mastroianni)는 <특별한 날>로 1963년에 이어 다시한번 헐리웃의 거센 장벽을 무너 뜨리려고 했지만 별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그해 비지스와 함께 디스코 붐을 일으킨 존 트래볼타는 <토요일 밤의 열기>로 자신의 신들린 춤솜씨를 발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여우주연상은 <터닝 포인트>의 쌍두마차인 앤 밴크로프트와 셜리 맥클레인의 견제를 피해서 연인이며 동거남인 우디 알렌의 <애니 홀>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는 평범한 여성역을 소화한 다이안 키튼이 차지했다. 특히 그녀가 출연시 입고나온 대부분의 의상들은 70~80년대 초반, 직업 여성들의 평상복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1930년대 이탈리아 뭇솔리니 시대,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그린 <줄리아>에서 '대시엘' 역으로 분한 제이슨 로바즈가 지난 해에 이어 2년연속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귀화한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터닝 포인트>에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4전5기에 나선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줄리아>로 첫 수상의 감격을 맛보았지만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에서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준 튜즈데이 월드는 비통함을 감당해야만 했다. 감독이며 배우, 작가이며 제작자인 우디 알렌은 <애니홀>로 감독상 등 4개의 트로피를 챙겨가고도 정작 시상식에는 나타나지않고 단골바에서 술을 들이켰다.비록 본상에서는 철저히 외면받았던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의 흥행력에 힙입어 6개의 오스카를 수상하여 그나마 위안을 들었다. 70년대를 장식하는 1979년(제51회) 오스카상의 진행은 버라이어티 쇼의 일인자인 자니 카슨이 처음 마이크를 잡았다. 월남전에 참전한 이후,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전쟁영웅들의 비극적 에피소드를 담은 <디어 헌터>가 작품상을 거머쥔 가운데, 월남전 참전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내와의 갈등을 그린 <귀향>에서 참전 용사역을 맡은 존 보이트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브라질에서 온 소년>으로 10번째 지명을 받았고 <디어 헌터>의 로버트 드니로는 1977년에 이어 2년만에 다시 지명을 받았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자와 바람난 아내 역으로 등장한 <귀향>의 제인 폰다는 지난해에 이어 2년연속 지명을 받으며 생애 2번째 오스카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추억속의 배우인 65세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잉그마르 베르히만과 의기투합하여 제작한 <가을 소나타>로 생애 마지막(7번째) 오스카의 부름을 받았다. 월남전 동료이며 친구인 로버트 드니로와 러시안 룰렛을 즐기며 광기에 일그러지는 인간상을 연기한 크리스토퍼 월큰이 <디어 헌터>로 자신의 유일한 오스카상 남우조연상을 차지했고 탄탄한 연기력의 소유자인 영국 출신의 무대배우, 매기 스미스는 <캘리포니아 슈트>로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함께 받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디어 헌터>를 연출한 마이클 치미노는 감독상을 비롯하여 5개의 오스카를 챙겼고 <귀향>은 3개의 오스카를 건졌다.


-1980년대의 오스카상 이모저모

자니 카슨이 밥 호프(Bob Hope)이후, 오스카상 세레모니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80년(제52회) 오스카상 작품상은 대, 내외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프란시스 F.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거듭될수록 인간 본성을 잃고 광기에 찬 인물로 변해가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비춘 이 비극적인 월남전쟁 드라마는 내용만큼이나 수상여부를 놓고 찬반여론이 들끓었지만 결국 아카데미 위원회와 기자단은 어느새 미국사회에서 실종되어가는 가족간의 허와 실을 다룬 무난한 작품인 <크레이머, 크레이머>의 손을 들어주었다. <크레이머, 크레이머>는 그 여세를 몰아 더스틴 호프만에게 남우주연상과 그의 비정한 아내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에게 여우조연상을 함께 안아주었다. 도덕과 직업 윤리사이에서 번민하는 변호사로 출연한 <앤 저스트 포 올>의 알 파치노는 5번째 지명을 받았지만 여전히 오스카는 그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방직공장에 다니던 한 노동자가 점차 노동운동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다룬<노마레이>의 샐리 필드가 여우주연상을 품었지만 <로즈>에서 타계한 전설적인 여성록커인 제니스 조플린의 삶을 연기한 가수, 배트 미들러는 탈락의 아쉬움이 누구보다도 컸다. 질 클레이버그는 지난 해, <결혼하지 않는 여자>에 이어 <스타팅 오버>로 다시 도전에 나섰지만 역시 후보에 만족해야만 했다. 영원한 '꼬마' 같았던 <검은 종마>의 미키 루니를 따돌리고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78살의 전설적인 배우인 <비잉 데어>의 멜빈 더글러스는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열연으로 시상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의 보통 가정사를 잘 다루는 연출가로 정평난 로버트 벤튼은 <크레이머, 크레이머>로 감독상 등 5개의 오스카를 차지했다. 시간이 갈수록 분리 해체되어가는 미국 가정의 애환은 1981년(제53회)에도 여전히 지속되었고 그러한 관심은 <보통 사람들>에게 작품상을 수여함으로써 더욱 확실해졌다. 어윈 윙클러, 마틴 스콜세지 콤비의 <성난 황소>는 또다시 푸대접을 받은 가운데, <성난 황소>의 주연배우인 로버트 드니로는 1975년 <대부2>로 조연상을 받은이후, 6년만에 첫 주연상의 당사자가 되었지만 피터 오툴은 6번째 도전에서 또다시 빈털털이로 돌아가는 수모를 겪었다. 열살 이상의 나이차, 열정없는 남편, 그리고 줄줄이 태어나는 아이들, 그러한 환경을 딛고 가수의 꿈을 키우는 켄터키주의 <광부의 딸>은 시시 스페이셔크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나 롤랜즈는 남편인 존 카사베츠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글로리아>로 더이상 아카데미에게 흥미를 잃었다. 막 스무살이 된 청년 티모시 허튼은 <보통 사람들>의 보통 아이로 자라 최연소 남우조연상 수상자가 되었다. <멜빈과 하워드>의 메리 스틴버겐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가운데 워렌 비티에 이어 주류배우가 감독을 겸업한 두번째 주인공이 된 로버트 레드포드는 <보통 사람들>로 감독상과 함께 4개의 오스카, 그리고 연출가로서의 능력도 입증받았다. 1982년(제54회)의 오스카는 실화를 근거로 한 <불의 전차>와 <레즈>가 두각을 나타냈다. 비록 올림픽 얘기를 다룬 다큐멘타리 형식의 <불의 전차>에게 작품상을 빼앗기긴 했지만 <레즈>를 연출한 워렌 비티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다재다능한 재주꾼임을 증명해 주었다. 남우주연상은 딸, 제인 폰다가 아버지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오스카 무대를 위해 제작에 참여한 <황금 연못>의 헨리 폰다에게 돌아갔다. 살아생전 100여편의 뛰어난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76살의 나이에 남우주연상을 받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 바람에 6번째 오스카 도전에 나선 <악의 부재>의 폴 뉴만은 다음~ 하며 기회를 미뤄야했다. <허울좋은 여자>로 4번째 오스카상 여우주연상에 지명된 마샤 메이슨(Marsha Mason)을 <황금 연못>에서 노부부의 늙그막 사랑을 잘 표현한 캐서린 햅번이 전무후무할 4번째 여우주연상에 지명되었다. <불의 전차>의 이안 홈, <레즈>의 잭 니콜슨 등,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아서>의 존 길거드 경(Sir)이 근 20년만에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감격을 누렸다. 미디어 세상내의 공산당 색출이라는 예민한 소재의 영화 <레즈>의 모린 스태플리턴이 20살의 엘리자베스 맥거번을 밀어내고 조연여우상을 가져간 이해, 워렌 비티는 <레즈>로 감독상을 차지한 두번째 배우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감독 출신의 배우, 리처드 아텐보로가 연출한 마하트마 간디의 일생을 담은 <간디>가 1983년(제55회) 오스카상 작품상을 받은 가운데 그해 최고의 이슈는 단연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티>였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동원한 스필버그의 '공상'은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해주며 갖가지 기록들을 양산해냈다. 마하트마 간디와 너무나 흡사한 벤 킹슬리는 <간디>로 남우주연상을 당연히 가져갔지만 피터 오툴(7회), 폴 뉴만(7회), 두 명의 오스카 후보 단골배우는 심장이 터질 기분이었다. <소피의 선택>의 메릴 스트립은 1980년 오스카 여우조연상에 이어 주연상마져 가져간 배우로 등록했다. <사관과 신사>의 흑인배우, 루이스 고셋 주니어는 주연상 후보에서 탈락한 리처드 기어를 대신하여 조연남우상을 수상하며 해티 맥다니엘, 시드니 포이티에에 이어 사상 3번째로 오스카상을 받은 흑인배우가 되었다. 한편 전설적인 미녀배우인 프란시스 파머의 일대기를 다룬 <프란시스>의 제시카 랭은 주연상 대신, <투씨>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데 만족했다. <간디>를 연출한 리처드 아텐보로는 8개의 최다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2년만에 다시 호스트로 돌아온 자니 카슨의 진행으로 1984년(제56회)의 아카데미 작품상은 평범한 소시민들의 이야기인 <애정의 조건>에게 돌아갔다. 이전 3번이나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도 번번이 물먹었던 <부드러운 자비>의 로버트 듀발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드레서>의 앨버트 피니(Albert Finney)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2년연속 오스카의 부름을 받은 <애정의 조건>의 데브라 윙거가 탈락하는 대신, 그녀의 어머니 역으로 분한 셜리 맥클레인이 오스카상 여우주연상의 감격을 누렸다. 4번째 도전에 나선 제인 알렉산더는 박수로서 셜리의 축하를 지원해주었다. 잭 니콜슨마져 <애정의 조건>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자 함께 출연한 존 리스고우는 머쓱해졌다. <가장 위험한 해>에서 난쟁이 사진기자 콴으로 출연한 린다 헌트가 여우조연상을 건네받았고 어느정도 수상예감을 기대하고 있던 <실크우드>의 셰어는 그냥 웃기만했다. 제임스 L.브룩스의 <애정의 조건>은 감독상을 비롯하여 5개의 오스카를 챙겼다. 1985년(제57회) 시상식은 잭 레먼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모차르트의 음악과 삶을 반추한 <아마데우스>가 작품상의 품위를 더욱 높여주었다. 덩달아 <아마데우스>의 주연배우인 F.머레이 아브라함은 길고 긴 무명에서 벗어나 주연상을 쟁취하며 유명인이 되었고 앨버트 피니는 <볼케이노>로 2년연속 고배를 들었다. 1930년대 대공항, 텍사스의 어느마을을 배경으로 다 망가져가는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한 여인의 불굴의 의지와 주변사람들의 인정을 다룬 <마음의 고향>에서 빛나는 연기를 펼친 샐리 필드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캄보디아 전쟁광들의 잔인무도한 살육극을 파헤친 <킬링필드>에서 뉴욕타임지의 현지 기자인 프란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행 S.노르가 남우조연상을 건네받았다.(동양계 배우로는 사상 2번째). 그해 77살의 페기 애쉬크로프트는 <인도로 가는 길>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함으로써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남겨놓은 공적들을 보상받았다. <아마데우스>를 연출한 밀로스 포만은 10년전 <뻐구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후 두번째 감독상과 8개의 오스카를 덤으로 받는 최고의 해를 보냈다. 여전히 로스엔젤레스 뮤직 센터에서 코믹한 배우인 로빈 윌리엄스의 사회로 진행된 1986년(제58회) 오스카 작품상은 시드니 폴락이 연출한 아프리카의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중년 남녀의 사랑을 깔끔하게 처리한 <아프리카 탈출>에게 돌아갔다. <거미 여인의 키스>의 윌리엄 허트는 <위트니스>로 생애 평생 처음 오스카후보에 지명된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를 머쓱하게 만들며 남우주연상을 거머졌다. 당대 최고의 흥행배우로 모든 제작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인 해리슨 포드는 그후 단 한번도 지명을 받지 못했다. 여우주연상은 61살의 제랄딘 페이지가 <바운티풀로의 여행>으로 8번의 지명후에 수상의 환호성을 질렀고 78살의 돈 아메치는 늙은 지기인 제시카 탠디가 바라보는 가운데 <코쿤>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안젤리카 휴스턴은 아버지, 존 휴스턴이 연출한 필름느와르, <프리찌스가의 명예>로 조연여우상을 받아들고 아버지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로인해, 할아버지(월터 휴스턴), 아버지에 이어 3대가 오스카상을 받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아프리카 탈출>로 시드니 폴락이 7개의 오스카를 챙겨간 가운데, 장장 11개부문 후보에 오른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퍼플>은 단 한개의 수상부문도 나오질않아 스필버그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코메디언 체비 체이스와 호주출신의 폴 호간이 동시 진행을 맡은 가운데 시작된 1987년(제59회) 오스카상 작품상은 월남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에게 수여하며 미국의 국수주의자들은 조금이나마 반성을 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동안 미안한 탓인지 지난 해 아카데미 회원들은 그에게 특별공로상을 미리 건네주었다. <컬러 오브 머니>로 지긋지긋한 8수를 마감한 폴 뉴만은 주마등같이 지나간 세월들을 회상하듯 트로피를 받아들었다. 실제 청각장애인인 말리 매틀린은 <작은 신의 아이들>로 여우주연상과 애인(윌리엄 허트와 공연도중 사랑에 빠짐)을 동시에 얻는 횡재를 했다. 헐리웃의 새로운 여성상을 구현한 '근육걸' 시고니 위버는 <에일리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나의 자매들>의 마이클 케인은 그나마 다행히도 4수만에 남우조연상을 건네받고 함께 출연한 다이안 위스트(여우조연상)와 편안한 모습으로 시상식에 임했다. <플래툰>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올리버 스톤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9>의 각본상 이후, 오랜만에 감격을 맛보았다. 체비 체이스의 단독 사회로 수년만에 슈라인 오디토리엄으로 돌아온 1988년(제60회)의 아카데미 작품상은 이탈리아 출신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연출한 <마지막 황제>의 독무대였다. 9개부문에 지명되어 9개 모두 수상한 기록을 세운 이 작품은 중국의 근대사를 조명한 역사극으로 특히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몰이를 한 작품이기도 했다. 야망과 신분상승을 위해 온갖 암투가 난무하는 월가를 비꼰 <월 스트리트>의 마이클 더글러스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와 함께 출연한 20대의 찰리 쉰은 가장 각광받는 신예스타로 떠올랐고 <어두운 눈동자>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오스카로부터 마지막인 세번째 지명을 받았다. 5년전, <실크우드>로 오스카 무대를 밟은적 있는 가수겸 배우, 셰어는 <문스트럭>으로 첫 오스카를 챙겼지만 정작 수상보다는 속이 훤히 다 비치는 드레스로 큰 화제를 몰고왔다. 제임스 본드 역으로 낙인찍힌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남배우, 숀 코너리는 30년대, 알 카포네 일당을 소탕하는 <언터쳐블스>로 생애 유일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라는 대접을 뒤늦게 받았다. <문스트럭>의 올림피아 듀카키스가 조연여우상을 수상한 그해, <위험한 정사>는 큰 파문을 몰고왔다. 마이클 더글러스, 글렌 클로즈가 공연한 이 작품은 '바람 한번쯤 피는 게 뭐가 대수야?' 생각했던 보통 남자들의 대수롭지않은 바람끼에 무서운 칼날을 들이댔다. 아이돌 스타인 롭 로우와 스노우 화이트가 '프라이드 메리'에 맞추어 즉홍 뮤지컬을 선보이며 시작된 1989년(제61회) 오스카상 작품상은 장애인 형과 그런 형의 보험금을 노린 형제간의 희비애를 다룬 <레인맨>이 차지했다.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은 함께 출연한 톰 크루즈(Tom Cruise)가 전혀 지명을 받지못한 것과는 달리 1980년 <크레이머, 크레이머>에 이어 다시한번 주연상을 거머쥐고 프레드릭 마치, 스펜서 트레이시, 게리 쿠퍼, 말론 브란도와 같이 2번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빅>에서 성장의 혼탁기를 겪는 톰 행크스가 처음 지명을 받았고 조디 포스터는 강간 피해자의 고통스런 후유증을 고발한 법정영화 <피고인>으로 여우주연상을 처음 수상하였다.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로 케빈 클라인이 조연남우상을 수상할때, <허공에의 질주>에 출연한 리버 피닉스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하며 '제2의 제임스 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알렉 기네스는 10여년만에 <리틀 도리트>로 후보 지명을 받았다. 직업여성들의 직장내 성희롱 문제를 비꼰 <워킹 걸>의 두 주역인 조안 쿠삭과 시고니 위버를 제치고 <우연한 여행자>의 지나 데이비스는 미모로 연기력을 압도하며 조연여우상을 가져갔다. 배리 레빈슨은 <레인맨>으로 감독상과 4개의 트로피를 챙겼다.


출처
[기타] filmactors
http://kin.naver.com/knowhow/detail.nhn?d1id=5&dirId=5&docId=586205&qb=7Zmp6riI7Jew66q7&enc=utf8&section=kin&rank=8&search_sort=0&spq=1&sp=1&pid=gi8CKsoi5UNssudtaEdsss--069892&sid=TZ8kMPMin00AACQBFDA